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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예술은 원래 융복합이다

이선영


조현익, 믿음의 도리-봉황, 2016, 철판에 유채 및 혼합재료,
나무패널, 스크래치, 244×244cm, 생생화화 2016전(2016.12.15-2017.2.5, 경기도미술관) 출품작


2016년 말 한국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국정 농단 사건 중 비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체육계의 대통령’ 김종 전(前) 문체부 차관은 박태환 선수에게 리우 올림픽 출전을 포기하라고 압박하면서 자기 말대로 하면 뒤를 보장해주겠다고 회유했다. 그 ‘뒤’란 자신의 영향력으로 기업의 스폰서를 붙여주는 것은 물론, 모교의 교수 자리를 보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수해야 할 것 아냐? 교수가 최고야. 왜냐하면, 교수가 돼야 뭔가 할 수 있어.” (SBS, 11월 19일 방송) 평생 수영밖에 모르던 박 선수는 ‘그 높으신 분’이 너무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더 두려운 것은 더이상 자신이 수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겠지. 아무리 유명한 선수라도 오래 할 수 없는 스포츠의 속성상 이러한 현실논리는 무시할 수 없다. 스포츠보다 더 오래 할 수 있는 예술 분야도 작가냐 교육자냐 하는 갈등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요즘은 작가고 기획자고 이론가고 간에 학력 스펙이 엄청나게 높아지다 보니, 교수 자리는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애타는 대상이 됐다. 

작업하는 이가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모두 해소해줄 것 같은 과도한 기대치가 여러 직업 중의 하나에 권력을 몰아준다. 한 인간이 현역으로서의 생산과 교육자로서의 재생산자라는 두 역할을 병행하기 힘든 이유는 ‘헬조선’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청춘들을 어느 기간 동안 책임지는 일만해도 너무 벅차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부터 초월적인 작가이자 교수는 내가 아는 한 극히 드물다. 그나마 그들은 훌륭한 작가이기에 훌륭한 교수일 수 있었다. 김 전 차관의 말을 인용한 것은 약간의 힘의 차이가 나도 갑질의 횡포를 저지를 준비가 돼 있는 삐뚤어진 정신 상태를 환기하기 위함이지, 오늘도 자본과 권력에 흔들리는 대학의 중심을 바로잡고자 나름대로 자기 임무에 충실한 다른 교수들을 폄하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러나 미술계에서도 교수라는 직함으로 ‘OOO 사단’하는 식으로 학연을 바탕으로 위세를 떨치던 ‘작가’들의 행적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가깝게는 교육계 비리가 그렇다. 

권력자의 딸을 부정입학시키기 위해 대학 총장 이하 다수의 교수와 교직원들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예가 있다. 들키지만 않았다면 권력으로부터 보답 받은 재정지원으로 학교에 크게 기여한 ‘능력 있는’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자신도 교수 출신인 김 전 차관에게 교수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뭔가 할 수 있는 도구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철학 시간에 배웠던 그 도구적 합리성이다. 도구적으로 합리적인 예술이란 재미있는 교재, 훌륭한 메시지, 아름다운 장식 등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격적인 작업과는 거리가 있다. 연말에 불거진 국정 마비 사태는 한마디로 월권과 관련된다. 문화 권력의 경우, 문화에서 권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서 문화가 나왔다는 것이 비극이다. 비(秘)선을 활용하면서 계속 법을 어겼으면서 ‘헌법이 정한 법과 절차에 따라’ 자리를 보전하겠다는 최고 권력자는 이중적이다. 권력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만 하는 부류와 안 그래도 되는 부류를 나눌 뿐이다. 후자는 문어발처럼 여기저기 걸치면서 자기 권력을 극대화하려 한다. 

보수당 집권 동안에 문화예술계는 권력에의 의지가 강한 기회주의적 부류, 즉 권력을 등에 업고, 맡은 바 임무를 열심히 하는 다른 이들의 등을 치는 기생적 존재들이 득세했다. 이렇게 전도된 현실 속에서 작업을 비롯한 하나에만 열중하는 것은 위험하기조차 하다. 그래도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 먼저 아닐까. 세계와 사회에 두루 관심이 있되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하는 것이 정도(正道)인데, 돈=권력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채 이리저리 몸을 걸치고 있는 그 반대 부류가 ‘현실적’인 존재로 생각되고 있다. 수년간 그들만의 짬짜미를 통해 국민의 고혈을 빨아 온 세력이 온 나라를 레드 오션으로 만들었다. 차이의 공존이 아니라, 같은 색 일색을 권하는 사회를 낳은 그들은 문화예술의 공적(公敵)이다. 박근혜 정권에서 그토록 떠들어댔던 ‘융복합’은 최고 권력자를 꼭짓점으로 하는 권력=돈의 서열을 내면화한 가치는 아닌가 의심해 본다. 물론 삶이라는 전면전에서 하나만 열심히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은 하나 안에 여럿이 있다. 또는 여럿을 진정 아름답게 통합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술이다. 그 점에서 예술은 그 자체가 융복합이다.


- 이선영(1965- ) 조선일보 미술평론 부문 등단(1994),『미술평단』편집장(2003-05),『미술과 담론』편집위원(1996-2006) 역임. 제1회 김복진 미술상(2006), 한국미술평론가협회상(이론부문)(2009), AICA Prizes for Young Critics(2014)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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