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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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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필전

  • 전시분류

    개인

  • 전시기간

    2009-10-22 ~ 2009-11-22

  • 참여작가

    채성필

  • 전시 장소

    갤러리세줄

  • 문의처

    02-391-9171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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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시 명 :『 채성필 ‘흙 그림전’ 』

■ 전시장소 : 갤러리 세줄 

■ 전시기간 : 2009년 10월 22일(목) - 11월 22일(일) 

■ 오 프 닝 : 2009년 10월 22일(목) 오후 6시

■ 관람시간 : 월 – 토 / 9:00 ~ 7:00, 일, 공휴일 / 10:30 ~ 7:00


■ 전시내용 : 


미술평론가 / 이용우

재료나 소재, 형식 중심의 예술이 쇠퇴하고 개념의 모호성이 미학적 중심에 등장 하면서부터 현대미술의 문맥은 급격한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오늘날 현대미술이 더 이상 형식논리나 의미론을 파악하기보다는 대중성과 일회성, 재미, 그리고 유희적 문맥으로 몰두하게 되는 현상을 불러왔다. 이는 특히 시장중심의 전시문화나 정치적 다원주의를 선호하는 글로벌리스트들에게 걸맞는 기호학적 이미지를 생산하는데 기여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미술이 무엇이고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존재 하는가 등의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던 과거의 텍스트 중심적 사고로부터의 전복을 의미한다. 또한 예술의 대중적 소통성이나 사회학적 관계론으로부터도 동떨어진 매우 이질적인 관계항 들이다. 이를 일컬어 미학적 혼성이나 중성성, 또는 다차원적 의미론 등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이는 비평적 관점이라기보다는 파편화되고 산란한 내용들을 열거한 수사학인 경우도 많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심에 대한 영원한 부정으로서의 소군도적인 대중미학, 다시 말해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의 실천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작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그 작은 것들을 집합시키는 힘은 아무래도 자유로운 개성들에서 유래되어야 하며, 그 접속지점은 대중적 호소력을 동원하는 이미지나 슬로건이 아니라 시각적 기호로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작가 채성필은 예술의 체질과 전형성을 믿는 작가에 속한다. 그리고 그 체질과 전형성은 후천적인 습득과정과 맞물린 기술이나 경험, 이론들이 어울림으로써 보다 질 높은 형식과 미적 체험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표현하는 '흙으로서의 회화', 또는 흙으로 만들어가는 조형미에서 매우 자율적으로 드러나며, 그 생각들은 체질적으로 견고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과거 모더니스트들이 즐겨 경험한 내적 체험이나 정신성, 그리고 예술을 성사시키는 테크닉이 혼합하여 일체감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매우 소재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최성필은 흙의 작가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그는 고운 흙을 걸러내어 물감으로 만들고, 은분으로 밑 작업을 하거나 우리에게 아직도 익숙한 이른바 마티에르라고 부르는 평면 만들기를 엄격하게 실시한다. 보통 7회 정도에 걸친 화면작업이 이루어진 끝에 그가 만들어내는 회화는 매우 독특한 산이나 구릉지대, 그리고 거의 단색조에 가까운 민둥산들이다. 그리고 이 산들은 멋이 있거나 풍광이 아름답기보다는 관념적 산수화임에도 불구하고 진경처럼 작가의 터치가 들여다보이는 절묘한 시적 땅의 세계를 연출한다.


유화나 아크릴의 주요 소재가 흙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채성필이 만드는 그림은 유화도, 아크릴 회화도 아닌 흙의 회화다. 흙 속에는 다양한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동양의 5원소를 비롯하여 서양에서는 그냥 지나침으로써 보이지 않는 정신의 색깔까지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최성필은 흙을 단순히 재료나 색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원소개념으로 보기도 하고, 주제나 소재, 그리고 마티에르가 하나에서 만나게 하는 중재자로서의 흙을 제조하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흙은 질료가 아니라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보이지 않는 생명체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채성필의 회화에는 흙과 바위로 둘러싸인 산이 보인다. 그리고 흙으로 그린 흙도 보인다. 그림그리기 작업은 흘리기 기법이 주로 동원되며, 캔버스에 물이 흘러가면서 만들어내는 자국들이 표현을 형성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흘리기 기법과 같은 기능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경치는 작가의 인위적 터치라기보다는 재료가 만들어낸 대리회화와 같은 느낌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매우 계산된 치밀한 경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재료들이 상호 연관되어 빚어내는 조화와 작가 스스로가 이따금 개입하여 조정하는 굵은 선들이 어울리는 독자적인 작품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업들은 오늘날처럼 산업사회의 유희적 소재들이나 재미를 동반한 문맥들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 그러므로 회화라는 전통적 매체는 다른 매체와는 달리 견고한 노력과 의지를 통하여 숙성시키는 가장 정교하고 어려운 매체였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예술의 진지한 과정을 열거하는 최성필의 정교한 '보도'(report)를 소중하다고 본다. 


채성필의 회화는 새로운 것, 과거의 것을 무너뜨림으로써 시간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변증법적 미학용어로부터는 괴리되어 있다. 그는 오히려 그리는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논증함으로써 왜 그려야 하는가를 토론하며, 그리는 행위를 통하여 구현할 수 있었던 논리와 체험의 질들을 관객에게 들려주려 한다. 이것은 훈육적이라기 보다는 서술적 체험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는다. 


미술관이 전시공간으로서의 벽면을 포기하거나 현대미술이 재료나 형식을 포기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박제화 된 갇힌 벽면을 포기하고 도심으로, 자연으로, 시장이나 군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행위들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패턴화 된 형식을 포기하는 일, 과거의 재료들을 묻어버리고 새로운 매체의 확장을 이루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말하는 미학적 문법이나 담론은 집착이란 용어를 거부하는 대신 시각혁명이 가능한 모든 가정들을 입증하는데 동원된다.


그렇다고 이러한 변화나 변증법적 실천들이 늘 새로운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첨단의 매체예술의 뿌리도 회화의 그리는 행위에서 시작된 것이며, 카메라의 앵글 또한 회화의 프레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방가르드란 새로운 것, 실험적인 것을 뜻 한다기보다는 새롭게 생각하는 전방위적 사고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채성필의 그리기는 이러한 사고의 훈련에 익숙한 작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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