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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미술은 전시가 필요한가?

김병수

‘좋은 전시, 나쁜 전시, 추한 전시.’ 얼마 전 서울 중심가에 있는 유수의 사립미술관에서 전시를 관람하면서 머리에 스친 문구다. 굳이 전시에 대하여 윤리적인 판단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시가 놓인 상황과 그 미술관이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는 맥락이 자꾸 걸렸기 때문이다. 이러면 존재론 쪽으로 이야기가 넘어간다. “왜 미술관은 없지 않고 있는가? 있는 것의 의미는 있는 것 속에 있다.” 미술관 속에 미술관의 의미가 있을까? 거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미술의 집에는 정말 미술이 있을까? 아니면 미술의 거주지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배치 혹은 배열에 따라 유목하는가? 그 자리들이 전시라고 불리어지는 영역을 형성하는가? 그러면 미술은 전시에서 사는가? 



그렇다면 전시 속에 있지 않은 미술은 유령이다. 한때 엄청나게 출몰하던 유령들은 대개 자신들의 집을 장만했다. 트렌드이다. 물론 그들의 거주지 주소는 자주 바뀌는데, 이 책에서는 고정난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집과 거주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위장 전입이나 차명 매입은 애교이고 ‘쪼개기’와 진짜 ‘유령의 집’을 만들어 부당 이익을 보려는 경우 말이다. 너무 에둘러 말해왔다. 그냥 묻자. “미술은 전시가 필요한가?” 사실 이 희한한 물음을 묻기 위하여 전시의 윤리성을 슬쩍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있고 없고를 떠나서는 우리는 한시도 살 수 없다.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들을 미술계는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술의 유령은 어디에서 살까? 선악의 피안에 있지 않을까? 윤리가 심화되어 극복된 세계에서 기거하고 있을 것이다. 굳이 거주하지도 않을 집을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부동산이기에! 수요와 공급 그리고 시장이라는 경제신학의 삼위일체에서 약간은 예외적인 상황도 벌어지는 별유천지가 펼쳐진다. 어쩌면 거기야말로 진정한 유령의 거주지일지도 모르겠다. 외전(外傳)의 매력은 유사하나 벗어난다는 것이다. 미술이 사는 곳을 누가 보았다 하는가? 현주소는 고사하고 옛 거주지에 대한 조사도 설왕설래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때그때 지어지고 지워지는 전시 속에 미술이 있다면 미술관은 있다가 없는 것이다. 그 왕복 운동은 피동적이다. 그렇다면 전시는 지시인가? 존재론과 경제신학을 초월하는 경지이다. 


미술은 활동으로 고정적일 수 없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이 전시이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어디인가? 미술을 향하는가, 미술관을 향하는가? 미술관의 동굴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미술의 그림자가 아닐까? 강력하게 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현실이다. 그 햇빛 속에서 고결한 취미의 눈동자는 눈물 흘린다. 슬프다기보다는 그 강력함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시를 쓰던 제작술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방식이다. 테크네로서 미술은 자신을 아주 잘 구현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이제 과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뚜렷한 상업적 업적을 거두고 있는 반면에 포이에시스는 자리를 잃었다. 미술에 대한 시각성과 낭만주의라는 캐릭터를 끄집어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럼에도 미술의 이데아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이라는 이데아의 분유(分有)로서 전시를 말한다면 미술의 관념론을 주창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전시를 백과사전처럼 모으면 미술을 알 수 있을까? 굳이 우리는 미술을 알아야 할까? 미술이 사는 곳으로서 미술계는 여전히 우리가 살만한 곳인가? 미술의 거주지가 애매모호하다. 미술이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의 행태를 보인다면 우리의 ‘복지미학’은 위태로워진다. 미술의 가출과 방황은 모험인가 탈선인가? 행복에 대한 갈망을 흡족하게 해 줄 수 없는 미학은 위험에 빠진다. 물론 현대미술은 민주정(Polity)의 미학임에 틀림없다. 군사적 해결과는 다른 정치적 해결을 수행하고 있다. 타협과 합의로서 미술의 모습이다. 미술은 활동인 것이다. 거주하는 집이 고정적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또, 권력으로서 미술은 모든 사회활동과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힘은 전시만으로 확인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래서 우리는 다시 미술의 미혹에로 돌아간다.



- 김병수(1963- ) 홍익대 미학과 석사. 월간미술대상(학술·평론) 수상.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출판위원장 역임. 현 경기대 미술디자인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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