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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미술인의 윤리, 반성과 성찰

최열

상상 이상의 사건이 일어났다. 소문이야 있었지만 설마 하던 것이 현실로 드러나 10월 21일자 한 언론의 1면을 장식해 버리고 말았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국고보조금 4억 9천만 원 가량 횡령한 의혹을 감사원이 포착했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가 국고보조금 2억 원 가량 유용한 혐의를 감사원이 포착, 통보하여 곧장 반납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언론에서는 ‘민예총직원 A씨가 횡령한 금액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으며 증거수집이 끝나는 대로 검찰이나 경찰에 수사를 의뢰할 계획’이며 예총에 대해서도 ‘감사과정 이어서 금액을 확인해줄 수 없으나 보조금을 당초 목적 이외의 용도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김황식감사원장은 10월 6일 국회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일부 단체는 수억 원씩 횡령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고 했으며 다음 달에 감사위원회 의결을 거쳐 수사기관에 의뢰한다고 한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오늘의 예총은 1961년 6월 5.16군사정변으로 설치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공포한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공보부가 추진한 문화예술단체 통합 정비와 재편성에 따라 12월 출범했으므로 창립 50년을 눈앞에 두고 있고 민예총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에 부응하여 1988년 12월 민족예술의 발전, 문화예술운동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출범했으므로 올해 20주년을 맞이하였다. 두 단체 산하에는 모든 장르를 망라하는 각 분야 및 전국 각 지역단체가 대거 가입해 있다. 한국예술총본산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6월 19일 충청도의 한민예총지부창립총회에서 기념사를 통해 “지역의 문화적 자생력을 키워 지역 문화예술발전에 헌신하고 지역민과 함께하는 문화예술, 생활 속의 문화예술을 키워 나가겠다”고 가당 찬 포부를 밝혔다는 보도가 기억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예총 50년, 민예총 20년 세월 동안 그렇게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해 왔으니 이 또한 얼마나 위대한가.


지난 21일 아침, 나는 한 언론사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 끝자락에 날아든 한마디. “원래 같은 편 아니던가요” 아, 그래 그렇구나. 나는 그 어떤 단체 소속회원이었구나. 단 한 번의 회비도 내지 않았건만, 총회장은 커녕 어떤 행사에도 나간 일 없었지만 알 만한 사람이야 다 그렇게 안다. 나는 그 어떤 단체회원이었던 게다. 게다가 어떤 단체가 벌이는 교육프로그램 강사로 나갔고 강사료를 챙겼으니 말이다. 감사원 감사내용이야 조만간 사실여부가 가려지겠지만 내 생각은 그와 무관하게 지난 시절 추억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최초의 분노는 수런대는 말들 이었다. '눈 먼 돈이 굴러다닌다.' 처음엔 로또 복권기금이라 했다. 그래서 말했다. 복권기금이야말로 백성의 피땀이 진하게 뭍은 직접 세금 같은 것 아니냐고, 그러므로 더욱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 미술인 상당수는 그 지원금 타내려 경쟁했고 자신의 창작물에 그 눈물어린 백성의 돈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미술 관련 개인은 개인대로, 단체는 단체대로, 거기에 부유한 기관은 물론 심지어 상업 회사까지 끝없는 쟁탈의 나락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목도해야 했다. 나 또한 서울을 제외한 지역으로 한정했으되 지원금 심사에 나섰으니 저 쟁탈전(爭奪戰) 방조자(傍助者)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반성하고 사죄한다. 민주화운동이건 문화예술운동이건 그 대열에 참여하는 미술인이라면 순수한 시대정신의 요구를 실현하는 사명을 실천하는 자이며 또 그 운동을 이끄는 활동가라면 인간권리(權利)와 미술의 이상(理想)을 수호, 증진시킬 과업을 수행하는 자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놀랍게도 자신의 이익과 부유함을 실현하는데 그 운동경력을 활용하지 않았는지. 경력을 훈장처럼 내세워 권력의 자리를 탐한 자가 있지나 않은지. 지난 해였을 게다.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과거 정권에 참여했던 어용집단의 반성과 어용개인의 성찰이 백성에게 버림받은 사실을 중심삼아 줄을 이을 것으로 예상했다.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경이로웠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미술분야는 단 한마디만이라도 반성은커녕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단 소문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일련의 사건으로 희생자처럼 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내 귀를, 내 눈을 의심했다.


나는 그 10년 동안 어용관료의 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반성과 성찰에서 자유로운 존재라고 여겼던 것인데 저 기자의 날선 꾸짖음이 나에게도 날아든다. 날카로운 비수처럼. 반성과 성찰 없는 운동집단과 개인은 고여 썩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권력을 잡고 10년이다. 어찌 반성할게, 성찰할게 없겠는가. 하지만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백성의 어리석음만을 탓하고 있는 장면을 지켜볼 뿐. 탐욕의 유혹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어서 순수를 파괴하고 이상을 붕괴시키는 힘인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일부 미술인, 집단의 탐욕은 하늘을 찌르고 바다를 가를 만큼 무서운 기세로 솟구친 지 오래다. 작가는 시장에, 화상은 자본에, 자본은 투자에, 비평을 포함한 언론은 가격에 목을 매달고 있다. 그 탐욕이란 이름의 희극이여, 어쩌란 말인가. 이번 횡령사건이 진위 판별이 곧 날 테지만 내 걱정은 그게 아니다. 반성도 성찰도 없이 질주하는 저 탐욕 자체이다.



최열(1956- ) 중앙대 예술대학원 석사. 가나아트 편집장 역임. 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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