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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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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 중국국가미술관 한중교류프로젝트2
괴(怪)의 미학(美學)과 동아시아서의 현대성(現代性)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秋史金正喜与清朝文人的对话 
A Dialogue between Kim Jeong-hui and Literati of the Qing Dynasty




전시기간   2019년 6월 18일(화) ~ 2019년 8월 23일(금) 
관람시간   오전 9시 ~ 오후 5시 (입장마감 : 오후 4시)   * 매주 월요일 휴관
장   소   중국국가미술관 (중국 베이징 소재)
주   최   예술의전당, 중국국가미술관
주   관   예술의전당, 과천시 추사박물관
후   원   한국문화체육관광부, 중국문화여유부, 주한중국대사관, 주중한국대사관
입 장 료   무료
문    의   예술의전당  02-580-1300

개   막  식 : 6.18(화) 11시
기자 간담회 : 6.18(화) 13시 30분
학 술 포 럼 : 6.19(수) 14시-17시 30분
전시 구성    ■ 유희삼매 遊戱三昧  ■ 해동통유 海東通儒  ■ 학예일치 學藝一致


옹방강이 보낸 제3편지



예술의전당(사장 유인택)중국국가미술관(관장 우웨이산 吳爲山)과 공동으로 오는 6월 18일(화)부터 8월 23일(금)까지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중국국가미술관에서 <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의 대화전>을 개최한다.

예술의전당과 중국국가미술관이 공동 주최하고 예술의전당과 과천시 추사박물관(과천시장 김종천)이 공동 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괴(怪)의 미학(美學)과 동아시아 서(書)의 현대성(現代性)’을 주제로 개최되며, <치바이스와의 대화전>(2018.12.05 ~ 2019.2.17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 이은 두 번째 한(韓)·중(中) 국가예술교류프로젝트다. 

이번 전시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 과천시추사박물관, 제주추사관, 영남대박물관, 김종영미술관, 수원광교박물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선문대박물관, 일암관, 청관재, 정벽후손가, 그리고 개인 등 총 30여 곳에서 출품된 현판, 대련, 두루마리, 서첩, 병풍 등이 총 망라되어 있다. 특히 유교로 관통하는 추사의 학예일치(학문과 예술이 하나)와 유희삼매(예술이 극진한 경지에 이름)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걸작과 자료 총 87건이 중국국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유 사장은 “이번 전시가 19세기 동아시아 세계인이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을 통해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예술의 미래까지 생각하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종천 과천시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우리만 아는 추사가 아닌, 세계인이 함께 감상하고 느끼는 추사 서화(書畫)의 새로운 장이 열리길 기대한다”고 뜻을 밝혔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 <판전(板殿)> 1856 종이에 탁본 22.8×85.0cm 개인 소장


18일 개막식에 이어 19일 중국국가미술관에서 전시 학술포럼도 진행되는데 유홍준(명지대학교 석좌교수, 전 문화재청장), 허홍범(과천시 추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최준호(광주대 교수) 등이 한국 측 발표자로 나서고 션펑(전 중국서법가협회 주석), 왕위에촨(베이징대학교 중문과 교수, 베이징대 서법예술견구소장), 예신(중국국가화원서법전각원 해외서법연구소 부소장) 등이 중국 측 발표자로 나서 추사의 서(書)를 매개로 한 한중간 진정한 의미의 예술교류의 장이 될 전망이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 <계산무진(谿山無盡)> 19세기 종이에 먹 165.5x62.5cm 간송미술관 소장


19세기 동아시아 서(書)의 패러다임 전환 속에서 바라본 ‘추사체’
“괴(怪)하지 않으면 역시 서(書)가 될 수도 없다.”

이번 전시는 19세기라는 동서(東西)역사와 동아시아라는 시공간의 지평에서 ‘서(書)’와 ‘추사서(秋史書)’를 함께 살펴보는 데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예술을 ‘기괴고졸(奇怪古拙)’한 조형미학을 특징으로 평가해왔다. 하지만 추사 개인적인 성취에 주로 머무르거나 신화화되어 왔고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진위논쟁에 빠져 정작 추사체(秋史體)의 미학(美學)을 객관성과 보편성, 독자적인 성취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였다. 청조(淸朝)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의 발흥으로 19세기 동아시아 서사(書史)는 첩학(帖學)에서 비학(碑學)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이러한 때 추사 김정희와 옹방강 · 완원의 한중간 대화(對話)의 가장 큰 성과는 학예일치(學藝一致)와 비첩혼융(碑帖混融)의 결정인 ‘추사체’를 창출한 데 있다. 추사체의 조형미학과 정신경계는 한마디로 기괴고졸(奇怪古拙)과 유희(遊戱)라 볼 수 있다. 추사 생존 당대에도 추사체의 괴미(怪美)에 대해서는 비난과 조롱이 비등하였다. 하지만 추사는 이에 대해 “괴(怪)하지 않으면 역시 서(書)가 될 수도 없다.”라고 응수했을 정도다. 이러한 추사의 학예성취에 대해서 《청조문화(淸朝文化) 동전연구(東傳硏究)》 저자인 후지스카 치카시(藤塚鄰, 1879~1948)는 “청조문화(淸朝文化)에 정통하고 새로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조선에 수립 선포한 위대한 공적을 이룬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고금독보(古今獨步)라는 느낌이다.”라고 말한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 <도덕신선(道德神僊)> 19세기 종이에 먹 32.2×117.4cm 개인 소장


고금독보(古今獨步)의 ‘반역적’ 성격과
‘큐비즘’ 성격으로서의 추사체

추사의 학예성취는 한국 동아시아는 물론 서구 현대미술과의 대화까지도 문을 열어놓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추사체(秋史體)의 괴미(怪美)와 유희(遊戱)정신은 19~20세기 서구미술의 ‘추(醜)’와 ‘추상(抽象)’과 같고도 다른 맥락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전 중국서법가협회 주석이자 현존 중국최고의 서법가로 추앙받는 션펑(沈鵬, 1931~현재)은 “변혁의 중심에 있었던 김정희의 서법(書法) 작품은 강렬한 반역적(反逆的) 성격, 특히 비(碑)로서 첩(帖)으로 들어가는 모종의 ‘불협조(不協調)’의 성격은 일반인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김정희의 서법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조선민족의 강렬한 독립과 자주(自主)와 자강(自强)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는다.”고 말했다.
   한국의 현대추상조각 선구자인 김종영(金鍾瑛, 1915~1982)은 “내가 완당[김정희의 호]을 세잔에 비교한 것은 그의 글씨를 대할 때마다 큐비즘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완당이 일반의 통념을 완전히 벗어나 작자(作字)와 획(劃)을 해체하여 극히 높은 경지에서 재구성하는 태도며 공간을 처리하는 예술적 구성이며 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지성을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 <명선(茗禅)> 19세기 종이에 먹 115.2x57.8cm 간송미술관 소장


‘학예일치’ ‘해동통유’ ‘유희삼매’
3가지 키워드로 조명하는 추사의 ‘괴(怪)’의 미학

이번 전시는 ‘괴(怪)의 미학을 키워드로 ‘추사체’의 성격 전모를 19세기의 한중은 물론 동아시아와 세계라는 공간에서 바라보며 ▲학예일치(學藝一致) ▲해동통유(海東通儒) ▲유희삼매(遊戱三昧) 등 총 3부로 구성하였다.

   <학예일치> 섹션에서는 옹방강·완원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입장의 경학(經學)과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을 역사와 서법을 하나로 고예(古隷)에서 완성해내는 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낸 제3편지>,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 <복초재시집(復初齋詩集)>, <소영은(小靈隱)>, <상량·상견(商量·想見)>, <문복도(捫腹圖)> 등 추사와 청조문인과의 교유관계 핵심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임군거효렴경명(臨君擧孝廉鏡銘)>, <예학명임(瘞鶴銘臨)>, <임곽유도비(臨郭有道碑)>, <배잠기공비제발(裵岑紀功碑 鉤勒本 題跋)>,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鏡)> 등 추사체(秋史體)의 궁극인 고예(古隷)와 고해(古楷) 재해석 작품과 <양한금석기>, <해동금석원>, <해동금석영기> 등 조(朝)청(淸)문인들의 금석학 연구 자료들을 통해서는 서(書)가 왜 학문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살펴본다.

   <해동통유> 섹션에서는 제주 유배라는 극한의 실존에서 유마거사를 자처하면서 유불선(儒佛仙)을 아우르는 통유로서 추사의 정신세계를 보는 것이 관건이다. <문자반야(文字般若)>, <칠불설게 도득문지(七佛說偈 都得聞之) 등 게송(偈頌) 모음, <직심도량(直心道場)>, <영모암편배제지발(永慕庵扁背題識跋)>, <명선(茗禪)>,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 그리고 <부기심란(不欺心蘭)>, <향조암란(香祖庵蘭)>, <추사 소치 합작 시화 ‘산수국’>은 통유(通儒)와 서화일체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걸작들이다.

   <유희삼매> 섹션에서는 비첩혼융(碑帖混融)의 ‘추사체’가 발산하는 불계공졸(不計工拙)과 천진(天眞)의 미학골수를 보는 것이 핵심이다. <계산무진(谿山無盡)>, <도덕신선(道德神僊)>, <순로향(蓴鱸鄕)>, <사서루(賜書樓)>, <판전(板殿)>,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 <무쌍·채필(無雙·彩筆)>, <인고·폐거(人苦·弊去)> 등은 추사체의 유희삼매 경지가 어떤지 두 눈으로 목도하게 한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 <임군거효렴경명(臨君擧孝廉鏡銘)> 19세기 종이에 먹 86.0x46.0cm 개인 소장


210년 만에 중국으로 가는 추사,
학문과 예술로 21세기 한중우의 100년의 초석을 다지는 전시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는 한중우의와 동아시아 예술 미래를 학예 역사의 재발견을 통해 구축하는 본격적인 시발점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한중은 늘 지리적, 역사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근현대 100년간 식민지 서구화과정에서 국가간 예술교류프로젝트로서 개최되는 본격적인 전시로는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서예 장르를 가지고, 그것도 한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임은 물론 19세기 당시 동아시아 세계 서예 역사에서 추사체로 가장 독자적인 성취를 이룬 인물로 평가 받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학예 세계 전모를 가지고 가는 데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추사와 20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청조(淸朝) 학예거장이자 추사의 중국 스승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 · 완원(阮元, 1764~1849)과의 대화를 통해 한중은 물론 동아시아 문명의 미래를 ‘필묵공동체’란 화두로 이야기하는 것은 추사 개인을 통해 정치를 뛰어넘는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마침 올해는 1809년에 추사가 연행(燕行)을 한 때로 따지면 210년이 되고, 6월 3일은 추사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여 이번 전시의 의미를 더한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 <향조암란(香祖庵蘭) 「난묵합벽첩(蘭墨合壁帖)」>
19세기 종이에 먹 26.7×16.8cm 개인 소장


[제1부] 학예일치(學藝一致)

여기서는 추사가 북학(北學)의 핵심인 청대(淸代)의 경학(經學)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을 조선에 도입하여 역사(歷史)와 서법(書法) 두 방면으로 어떻게 연구하고 실천해서 학예일치(學藝一致)의 경지로 완성해내는지를 대표작품과 자료로 보여준다. 
추사는 24세 연행(燕行)때  청조 학예계 거장인 78세 옹방강과 47세 완원으로 부터 ‘경술문장(經術文章) 해동제일(海東第一)’로 격찬을 받으며 두 분을 평생 스승으로 모신다. 그 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모토로 편지지도와 문집(文集)· 금석문(金石文)학습을 통해 경학(經學)과 금석고증학(金石考證學), 서법(書法)을 연마하여 학예일치(學藝一致)의 경지를 일생에 걸쳐 구축하였다. 
추사의 경학은 “마융(馬融)과 정현(鄭玄, 한 대의 훈고학)을 두루 망라하고, 정자(程子) 주자(朱子, 송대 성리학)를 등지지 말라[博綜馬鄭, 勿畔程朱]”가 말해주듯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의 입장에 서있다. 
금석고증학자로서 추사는 청조 학예방법론을 우리역사현장에 적용시켜 일생동안 조선화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31세(1816)에 <북한산진흥왕순수비>조사를 시작으로 <경주무장비(慶州藏寺碑)>발굴은 물론「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과『해동비고(海東碑攷)』저술하였고, 67세(1852) 북청(北靑) 유배(流配)시에는「석노시(石砮詩)」「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을 제작하였다. 
또 이런 성과는 중국에서 유희해의 <해동금석존고>과 <해동금석원>, 옹수곤의 <해동금석영기>와 같은 조선 금석고증학 열풍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추사는 왕법(王法)에 정통성을 둔 기존 서사(書史)를 뒤집은 완원의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지남으로 왕법(王法)은 물론 그 이전으로 돌아가 서(書)의 근원인 북비와 한예를 하나로 녹여내면서 독자적인 비첩혼융의 추사체(秋史體)를 창출해내고 있다. 
얼마나 한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한예(漢隸) 한 글자는 해서와 행서 열 글자와 맞먹는다.漢隸一字, 可抵楷行十字.”고 할 정도다. 특히 “예서(隷書)는 바로 서법의 조가(祖家)이고, 한예(漢隷)의 묘는 오로지 졸(拙)한 곳에 있음[隷書是書法祖家。漢隷之妙。專在拙處]”을 간파하고, 한예 중에서도 서한(西漢)시대 정(鼎) 감(鑑) 로(爐) 등(鐙)의 글자로 거슬러 올라가 추사체(秋史體)를 창출해내고 있다. 
요컨대 이러한 추사와 옹방강 완원의 일생에 걸친 학연과 묵연의 성과로 인해 한중교유 역사상 1구세기는 가장 찬란한 황금기로 자리매김 되었다. 

주요작품은 <심중니·이명도(尋仲尼·以明道)> <추사·담계필담서(秋史·覃溪筆談書)>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낸 제3편지> <박종마정 물반정주(博綜馬鄭 勿畔程朱)> <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 <복초재시집(復初斋詩集)> <소영은(小靈隱)> <죽재·화서(竹斋·花屿)> <상량·상견(商量·想見)> <완원‘남북서파론’(阮元‘南北書派論)> <임군거효렴경명(臨君擧孝廉鏡銘)> <임원수원년경명(臨元壽元年鏡銘)> <임곽유도비(臨郭有道碑)> <예학명임(瘞鶴銘臨)>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鏡)> <배잠기공비제발(裵岑紀功碑 鉤勒本 題跋)> <유득공시의도(柳得恭詩意圖)> <벽랑간관(碧琅玕館)> <문복도> <송자하선생입연시(送紫霞先生入燕詩)> 등이다. 



[제2부] 해동통유(海東通儒)

정통 유학자(儒學者)인 추사는 유교(儒敎)는 물론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아우르는 통유(通儒)로서 학문과 사상을 서(書)예술 하나에 모두 녹여내고 있다. 특히 제주유배시기의 처절한 실존을 소동파(蘇東坡)를 사숙하여 학예(學藝)로 극복해내면서 해동통유(海東通儒)의 면모를 완성해내고 있다. 
추사는 55세(1840.6.22)때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임명(任命)되었으나 윤상도옥사(尹尙度獄事)가 재론(再論)되면서 이미 망자가 된 부친 김노경이 탄핵(彈劾)되고, 자신은 제주도(濟州道)에 유배(流配)되었다. 
제주유배시절 추사는 소동파가 그랬듯이 유마거사(維摩居士) 병거사를 자처하면서 자제소조(自題小照)에 “담계(覃溪)는‘고경(古經)을 즐긴다’라 일렀고, 운대(雲臺)는 ‘남이 일렀다 해서 저 역시 이르지를 않는다’라 하였으니, 두 분의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한 것이다. 어찌하여 해천(海天)의 입립자가 원우(元祐)의 죄인과 같은 고. 覃溪云嗜古經。芸臺云不肯人云亦云。兩公之言。盡吾平生。胡爲乎海天一笠。忽似元祐罪人”라고 할 정도다. 또 ‘문자반야(文字般若)’를 비첩혼융(碑帖混融)으로 실천해내면서 추사체(秋史體)를 왕성하게 실험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초의선사(艸衣禪師)와 유(儒)불(佛)을 넘나드는 교유를 통해 다선일미(茶禪一味)와 전다삼매(煎茶三昧)의 경지를 구축하였다. 

주요전시작품은 <문자반야(文字般若)> <무량수각(无量壽閣)> <‘칠불설게 도덕문지(七佛說偈 都得聞之)’등 게송(偈頌) 모음> <직심도량(直心道場)> <제해붕대사영(題海鵬大師影)> <관음경·팔중송(觀音經·八重頌)> <영모암편배제지발(永慕庵扁背題識跋)> <명선(茗禪)> <단연죽로시옥(端硏竹爐詩屋)> <일로향각(一爐香閣)> <전다삼매(煎茶三昧)> <합병신천지(合丙辛天地) 우향각(芋香閣)> <부기심란(不欺心蘭)> <향조암란(香祖庵蘭)> <추사 소치 합작 시화‘산수국’> 등이다. 


[제3부] 유희삼매(遊戱三昧)

추사는 해배 이후 강상생활 · 북청유배 · 과천시기에 비첩혼융의 굴신지의屈伸之義의 필획(筆劃)이 창출해내는‘괴(怪)’의 미학을 골자로 하는 추사체(秋史體)를 자유자재로 구사해내고 있다. 심지어 “글씨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공졸(工拙)을 또 따지지 마라[非以書爲也. 工拙又不計也.]”라고 하고 있다. 추사체의 비난과 조롱에 대해서마저도 “괴(怪)하지 않으면 역시 서(書)가 될 수도 없다.[不怪。亦無以爲書耳]”고 응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추사체(秋史體)의‘괴(怪)’의 미학경계는 방정(方正)의 끝이자 기괴(奇怪)의 궁극지점이다. “구서(歐書)도 역시 괴목(怪目)을 면치 못했으니 구와 더불어 함께 돌아간다면 다시 사람의 말을 두려워할 게 있으리까. 절차고(折釵股)ㆍ탁벽흔(坼壁痕) 같은 것은 다 괴의 지극이며 안서(顔書) 역시 괴이하니 왜 옛날의 괴는 이와 같이 많기도 한지요. 歐書亦未免怪目。與歐同歸。復何恤於人耶。如折釵股圻壁痕。皆怪之至。顔書亦怪。何古之怪。如是多乎哉。라고 추사는 말한다. 추사체(秋史體)는 왕법(王法) 중심의 첩학(帖學)과 그 이전의 비학(碑學)이 시기별 혼융(混融)궤적을 그리며 다음과 같이 완성․창출되고 있다. 

Ⅰ. 시체습용기(時體習用期) [24세 연행(燕行) 전후] 
Ⅱ. 옹방강/팔분예(八分隸)학습기(學習期) [3,40대]
Ⅲ. 구양순(歐陽詢)/고예(古隸)재해석기(再解析期) [50세 전후]
Ⅳ. 비첩혼융기(碑帖混融期) [55~63세 제주 유배(流配)]
Ⅴ. 추사체(秋史體)완성기(完成期) [63~71세 해배(解配)이후]

주요전시 작품은 <계산무진(谿山無盡)> <도덕신선(道德神僊)> <순로향(蓴鱸鄕)> <사서루(賜書樓)> <판전(板殿)>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 <칠언시사구 행서팔곡병(七言詩四句 行書八曲屛)> <청관산옥만음(靑冠山屋漫吟)> <무쌍·채필(無雙·彩筆)> <인고·폐거(人苦·弊去)> <왕사정 제중삼영(王士禎 齋中三詠)>  등이다.
위의 작품을 보노라면 그야말로 천진(天眞)이자 유희삼매(遊戱三昧)의 정신경계에 노니는 것이 추사체(秋史體)이다. 일체의 구속(拘束)에서 벗어난 대자유(大自由) 절대자유(絶對自由)의 경지인 것이다. 예술의 기원이 인간의 유희본능(遊戱本能)이라고 할 때 예술의 본령인 시서화(詩書畵)를 일체(一體)로 융복합(融複合)으로 하나 되게 ‘유희삼매(遊戱三昧)’로 살아간 추사는 문자영상(文字映像)시대 인공지능(人工知能,AI)시대 오늘날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추사 김정희 초상화

추사 김정희 학예연보

1705 팔대산인 주탑 졸 
1716 <강희자전(康熙字典)>완성 
1720 조선 숙종(肅宗) 붕어(崩御), 경종(景宗)즉위  
1725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완성 
1735 청 건륭제 즉위  
1764 양주팔괴 정섭, 금농 졸 
1765 홍대용<을병연행록>저술, 엄성 반정균 교유  
1776 [정조1]규장각(奎章閣)설치  
1777 고증학자(考證學者) 대진 졸 
1778~1779 박제가 이덕무 연행 / 박지원<열하일기> 저술 
1782 <사고전서(四庫全書)>완성 
1790 [건륭55]박제가 유덕공 2차 연행, 박제가 3차연행, 이즈음 이조원 반정균 서문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박제가 <<정유고략(貞蕤藁略)>>, 유득공<<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중국출간. 


Ⅰ기(期) : 시체학습기 時體學習期

1786/1 충청도(忠淸道) 예산(禮山)에서 경주김씨(慶州金氏) 장손(長孫)으로 출생(出生,6.3), 부父 김노경金魯敬, 모母 기계유씨杞溪俞氏. 증조부(曾祖父)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증조모(曾祖母) 영조(英祖)의 장녀(長女) 화순옹주(和順翁主).
1791,1792/6,7 추사 <입춘첩(立春帖)>을 보고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내가 장차 가르쳐서 성공시키겠다(吾將敎而成之)’고 하였고, 채제공蔡濟恭)은 대서예가를 예언함, 
1800/15 정조(正祖)승하, 정순(貞純)왕후(王后) 경주(慶州) 김씨(金氏)  수렴청정(垂簾聽政), 박제가朴齊家에게 사사 받기 시작함.
1801/16 박제가, 4차 연행(燕行)중 옹방강과 석묵서루에서 만남.  조선 천주교탄압[신유박해(辛酉迫害)] 
1805 <사고전서(四庫全書)>책임편집자 기윤 졸 

Ⅱ기(期) : 연행(燕行) ~30대(代) 중반(中盤)

1809,1810/24,25 생원시(生員試) 초시입격(初試入格), 연행(燕行), 김노경(金魯敬)의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수행(10.28) / 석묵서루에서 옹방강(翁方綱)과 사제의(師弟儀)를 맺고, 옹방강이 쓴  「유당(酉堂)」 「보담재(寶覃齋)」 편액(扁額)을 선물 받음(12.29) / 태화쌍비지관(泰華雙碑之館)에서 완원(阮元)과 사제의(師弟儀)를 맺고, 완원의 저서  『경적찬고(經籍纂詁)』 106권 78책, 『연경실집(揅經室集)』, 『13경주소교감기(十三經註疏校勘記)』 245권,  태화2비 탑본(搨本)을 기증받음 /  완원, 주학년(朱鶴年), 홍점전(洪占銓), 이정원(李鼎元), 담광상(譚光祥), 김용(金勇), 옹수곤(翁樹崐), 유화동(劉華東), 이임송(李林松) 등이 모여 김정희의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줌. 이임송(李林松)이 전별시(餞別詩)를 쓰고, 주학년(朱鶴年)이 ‘추사전별도(秋史餞別圖)’를 그린 「증추사동귀시첩(贈秋史東歸詩帖)」을 김정희에게 증정함.(2. 1)
1812/27 신위(申緯)의 주청왕세자책봉사(奏請王世子冊封使) 연행(燕行)때 「송자하입연시(送紫霞入燕詩)」 10수(首)를 써 보냄(7.18) / 홍경래난 평정됨.    
1814/29 「계당서첩(溪堂書帖)」 씀. 
1814 <성경(聖經)>중국어 완역본 출간  
1815 <설문해자주(說文解字註)>저자 단옥재 졸 
1815년/30 옹방강 「제1봉편지(第一封手札)」(1.20) 로 추사의 경학(經學)질의에 상답(詳答)하고 연경(硏經) 지도(指導)함. 
1816/31 옹방강이 「별봉(別封) 편지」와 『복초재시집(復初齋詩集)』 등을 보내옴(10.27). 옹방강「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지음.
1817/32  경주(慶州) 「무장사아미타조상기비(鍪藏寺阿彌陀造像記碑)」 단편(斷片)을 찾아냄.(4.29.) 조인영(趙寅永, 1782~1850)과 진흥왕(眞興王)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다시 찾아 68자(字)를 심정(審定)함.(6. 8)
옹방강 제3봉 편지로 학경(學經)을 지도하고 제경(諸經)의 부기(附記)를 보내줄 것을 약속함.(10.27)
1818/33 옹방강 졸(1.26/86세).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씀 
정약용<목민심서(牧民心書)> 완성   
1819/34 식년문과급제(式年文科及第)   
1820년/35 예문관검열(禮文館檢閱) 및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 『동몽선습(童蒙先習)』 씀.
1822/37 김노경 동지정사 연행, <직성유궐하 수구만천동> 해서대련작품을 고순에게 써 보냄.
1823/38 규장각(奎章閣) 대교(待敎).

Ⅲ기(期) : 30대(代) 중반(中盤) ~ 40대 중후반(中後盤)

1824 /39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 「호고·연경(好古·硏經)」 예서대련(隷書對聯)을 등전밀(鄧傳密)에게 써 보냄. 경주(慶州) 창림사탑(昌林寺塔) 출토(出土)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고증(考證)함.
1826/41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暗行御史), <박종마정 물반정주>를 이장욱에게 써 보냄. 
1827/42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동부승지(同副承旨) 
1829/44 순조의 명으로 『문사저영(文史咀英)』 표제標題 및 서문序文을 씀.
1830/45 <윤상도옥사>(8.28), 김노경 고금도 위리안치
1831/46 유희해가 보낸 『황청경해(黃淸經解)』 1,408권을 이상적으로부터 받음.(1.22)   

Ⅳ기(期) : 40대(代) 중후반(中後盤) ~ 63세(歲) 제주유배(濟州流配)

1832/47 「조광진(曺匡振)에게 보내는 편지」  <난맹첩> 
1834/49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저술. <임한경명>  
1835,1836/50,51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명선> <완호탑비> 등
1838/53 권돈인(權敦仁)이 왕희손(汪喜孫)에게 보낸 장찰(長札)이 「해외묵연(海外墨緣)」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짐. 김정희의 대작(代作)인 이 글은 그의 학예관을 피력한 것으로 청나라 학예계에 충격파를 일으킴.
1839/54 형조참판(刑曹參判). <묵소거사자찬> 「옥산서원(玉山書院)」 
1840/55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임명(任命),(6.22), 윤상도옥사(尹尙度獄事)재론(再論), 김노경탄핵(彈劾)(7.10), 제주(濟州) 유배(流配)(9.4). 제1차 아편전쟁(阿片戰爭)  
1842년/57 부인 예안이씨(禮安李氏) 졸(卒)(11.13) <영모암편배제지발> 등  
1843/58 이상적(李尙迪)으로부터 계복(桂馥)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庫)』를 받음. 백파(白坡) 율사(律師)와 왕복서한(往復書翰)으로 토론을 벌임. 허련(許鍊)이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을 그림.
1844/59 이상적(李尙迪)으로부터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받음. 이상적에게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줌. 
1845/60 청(淸) 거유(巨儒) 이조망(李祖望), 김정희의 학예관을 접하고 이에 대한 소견을 상답(詳答)함. 「왕맹자선생해외묵연책자답문16칙(汪孟子先生海外墨緣冊子答問16則)」을 저술함. 영국(英國) 군함(軍艦) 사마랑(Samarang)호가 측량차 정의현(㫌義縣) 우도(牛島)에 정박(碇泊)사실을 김명희(金命喜) 권돈인(權敦仁)에게 편지로 알림.(5.22)  위원 『해국도지(海國圖志)』를 구해 읽음.
1846년/61 예산(禮山) 화암사(華巖寺)에 「무량수각(无量壽閣)」 「시경루(詩境樓)」 「시경(詩境)」 글씨를 써 보내고,「화암사상량문(華巖寺上樑文)」을 지음. 
1848년/63 헌종(憲宗), 추사를 석방(釋放)하라 명함(12. 6.)


Ⅴ기(期) : 63세(歲) 해배(解配) ~ 71세(歲) 까지

1849/64 제주 해배(解配, 2.7). 서울 강상(江上, 龍山) 정착.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 저술. <은해사銀海寺)」 「대웅전(大雄殿)」 「불광(佛光)」 「보화루(寶華樓)」 등. 10.13 완원 졸 
1850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亂)> 발생(~1864)   
1851/66 진종조례론(眞宗祧禮論)의 배후 발설자로 지목되어 함경도(咸境道) 북청(北靑)에 유배(流配)됨.(7.22) 
1852/67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경境)」 <석노시>제작. 북청 해배, 과천(果川) 과지초당(瓜地艸堂) 정착(10.9) 
1853/68 <임곽유도비> <숭정금실> 등 
1854/69 <신안구가> <완염합벽첩> <춘풍추수> 등
1855/70 「백파율사비문(白坡律士碑文)」 「효자김복규정려비(孝子金福奎旌閭碑)」「성담상게(聖譚像偈)」 <불이선란도> <하정진비> 등   
1856/71 상유현(尙有鉉)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를 씀. 「해붕대사 화상찬(海鵬大師畫像贊)」 「대팽·고회(大烹·高會)」 <비취병 산호> 「판전(板殿)」 등. 과천(果川)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서거(逝去)(10.10)  
1856 청, 제2차 아편전쟁(阿片戰爭)  
1860 조선, 최제우 <동학(東學)>창시 
1862 청, 양무운동(洋務運動) 

1866/1871/1876 조선,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1894 청일전쟁(淸日戰爭).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갑오경장(甲午更張)
1897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립
1898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 
1912 중화민국(中華民國) 건국
1910 한일강제병합(韓日强制倂合)  
1912 중화민국(中華民國) 건국
1919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5.4운동
1948 대한민국정부수립 
1949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건국 
1950 6.25한국전쟁 
1992 한중수교(韓中修交)
2019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전시 개최

정조경程祖庆((1785~1855) <문복도扪腹图> 1853 비단에 수묵 94.5×26.2cm 개인 소장



학술포럼

시간 : 2019년 6월 19일(수) 14:00-17:30
장소 : 중국국가미술관 7층 세미나실

학술주최
중국국가미술관부관장 장칭
中国美术馆副馆长张晴
한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이동국
韩国艺术殿堂书法博物馆首席学艺士李东拲

한국 발표자
유홍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전 문화재청장
俞弘濬 明知大学客座教授、前韩国文化财厅厅长
허홍범 과천시 추사박물관 학예연구사
许洪范 果川市秋史博物馆学艺硏究士
최준호 광주대 교수
崔峻豪 光州大学教授 

중국 발표자
션  펑 전 중국서법가협회 주석(제자가 대독)
沈  鹏 前中国书法家协会主席(由弟子宣读论文精要)
왕위에촨 베이징대학 중문과 교수, 베이징대학 서법예술연구소장
王岳川 北京大学中文系教授、北京大学书法艺术研究所所长
예  신 중국국가화원서법전각원 해외서법연구소 부소장
叶  欣 中国国家画院书法篆刻院海外书法研究所副所长
푸치앙 중국국가미술관 소장작품부 서예가
傅  强 中国美术馆藏品征集部书法家  
우구오바오 중국국가미술관 소장작품부 서예가
吴国宝 中国美术馆藏品征集部书法家  
자오얀구오 장쑤성서예가협회부비서장
赵彦国 江苏省书法家协会副秘书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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