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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창조적 경합: 작품과 비평과 전시의 역장

강수미

화가 세잔(P. Cezanne)에게는 현상학자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가 있다. 후자는「세잔의 회의」를 씀으로써, 어쩌면 화가 자신은 알 수 없었거나 확신할 수 없었던, 세계와 주체가 ‘그림’ 이라는 그 독특한 매체를 통해 관계 맺는 상태를 우리에게 전달했다. 예컨대 세잔의 <생 빅토와르 산>은, 화가의 몸과 대상의 실체가 부딪혔던 지각의 순간을 짧게 끊어지면서도 견고한 붓 터치로 화폭 위에 구축한 그림이다. 그리고 퐁티의 철학-예술비평은, 에두르면서도 사유 대상을 지향해 나아가는 현상학의 언어로 세계의 살(flesh)과 화가의 시선이 부딪히며 만들어냈을 지각의 역장(force-field)을 문자로 전개한 글이다.

나는 퐁티의 ‘세잔론’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방식의 관계들 중 매우 아름다운 한 만남을 성취하고 있으며,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예술적·지적으로 가장 격렬한 경쟁관계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사실 그 글 속에서 맺어진 관계의 ‘아름다움’은 말이 그렇지 세잔이라는 앞선 대가의 예술을 두고 퐁티라는 지적 영역의 거장이 사유의 현재 상태에서 벌인 사투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세잔의 그림과 퐁티의 비평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복종하거나 더 나쁘게는 아첨하듯 기대거나 이해득실을 따지며 기생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예술적이고 지적인 투쟁의 빛나는 성과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척 냉소적으로 들리겠지만, 요즘 한국현대미술 ‘판’의 돌아가는 분위기는 다른 어느 때보다 ‘그럴듯하게’ 쾌적하고 안락하고 멋스러워 보인다. 일명 ‘영 아트 피플’은 세련된 패션과 말끔한 애티튜드로 쿨 미소를 날리며 갤러리 문지방을 넘나들고 있으며, 각종 정체가 모호하거나 과장된 직함을 단 ‘사무원-큐레이터’는 그 젊은 아티스트들과 문화산업의 효과적 체계 속에서 기능적으로 일한다. 그리고 소위 ‘비평가’는 미술시장의 거품 팽창과 더불어 급속히 늘어난 각종 지면에 가령 ‘문외한도 1시간(?)이면 꿰뚫어보는 미술품 투자 전략’내지는 ‘현대미술 쉽게 읽고 쉽게 소비하기’같은 글을 쓰며 ‘선생님’ 대우를 받는다. 이렇게 입바르게 냉소의 소리만 골라하고 있는 나 또한 그런 판의 그렇고 그런 인간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서두에 언급한 세잔과 퐁티가 거대한 산맥처럼 부럽게 보인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돌아가는 문화-예술 판 메커니즘이 부끄러워진다.

작품과 글과 전시의 창조적 경합을 기대
구체적으로 말해서 무엇이 부럽고, 누구에게 부끄러운가? 부러운 것은 작가로서든 학자 또는 비평가로서든 세잔이나 퐁티 스스로가 성취하고자 한 것이 ‘높은 지향성’을 가졌으며, 그것이 그들 작품 속에서 일정 정도 실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그 지향성은 당장의 이익이나 유명세, 소소한 권력 따위 외적인 것에 굴복 혹은 타협하지 않는 의지이자 정신이다. 또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체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그 일이 요구하는 의식과 실천에 대한 즐거운 복종이다. 바로 이 문장을 읽으며 어떤 이들은 내게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예술과 학문의 일을 한다면, 그런 ‘존중’과 ‘구속적 즐김’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점차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희박해지고 전시 기획자의 행보 속에서 불가능해지거나 비평가의 글 속에서 별 의미 없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격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인을 꼽으라면, 나는 자본주의를 하나의 절대적 세계관으로 내속한 우리의 사회적 의식을 들겠다. 작품이 팔릴 것인지 노심초사하는 어떤 작가에게‘왜 그렇게 얽매이느냐?’고 했더니 ‘팔아야 다음 작업을 할 것이 아니냐? 그래야 그 존중할 만한 예술이라는 것을 할 것 아니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일견 동의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결코 ‘자본주의 예술’ 바깥, 자본 억압적 시스템 너머의 예술은 꿈도 못 꿀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괴롭게 떠오른다.


지금 현재 어딘가에서 작업을 구상하고, 글쓰기 훈련을 하고, 전시 기획안을 썼다 지웠다 하는 ‘새로운 미술의 얼굴들’은 분명 예술에 대한 존중과 고통스러운 즐김 속에서, 창조적 미술 판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부끄럽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이야말로 지금 이 곳의 평범하게, 타협적으로, ‘그들만의 리그’처럼 편협하게 굴러가는 미술 메커니즘을 깨뜨릴 희망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이들의 작품과 글과 전시가 창조적으로 경합을 벌이는 일이 곧 여기서 폭발하기를 원한다. 그 즐거운 경합을 뒷전에 미뤄두고 다른 일로 바쁜 나와 당신의 면전에 들이대지기를.



- 강수미(1969- ) 홍익대 미학과 박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시기획 부문 올해의 예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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