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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그 임멘도르프: 1972년~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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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보편적인 것 이다. 이런 말은 식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은 물질 이상의 어떤 것으로써, 그것은 우리 정신에 관한 것 이다.”
임멘도르프, 2003


안젤름 키퍼나 게오르그 바젤리츠와 같은 신독일 표현주의의 주요 인물로써,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작품들은 1970년대 처음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60년대 요셉 보이스 아래에서 공부한 임멘도르프는 자신의 회화 작품을 통해 그것의 순수성 보다는, 회화가 지닌 개념성과 사회적인 가능성에 더욱 집중을 한다. 그의 작품들은 전후 독일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정체성의 위기, 미술에 있어서 현대성(Modernity)의 문제, 그리고 예술가가 지닌 정치적 사회적 역할에 대한 신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임멘도르프 작품의 특징은 사실에 기반한 상징주의로써, 이것은 신화 만들기(Myth-making)라고도 말해질 수 있다. 임멘도르프 특유의 매우 복합적인 상징체계 속에서, 그의 작품들은 실제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써 읽혀질 수 있다. 독일의 상징인 독수리와 십자가, 구소련을 상징하는 낫과 노동 계급을 상징하는 주먹과 같은 정치적인 도상들, 창조를 상징하는 계란과 연금술을 상징하는 황금색, 변신을 상징하는 원숭이와 같은 예술적인 도상들 임멘도르프의 작품에서 다양한 실존 인물-정치인, 예술가, 소설가-들 이미지와 뒤얽히며, 정치, 사회, 예술에 대한 다양한 언급을 한다. 이와 같은 상징주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닌, 역사와 현실의 ‘재구성’으로, 임멘도르프의 작품에 있어 핵심은 바로 우리 시대의 정치와 예술에 대한 임멘도르프 자신의 ‘도덕적 재구성’ 이다.

임멘도르프 작품 스타일은 회화적 표현주의와 정치적인 카툰(cartoon)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다. 임멘도르프는 자신의 캔버스 위에 존재하는 각각의 이미지들을 극단적으로 그래픽화 시키면서 자신의 회화를 20세기의 시대정신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며, 현대의 전반적인 시대정신에 대한 작가 개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커멘트가 가미되어 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임멘도르프는 “오늘날의 사람들은…80년 우리가 곧잘 가졌던 질문들-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매일매일 수행하고 있는 일들의 목적은 무엇인가?-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창조해내는 것 이상의 그 무엇 이다. 그것은 한 개인이 사회와 역사에 충격을 주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써, 사회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세계와 대항하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형성해 가는 것. 임멘도르프에게는 여기 바로 삶의 의미가 있으며, 예술가의 존재 의미와 역할이 놓여 있다.

이번 아라리오의 전시 “요르그 임멘도르프(Jörg Immendorff: The Works from 1972 to 2005)”에서는 임멘도르프가 제작한 전 시기의 작품들이 모두 보여지게 되며, 이 전시는 한국에서의 전시를 끝내고 아라리오 베이징(ARARIO BEIJING)으로 옮겨 전시된다. 전후 독일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정체성의 위기, 미술에 있어서 현대성(Modernity)의 문제, 그리고 예술가가 지닌 정치적 사회적 역할에 대한 신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임멘도르프의 작품들 전반을 한 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큰 영광이라 생각한다. 불치병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전시를 위해 한국 방문을 준비했던 임멘도르프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에 경의를 표하며, 이번 전시를 방문하는 모든 관객들이 그의 작품을 대하며 임멘도르프가 그러했던 것처럼, 예술이 지닌 사회적 의미와 예술가가 지닌 역할, 그리고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임멘도르프의 쾌락

조나단 파인버그, 얼바나 샴페인, 일리노이대학


피카소의 미노타우로스가 그랬듯,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원숭이들은 그의 "친구"이자, 쉴 새 없이 표현을 부추기는 검열되지 않은 타아(他我), 그의 창조능력 이면에 숨은, 간혹 어둡기도 한 충동이다. 회화를 지각이라는 한계 너머로 끌어올려 현실의 일부-나아가, 사회적 책임을 지닌 현실-로 만들고자 했던 임멘도르프 필생의 결의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혀 왔던 이 원숭이들과의 오랜 씨름을 피할 수 없었다. 작가 헨리 밀러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이란 현실로 들어가기 위한 "성인식을 치르는 관문"이다. 1) 초기부터 임멘도르프는 회화에 대한 정치적 의식과 함께 자기회의, 자신의 정체성과 관능성에 관한 고뇌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었고, 한편으로는 예술가란 비사회적 존재라는 뿌리 깊은 통념을 해소하고자 꾸준히 노력해왔다. 1960년대 들어 점점 더 고조되던 정치 상황이 극에 달할 무렵, 임멘도르프는 자신의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회화라는 감각적 세계로 후퇴하고픈 깊숙한 욕망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고자 통렬한 자기성찰을 위한 구성(compositions) 연작들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1971년이 그 전환점이었다.
스승 요셉 보이스(1964-70) 를 만나면서 정치적 참여미술을 향한 임멘도르프의 의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보이스 자신이 1960년대 후반부터 점점 정치적 성향이 강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1965년에 있었던 보이스의 포퍼먼스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회화를 설명할 것인가”는 임멘도르프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황금색 이파리와 꿀로 머리가 범벅이 된 채 죽은 토끼를 품 안에 끌어안고 전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토끼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보이스의 모습에서 그는 회화와 언어의 한계를 절감했다. 1966년부터 임멘도르프는 자신이 엘리트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고급 미술”의 위계, 천재 예술가에 대한 존경, 그리고 예술적 오브제의 고귀함 등으로 간주해온 모든 것을 풍자하고자 유년기 언어로의 퇴행을 감행한다. 2) 그는 "혀짤배기소리" 성명서를 발표하고 <타이네 툰스트 마헤 Teine Tunst Mache>(독일어로 "예술을 그만두라"라는 뜻인 "카이네 쿤스트 마헤keine Kunst mache"를 어린아이처럼 발음한 것인 듯) 같은 작품을 내놓았다. 이 작품들은 정치적으로 무력하기만 한 "예술행위"를 점점 더 정당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과 회화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이라는 이중성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1968년에서 1970년 사이의 작품들에 "리들Lidl"(갓난아이의 옹알이 소리를 딴)이라고 명칭을 붙였고, 아동미술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리들" 회화들을 유아적 상징의 판테온(거북이, 개, 붕어, 그리고 북극곰)으로 가득 채워, 자신의 눈에 부르주아적 관습과 나치 시대가 남긴 영혼의 상처에 속박당해 있는 것으로 보였던 성인 예술가들의 어휘를 대체하고자 했다. 아동미술은 역사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새로운 출발에 대한 상징이자, 동시에 나치가 모더니즘을 공격할 때 사용했던 쓰였던 무기, "유아적"이라는 혐의를 교묘히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거짓 순수함fausse naieté' 은 임멘도르프의 무의식적 야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스스로를 토끼(스승 요셉 보이스를 가리키는 상징이 분명한)와의 경주에서 이긴 거북이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부터 임멘도르프의 작업은 좀더 직접적인 정치색을 띠면서 다양한 정치 행동들과 연루되기에 이른다. 예컨대 1968년에는 나무("리들") 토막에 독일 국기에 등장하는 색들을 칠한 뒤 이것을 끈으로 다리에 묶고 국회의사당 앞을 오가는 시위를 했다. 이 행위는 좁은 민족주의를 쇠고랑에 비유하는 것이었다. 나무토막을 몰수해야 했던 관계당국으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항의였고, 임멘도르프가 다시 다른 나무토막을 들고 나타났을 때는 그를 국기모독죄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격분한 경찰들이 뛰어나와 임멘도르프가 종이로 만들어놓은 작은 "리들아카데미 Lidlakademie"를 발로 뭉개버렸다.
1971년의 <무제> 연작에서 임멘도르프는 자신과 자신의 정치적 신념, 그리고 회화의 사회적 타당성을 엄밀히 분석했다. 통렬하게 솔직한 심정으로 그는 이 연작 가운데 한 작품의 상단에 "이것들로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라고 썼다. 마치 종이 위에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듯, 임멘도르프는 캔버스의 한가운데에 자신의 모습을 (같은 부분에) 세 번 겹쳐 그렸다. 그리고 화가들이 쓰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를 들고 각각의 포즈를 취한 뒤, 얇은 노란색 붓을 들고 기계제품 매뉴얼에 그려진 다이어그램 마냥 다음과 같은 문구를 삽입했다. "이것은 70페니히를 주고 산 작은 붓이다. 이것은 일반 가정용 페인트이다. 이것은 나무 프레임에 씌운 캔버스이다. 예술가의 생각이 형상화되는 곳이다."
이 "그림" 아래에는 마치 정치 플래카드처럼 임멘도르프가 직접 붓으로 쓴 글귀들이 보인다. 임멘도르프는 위에서 자신이 던진 질문, 회화가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겠냐는 물음에 답하고자 깊은 생각에 잠긴다. "결코 아니다. 하지만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이 어디서 비롯된 생각인지는 따져볼 수는 있다. 어떤 목적에서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지 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사회 현실에 대한 피상적 반영인지, 아니면 벽 장식에나 쓰이는 것인지, 아니면 모순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투쟁의 일부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3) 이 <무제> 연작의 또 다른 작품 위에 그는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고 써놓았다. 화면 속에서 임멘도르프는 낭만주의적 화가의 다락방 바닥에 앉아 텅 빈 캔버스를 촛불에 비춰 쳐다보고 있다. 창 밖에서는 환한 보름달이 어두운 하늘을 비춘다. 작품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유명 일간지마다 내 이름이 등장하고, 무수한 전시회를 여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당연히 무언가 ‘새로운’ 예술을 하려고 했었다. 나의 지침은 나의 이기주의였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노동자들과 동화되는 데 실패했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이것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이기주의에 대항하여, 그리고 이기주의와 이윤의 철학에 대항하여 싸우기 전까지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와 같은 표현들로 임멘도르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처럼 알아듣기 쉬운 형태로 간단히 자신의 양식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 양식이 일러스트레이션의 통사론에 호소함으로써 회화의 고귀함을 공격한다면, 붓으로 쓴 글씨나 그림 이 모든 것에서 풍기는 역력한 수작업의 자취들은 또한 낭만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 연작은 자서전적이다. 보이스 역시 집단적 실천이라는 정치적 정언명령(최근의 마르크시즘 이론이 요구하듯)과 개인성의 갈등 때문에 고민했던 바 있다. 보이스는 자신만의 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카리스마적 권위를 만들고 자신의 펠트 이야기에 진정성을 부여해줄 토대로서 이 전기를 신화화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임멘도르프의 엄격한 자기검열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회화를 통해 자기분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더욱 분명해졌다.
1972년경부터 임멘도르프는 예컨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질문Fragen eines Lesenden Arbeiters ”에 바치는 작품과 같은 정치적 교훈을 담은 회화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1974년 작 <동료들에게Liebe Kollegen >는 이 마오주의 회화 연작의 대표라 할만하다. 그는 간판을 연상시키는 형태 속에 텍스트를 넣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작품에 가독성과 정치적 타당성을 부여했다. “동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당파성 없는’ 예술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억압, 착취를 심화시키고자 얼마나 열렬히 온갖 종류의 ‘창조성’들을 열거해왔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직접 임멘도르프는 포스터를 제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회화만을 고수했고, 이 선택이야말로 임멘도르프가 지닌 심층적인 양면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무렵, 1972년도 작품 <지금 그리고 여기: 해야 할 것을 하기Here and Now: To Do What Has to Be Done>을 겉표지에 인쇄한 동명의 자서전4) 이 나왔고, 그는 여기서 1902년에 레닌이 제시했던 경제계획,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잣대 삼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평가하는 기회를 삼는다.




1976년부터는 1970년대 초의 교훈적 양식을 버리고 좀더 복잡하고 성찰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1977년부터 시작된 <독일 카페 Café Deutschland > 연작이 그것이다. <독일 카페 >는 작가 자신의 심리상태의 복사판—당대 정치 인사들과 독일의 국민영웅들, 그리고 마르크스 이론의 “노동계급”들이 전통적 상징이라는 걸쭉한 스프에 담겨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치고 있는—이다. 이 연작에서 임멘도르프가 묘사한 공간은 대개의 경우 매우 혼잡스럽고 기우뚱하다. 1913년과 1914년도 키르히너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었던 불안하고 예리한, 동시에 구성적 기능을 했던 형태들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고전적인 독일 표현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는 결코 색채나 형태의 표현적 왜곡을 가늠될 수 있을만한 안정된 토대를 제공하지 않는다. 예컨대 <독일 카페 III Café Deutschland III>(1978)에서는 케케묵은 독수리 상징(실제 독수리의 재현이 아닌)이 작가의 초상이라는 동일한 “현실” 속에 함께 자리한다. 기억, 지각, 환상, 그리고 매개된 지식, 이 모두가 같은 발판 위에서 상호작용한다. <흔들리고 뽑히다: 다시 지면으로C D Bebenheben - zrück ins Feld>이 발표된 1984년경이 되면 모든 것은 엄청난 대지진으로 넘어지고 뿌리가 뽑혀 회화적 지면(field)이라는 사각의 틀 안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독일 카페 III>의 중앙에는 그가 붓을 쥔 채 원탁에 엎드려 잠들어있다. 뒤쪽으로는 거울이 부착된 기둥이 보이고, 그 위에 브란덴부르크 문(그리자이유 기법으로 처리된)—통독이전인 1970년대의 전체주의 진영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위치한 가장 두드러진 접점인—이 비친다. 전경의 기둥들에는 험상궂은 인물들의 부조가 조각되어 있고—흐릿하게 묘사된 어느 인물이 기둥 하나를 밧줄로 묶고 있다—, 홀 위로는 유령처럼 괴상한 모습의 남자(동독의 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촛불을 내동댕이치는 모습이 보인다. 배경에는 환한 조명을 받은 나체들이 문란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고, 좌측 상단에는 (독일을 상징하는) 사나운 독수리가 곤봉을 휘두르며 무대 로프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화가를 덮치려 한다. 하나의 단일하고 연속적인 공간에 여러 자화상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것들로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1971년의 무제 연작에서처럼)은 여러 지각이 동일 평면에서 추상적 개념들로 공존하며 순차적인 시간 구조에 종속될 필요가 없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결코 단순한 줄거리나 메시지가 존재할 수 없고, 꿈에서 본 듯 불가사의한 그리고 서로를 해독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미지와 삽화들만이 북적댈 따름이다.
이 같은 상징들의 애니미즘은 1980년대의 작업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동시에 상징들은 점점 복잡해지고, 곧잘 생략되며, 심지어 삭제되기도 했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뽑히다>에서처럼 방기된 혼돈 상태에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작품에서 텍스트가 더욱 부각되는 기간이기도 했다. 대신 정치 메시지가 아닌 보다 시적인 표현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1960년대에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언어가 중요했으며, 임멘도르프 역시 작품에 텍스트를 넣었을 뿐 아니라, ‘오직 텍스트만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텍스트’라는 생각을 실험하기도 했다. 전자는 제목과 이미지 모두가 함께 인식론적 담론을 형성했던 작품 <과일 인간 Fruchtmann>(1965)에서, 후자는 이미지 없이 단어들로만 캔버스를 가득 채웠던 <달리는 말-초원-퍼덕대는 독수리Rennendes Pferd - Wiese - hauender Adler>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텍스트의 비중은 점점 커져왔다. 처음에는 단어와 경험 사이의 간극을 탐색하기 위한 방편에서였고(1960년대 중반의 이 “개념적인” 작품들에서처럼), 다음에는 정치적 분석과 논평(1970년대)으로서, 그리고 1990년대 말 중요성이 경감되어 시적인 분위기로 탈바꿈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내러티브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게르트루드 슈타인Gertrude Stein>(1973)과 <모음Vokale> (1992-93) 등의 작품에서는 랭보의 시 “모음”(보이스 역시 좋아했던)의 구절이 인용되었고,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을 위한 연작과 같은 1990년대 작업에서는 논평이나 내러티브 노트가 삽입되었다.




1970년대 초 작업에 정치적 정언명령과 그림을 그리고 싶은 본능적 충동 사이의 대화가 면면히 흐르고 있었던 것처럼, 1990년대 작품에는 구체적이며 상징적인 것 또는 문학적인 것, 그리고 회화적인 것 사이의 담론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991년 작 <과일과 정치학 Fruits and Politics >에서는 <독일 카페> 연작으로부터 차용된 무채색의 상징들이 무대 바닥을 어지럽게 장식했다. 화가는 이 상징들을 전경의 바닥 부분까지 이어서 그리고 있고, 그의 주변에는 질펀한 육체적 쾌락의 풍경들이 즐비하다. 심지어 관객들까지 이 육감적인 나체들과 광란의 춤을 춘다. 오른편의 독일 국기는 과일 무늬가 그려진 채 회화적 요소로 한 부분으로 전락한다. 1994년의 <모음 II Vokale II>에서는 이전의 <모음> 연작에서처럼 분명하게 사물과 단어를 묘사하던 방식을 버리고 강렬한 표현주의로 선회했으며, 텍스트도 사라졌다. 화면 중앙에는 시인의 침울한 얼굴이 자리했다. 개가 전경에 보이는 아름다운 형태를 향해 오줌을 싸고, 책상 오른쪽에 묘사된 보이스의 플럭서스 비행기는 낭만적이고 회화적인 색채로 칠해진 화려한 무지개 속으로 빨려 든다.
임멘도르프는 (호가스의) <난봉꾼의 행각>을 변형시킨 연작을 통해 진심으로 선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악마(닉 섀도우)와 계약한 톰 웨이크웰의 이중성을 다시 한번 자신과 동일시했다. 그는 스승 보이스가 상징하는 사회적 행동주의, 그리고 회화라는 개인적 쾌락을 향한 수그러들지 않는 내적 욕구(악에 약한 레이크웰처럼) 사이에서 겪는 갈등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냈다.
<무제Untitled>(2000)는 1999년에서 2000년에 제작된 “백색” 회화 연작에 속한다. 이 연작은 내가 다른 곳에서도 썼듯이5) , 그림을 그리는 물질적 과정에 수반된 육체적 감각 그리고 일종의 원초적 기억과 감정을 그 토대로 하고 있다. 작품의 중심 형태—두 관능적인 여인(그 중 한 명은 뾰족한 원뿔 형태의 가슴을 하고 있다)과 누워있는 남성인 듯 보이는—는 여간 해서 알아보기 힘든 꿈속의 형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연작 모든 작품마다 한가운데에 등장하는 이 비정형의 검은 곤죽형태들은 임멘도르프의 ‘작품 세계’가 묘사했던 많은 세부묘사들의 어느 정도 축약판이라 할 만하다. 이 ‘세계’는 에로틱하다. 작가와 관람자 모두에게 그의 예술세계는 먼 유년시절의 감각적 신체 기억에 호소한다. 식별 가능한 형태들도 포함된 듯하지만, 반면 몹시 불안한, 심지어 불쾌하리만치 왜곡이 심한 경우도 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전개됨과 동시에 사라지는 듯 보이는 도상의 일생을 기초로 한, 막강한 어휘목록이다.
백색 회화 연작과 이후 5년간 제작된 작품들은 꼼꼼하고 섬세하며 직설적인(때로는 아리송하기도 하지만) 상징들, 그리고 회화의 신체성을 오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회화작품들이 의미와 존재, 언어와 감각의 실존적 간극을 탐색했다면, 청동작업 <화가의 부족Malerstamm > 연작(2002)은 예술의 기원과 인간 감정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을 탐색하는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
임멘도르프의 오랜 ‘분신’들인 원숭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화가의 부족>은 그의 축적된 회화적 상징 어휘를 또 다른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이 청동원숭이들은 마치 임멘도르프의 일상과 동일한 수준의 친숙한 현실 속에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많은 상징들과 관련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원숭이 인간은 1990년대에 임멘도르프가 르네상스 화가 한스 그뢴의 그림에서 차용해서 그린 이미지들처럼 공에 발을 묶고 중심을 잡으며 걷기를 시도하거나, 민족적·정신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유명한 상징적 참나무를 카스퍼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작품에서 인용하여 쥐고 있다. 하지만 두 팔로 과일을 안고 있거나, 칵테일 잔을 들고 술에 취한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들을 보이기도 한다. 원숭이 인간들은 조각이라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물질적 현실감을 지니며, 동시에 작가의 상징세계 전반은 몰론 모든 것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모든 것을 요약하는 순간의 출발을 알리는 듯하다. 임멘도르프는 마치 자신의 딸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이 작은 원숭이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절한 삶을 살고 있다. 그의 21세기 첫 작품들에서, 예술은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만나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는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게 된다. “한번 보게 된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인간은 도처에서 삶의 공포, 혹은 삶의 불합리를 보게 된다. 이제 그는 숲의 신 실레노스의 지혜를 안다. 그리고 구역질한다. 의지의 이러한 최고의 위험상태 속에서 이제 예술이 구원과 치료의 마술사로서 접근해온다. 오직 예술만이 삶의 공포나 불합리에서 오는 저 구역질 나는 생각을 일변시켜, 인간에게 사는 보람을 주는 여러 가지 표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6)




1) Henry Miller, Sunday After the War (Norfolk, CT and New York: New Directions Books, 1944), 155-156
2) Pamela Kort, Jörg Immendorff: Early Works and Lidl (New York: Gallery Michael Werner, 1991)을 보라.
3) Kort, Jörg Immendorff: I Wanted to Be an Artist 1971-1974, (New York: Gallery Michael Werner, 1991)를 보라.
4) Jörg Immendorff, Here and Now: To Do What Has to Be Done (Hier und Jetz: Das tun, was zu tun ist) (Köln/New York: Gebr. König, 1973), Immendorff's Handbuch der Akademie für Adler (Köln: Walter König, 1989)으로 재출간.
5) Jonathan Fineberg, “Immendorff’s White Paintings and his Political Practice,” in Jörg Immendorff: New Paintings (New York and Köln: Galerie Michael Werner, 2001).
6) Friedrich Nietzsche, The Birth of Tragedy and the Genealogy of Morals, translated by Francis Golffing (New York: Doubleday and Company, Inc., 1956), 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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