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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 : 어느 대필 작가의 고백전

  • 전시기간

    2020-07-01 ~ 2020-07-31

  • 참여작가

    김윤경

  • 전시 장소

    갤러리오모크

  • 문의처

    010-3688-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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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기억, 누군가의 최초의 흑백 사진, Memories of Colors, The First Negative 



<작가노트>


어느 대필 작가의 고백(A Ghost Writer’s Confession)


인터넷을 비롯한 수많은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의 홍수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순수 회화’란 용어는 어쩐지 빈 껍데기만 남은 말 같다. 제목만 바뀐 것일 뿐 내용이며 심지어 등장 인물의 이름도 비슷한 드라마나 영화가 놀랍지 않은 것은 이러한 현상이 순수 문학에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기형도를 연상케 하는 시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매력은 마치 나와 비슷해서 좋아하게 되는 친구나 어릴 적 즐겨 듣던 오래 전 유행가를 조금 다른 음색으로 다시 듣는 것과 비슷한 정감을 이끌어 내는 데에 있다. 

원래 오색 찬란하게 채색되어 있었다고 하는 최초의 조각들은 똑같은 모습으로 찍어 낸 모조 석고상을 원하는 만큼 구입할 수 있는 공산품의 시대를 사는 나에게 색에 대한 강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어쩐지 푸른 빛까지 도는 것 같은 새하얀 석고상을 들여다 보며, 누구나 올릴 수 있는 그들의 사진들을 인터넷에서 훔쳐 보며 가 본 적 없는 이탈리아의 조각들을 상상해 본다. 본 적이 없어서 더 강하게 믿게 되는 그들을 오래 들여다 보며 그림을 그려 보겠다고 생각하니 뜬금없이 대필 작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랜 시간을 견디느라 빛 바랜 유물들, 시간 탓인지 마치 주변의 색들을 흡수하고 있는 것 같은 특정 사물들의 색을 그리는 것이 한 동안 내 작업의 화두였다. 최초의 비너스에 대한 동경은 나로 하여금 ‘유화’라는 견고한 매체를 사용하여 다양한 흰색과 미색의 단면들을 만들어 보게 했다. 그 시간의 환기, 자연 혹은 인공의 빛의 표현과 장식적 효과를 위해 신문, 잡지 등의 프린트, 오래된 명화의 복사본 조각, 마스킹 테이프, 홀로그램, 천 등의 다양한 재료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어쩔 수도 없이 대필 작가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은 나의 비너스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또 다른 비너스들로 증식되었다. 수도 없이 복제되고 반복되는 이미지들은 다른 이의 얼굴을 보고 있는 내 얼굴을 만져 보게 한다. 이전의 왕의 조각상 허리춤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곤 했다는 후대의 왕들처럼 나는 결국 캔버스 위에 수많은 자화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술의 역사도 그렇게 진행된 것이 아닐까? 옛 대가들은 많은 이들을 한낱 대필 작가로 만들어 버리지만 나는 그러한 역사 속 퇴화 혹은 진화의 흔적들 중 마음을 잡아 끄는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빌려 썼다. ‘튜브 물감’이라는 신세계를 발견하고 캔버스 위에 흐르는 시간을 담아 냈던 인상주의 화가들, ‘사진술’의 발명을 무기로 유화로 된 귀족의 초상화의 권위에 도전했던, 어쩌면 그 이상의 성공을 거둔 최초의 사진가들, 종이나 오브제를 가득 붙였던 입체파 화가들, 충동에 질서를 부여한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이미지나 방법들을 차용하며 캔버스 위를 온통 하얗게 밀어 순수한 회화, 가장 회화다운 회화에 이르고자 했던 절대주의자나 미니멀리스트 화가들의 시도에 대한 역행을 통해 나도 ‘나’라는 순수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들의 재구성, 재조합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나만의 주관적인 패턴이나 습관을 통해 내가 정말 그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유추해 내고 싶었다.

나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등장하던 여러 오브제들을 변형, 재구성하여 회화, 설치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고 화재로 인해 원본이 소실되고 흑백의 사진만 남아 있어 원래의 색채를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카라바조(Caravaggio)의 작품을 모사하여 나의 색채를 가미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렇게 패러디한 옛 대가의 작품을 ‘사진’이라는 매체로 재패러디하고 변형하며 원본과 복제의 관계에 대해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천, 마스킹 테이프, 프린트, 미러지 등의 사용을 통해 물감과의 이질감 혹은 조화를 이끌어 내는 우연적 효과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투명 미디움을 겹쳐 사용함으로써 시간의 추이에 따른 그림의 변화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회화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의지인지 본능인지도 모르면서 칠하는 물감 자국들이, 캔버스 위의 반복적인 색의 병치가 ‘나’라는 본질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왜 이것만이 구원이어야 했을까? 대가들이 공유했던 기질, 내 안에 없는 것만 같은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무수히 많은 수의 패러디를 반복하고 나면 정말 내 것이라 부를 만한 흔적이 아주 조금이라도 생기게 될까? 대가들을 패러디한 작품 위에 이러한 프로세스를 반복하여 또 하나의 원본을 만들어 내는 작업은 결국 어디에나 있는 원본, 하잘것없는 것들이 갖는 의미에 대한 강한 그리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두 개의 원본은 내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 아버지와 다른 나를 알아내는 것, 어쩌면 내 안에 무수히 담겨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나를 찾는 일에 관한 것이다. 원래의 모습에 대해 더욱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대가들의 작품을 찍은 사진들, 최초의 사진가들이 그림의 형식을 따라 하며 찍었던 초상화 사진들, 인터넷 뉴스가 내보내는 가짜 같은 서늘하면서도 뭉클한 이미지를 패러디하며 마음을 잡아 끄는 색채를 얹고 단 하나의 원작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 회화의 순수의 영역 주위를 배회하는 일이 너무 허무하지는 않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십 년 동안 그 앞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두 손 모아 기도했다던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팀의 어르신들의 그 귀한 성모상이 수명을 다했다고 생각되는 순간 너무도 당연한 듯 망치질을 당한 것처럼 내가 찾는 본질이나 아우라는 어디에도 없을 수도 있다. 이탈리아에 가서 처음 보게 되는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의 조각은 너무 오래 환상을 키워 온 나머지 조금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가족과 떨어져 시리아를 떠나는 버스 창가에 기대 출발을 기다리는 쓸쓸한 소녀의 모습이 차라리 거짓말이라면 더 낫지 않을까? 그림 속에서라도 알록달록한 사탕처럼 달콤한 색채로 명랑해 보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현대의 모든 이미지의 독창성은 ‘저작권’이라는 이름 하에 그 가치가 측정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패러디 작품들간의 미세한 차이 속에서, 그 작은 변형 속에서 ‘나’라는 본질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믿고 싶다.


김윤경 작가 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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