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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말의 가치

문혜진

비평이 하는 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요즘 나의 상황에서 말의 가치를 의심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일지도 모르겠다. 말(글)이 곧 지향이자 결과물인 비평의 속성상 이 일을 업으로 삼는 자가 말의 효용에 의구심을 품는다는 것은 병행할 수 없는 가치관의 상충을 가리키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최근 보고 들은 일련의 경험들은 이 시대에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게 깊은 번뇌를 안겨주었다. 

얼마 전 나는 우연히 어떤 사건 하나에 연루되어 상당한 심적 고초를 겪었다. 과거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였던 작가가 한 전시에 포함된 것을 알게 된 나는 해당 공간의 운영자에게 이를 알렸다. 해당 사건은 이미 몇 해 전에 법적 판결이 완료되어 가해 사실을 법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공간의 운영자와 기획자는 작년 말 불거졌던 성폭력 사태 때 직간접적으로 SNS상에서 성폭력 반대 의지를 명시적으로 표방해왔던 자들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라는 전시 주제에 해당 작가의 참여가 맞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영자 및 기획자의 반응은 나를 당혹케 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가해자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본인들이 표방한 말과 현 전시 상황이 극히 모순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친분과 이해관계가 얽힌 이런 유의 사건에서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기 쉽지 않음을 알고 있고, 성폭력 가해자 모두를 죄질의 정도와 관계없이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도 부적절하며, 한 번의 잘못으로 가해자를 영원히 배제시키는 것도 동의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운영자와 기획자를 답 없는 딜레마에 빠뜨린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까지 품고 있던 나의 고민은 뭘 모르고 성폭력 반대 선언을 한 것 같다는 운영자의 말에 어이없이 무화되고 말았다. 

행동이 뒤따르지 못할 때 쉽게 변질되는 말
물론 우리 모두가 이런 문제들에 무지했고 너나 할 것 없이 더듬더듬 배워나가는 중이다. 허나 집단 공황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작년 성폭력 사태의 직간접 당사자였던 이들이 자신들의 발화와 행동의 괴리에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은 참을 수 없는 말의 가벼움으로 인해 허탈함을 불러일으켰다. 숨 가쁘게 쏟아지던 그 수많은 성폭력 반대 선언과 연대 발언 중 제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라는 의심과 함께. 급기야 이런 회의는 여성예술인연대(AWA)의 성폭력 반대운동에 서명을 망설이게 하였다. 실질적인 제도 변화라는 그들의 취지가 정확히 평소 주장하던 바였음에도 말이다. 
어쩌면 이런 일은 지극히 흔한 일일 것이다. 특별히 부도덕해서라기보다 그저 쉽게 말하고 쉽게 행동하며 그렇기에 이해관계나 친분 앞에서 쉽게 변질되는 발언들. 하지만 이런 가벼움을 일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하나의 경향을 이룬 것 같다는 것이 나의 고민의 요체다. 

글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는 플랫폼의 무게중심이 SNS로 넘어가면서 생산되는 말(글)의 양과 속도는 비할 바 없이 증대되었다. 특정 사안을 단기간에 부각시키는데 탁월한 SNS의 기능 탓에, 전시의 홍보나 이슈의 공론화는 거의 SNS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네트워크의 노드에 해당하는 주요 인물들의 타임라인을 통하면 어떤 사건을 알리거나 실제보다 부각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되었다. 이제는 내용을 만들기보다 그것을 포장(디자인)하고 홍보(유통)하는 일이 중요한 시대다. 바꿔 말하면 내용보다 이를 알리기 위한 전략이 중요해졌다로 해석할 수 있다. 모두들 전략에 치중하는 상황에서 실제 알맹이는 갈수록 가벼워진다.

SNS에서 회자된 전시가 실제로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는 흔하고, ‘국선즈(국립현대미술관장 선임에 대한 미술인 성명)’를 비롯해 떠들썩했던 선언들은 금세 유야무야된다. 어디에서도 발언대를 얻지 못한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이면에는 좋아요와 리트윗 몇 번으로 손쉽게 편승하는 진보 코스프레가 난무한다. 이슈몰이와 이미지 메이킹의 홍수 속에서 넘쳐나는 말은 갈 곳을 잃는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그 수많은 말들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길은 표명의 무게를 인지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성기획자모임과 여성예술인연대가 오래도록 존속하기를 바란다. 확인했듯 우리가 속한 계는 성폭력 문제를 이제 인식했으며 증명해야 할 말의 무게는 무겁기 때문이다.


- 문혜진(1977-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전문사 졸업. 비평가·번역가·미술사연구자. 스포츠조선 사진비평상 평론부문으로 등단(2006). 『90년대 한국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2015) 지음, 『사진이론』(2016, 공역), 『테마현대미술노트』(2011)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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