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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비엔날레의 추억

김복영

금년 후반기는 전국에서 국제 비엔날레를 위시한 대형 미술행사가 러시를 이루었다.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가버린 느낌이다. 이제 남는 건 기억이다. 기억이 중요하다. 기억에 새로우면 그 다음을 기대하는 게 순리다. 좋은 영화를 보고나면 감동한 만큼 다음을 기다리지만 그렇지 않을 시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기억이 추억(追憶, recollection)으로 발전하는 것도 이 선에서다. 기억이니 추억이니 하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대형 행사일수록 끝났을 때가 중요한 것 같다. 기억에 새롭지 않은 건 금방 잊혀진다. 기억을 새롭게 해서 추억을 만드는 게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의 살림살이로는 어림도 없는 액수를 투입하고도 섭한 이야기를 듣는 건 달가운게 아니다. 이제는 밝은 얘기가 들리도록 해야 한다. 행사를 이끌었던 스탭들을 격려하는 일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짧은 경험으로 이만큼 치렀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닌가. 으레히 유감이란 게 있다는 건 상례이고 보면 옥에 티가 아닌가. 정작 말해야 할건 더 멋진 다음을 꾸리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대형전시일수록 흔히 심포니오케스트라에 비유한다. 많은 섹션들의 앙상블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고려할 건 우리의 고집을 국제전으로 승격시킬 테제와 테마다. 제 3국인을 감독으로 선임했어도 이를 두고 반드시 토의해야 한다. 테제를 테마로 전개하는데 어떤 섹션을 고려할지는 그 다음이다. 주최측은 대개 이런 품목들을 가지고 관객들을 설득할 의무가 있다. 설득의 수순은 이럴 것이다. 설정해 놓은 동선(動線)을 따라 간다. 점차 테마와 섹션의 연결이 드러난다. 연결은 흐릿한데서 명료해지는 과정을 밟는다. 보고 나면 섹션들의 차별성이 떠오른다. 차별성이 분명할수록 전체를 파악하기 쉬워진다. 이렇게 보면 대형전시일수록 무엇을 먼저 보고 나중에 볼 건지가 중요하다. 동선의 순차적 배열이 그만큼 비중을 갖는다는 뜻이다.


순차배열과 대척점에 동시배열이란 게 있다. 탈근대적 전시기획들이 선호하는 게 이것이다. 어느 배열법을 택할지는 테마를 가려서 해야 한다. 부산비엔날레는 순차배열이 눈에 띄었던 반면, 광주비엔날레는 동시배열이 앞섰다. 테제는 있었으나 테마와 섹션의 타당성이 무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말이다. 섹션의 이해가 어렵고 컨셉과 이미지의 분류방식이 애매했다. 동선을 따라 관람하다 보면 이게 테마고 섹션일까 하는 의문이 계속 이어졌다. 테제는 있으나 테마와 섹션이 애매하다는 건 곧 전시가 애매하다는 걸 뜻한다. 섹션이 중요한 만큼 이를 받쳐줄 또하나 중요한 게 있다. 섹션들의 명과 암, 섹션들이 갖고 있는 기표집단의 강과 온, 메시지의 강과 약, 소재의 정(靜)과 동(動), 정보량의 단순과 복잡 같은 대비적 안배와 전후 연관성이다. 이것들이 없이는 섹션의 분류가 아무리 그럴듯해도 지루함과 역겨움 때문에 관객은 이내 권태에 빠지게 된다.


이념적 전시가 아닌 볼거리 전시 연출이 필요하다

전시조직 경험이 있는 이들도 종종 이러한 리스크를 망각하기 쉽다. 기획을 현실로 옮기다 보면 주객이 전도될 위험이 상존한다. 흔히 소홀히하는 것이지만 스탭들과 경험있는 DP전문가들의 공동스크리닝이 치열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 광주비엔날레처럼 특정 이데올로기를 테제로 하다 보면 십중팔구 실패하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이념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비디오나 영상물이 너무 많아 지나친 관람시간을 요구했다는 건 관람자의 인내를 요구하는 것으로 봐 줄 수 있다. 그러나 제 3세계의 빈곤상을 파헤친다고 어둡기만 한 정황들·울부짖음·죽음·카타스트로피의 섹션만으로 총체적 동질성을 강조한 나머지, 섹션의 분절이 부재한데서 어떤 테마를 엮어낼지를 잊어버렸다. 이래서는 순차건 동시건 섹션처리가 무용지물이다. 섹션이 어디서 시작하고 다음으로 이어질지를 감독마저 알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부산비엔날레는 오늘의 세계가 소비충동의 부메랑으로 비속성을 드러낸다는 걸 테제로 했다. 테제를 입증(?)키 위해 테마를 분절하지 않고 대부분 비속의 씬으로 채웠다. 섹션은 있으나 한결같고 비슷한 비속 테마로는 관객을 설득하기가 무리였다. 비교적 재미있었다는 일말의 평가는 다행이지만, 이는 작품 선정의 다양성을 고려한 반응이었다. 역시 테마와 섹션의 차별성과 연속성이 아쉬웠다.


전시는 그냥 전시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보는 게 즐거워야 한다.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는 느끼고 생각하도록 열어두어야 한다. 이를 교시(敎示)하려면 무리가 따른다. 이는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의 실패한 비엔날레의 교훈이다. 테마의 제시와 해석을 섹션으로 옮기는 게 이렇게 어렵기만 한 걸까?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그 어떤 이념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기 이전에 테마의 제시와 전개, 반전과 비약의 일대 사건이다. 그래서 음악이고 예술이다. 국제 비엔날레 역시 이래야 한다. 그 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 우선은 볼거리를 즐겁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둡고 칙칙하고 비속한 섹션이 있었으면 그 대척점에 밝고 희망적인 미래를 투사하는 스펙터클을 부각시켜야 한다. 이 것들의 미팅포인트에서 테제가 부각되도록 해야 한다. 이게 예술의 규칙이다. 이념형 전시가 아니라 볼거리형 전시를 창출하는 연출이 아쉬운 때다.



김복영(1942- ) 서울대 미학과 석사. 현 한국예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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