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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휘: 행복했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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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휘: 행복했던 시간들...
2019-05-15 ~ 2019-05-21
인사아트센터 5층




전시개요

전 시 명  <조성휘: 행복했던 시간들...>
기    간   2019년 5월 15일(수) ~ 5월 21일(화)
장    소   인사아트센터 5층
오 프 닝  5월 15일 PM 5:30




전시평론


실존주의적 자의식을 통해 본 인간, 동물성, 욕망, 그러므로 존재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시대적 징후와 증상

졸업을 하고 <표상 83>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아무도 그렇게 그리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런 그림을 배우지도 않았지만 그런 그림을 그렸다. 놀랍게도 모두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시대에 대해 발언하고 있었다. 풍자하고 있었다. 조성휘는 불상과 탱화를 모티브로 한 <사람의 모습 중에서> 시리즈로 자신을 알려나갔다. 결국은 모두가 자화상인 다양한 부처의 표정이 마치 천불상을 그린 탱화처럼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이었다. 나도 조성휘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기억하고, 조성휘의 작품들 중에서도 귀중한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 민중미술이라는 조직적 운동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지만, 그들과 우리의 생각이 크게 다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장명규, 조성휘를 추억하며. 2018.12) 

국내적으로 1980년대는 현실참여를 표방하는 민중미술과 모노크롬과 추상으로 대변되는 제도권미술의 이념대립이 첨예했던 시대다. 이 시기에 민중미술에도 제도권미술에도 속하지 않는 일군의 경향과 작가들이 있었고, 조성휘는 그 작가군에 속했다. 그러면서도 종래에는 어떤 작가군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독특한 형식을 열었다. 민중미술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포괄적 의미의 형상 혹은 신형상미술로 범주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실참여가 주체와 외계가 직접 대면하고 충돌하는 사회적 장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그림은 외계현상을 자기 내면으로 불러들여 내재화한, 그리고 그렇게 내재화된 현상이 속에서 파열하면서 자기언어를 얻는 실존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조건에 가까운 것이었다. 억압적인 현실과 분열적인 자기가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서로 반영하고 강화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처음엔 현실인식으로부터 그리고 이후 점차 실존적 조건이라는 보편적이고 주관적이고 존재론적인 층위에로 옮아가고 심화되는, 그런 그림이었다. 인간실존과 삶의 질에 대한 보편적 현실인식에 연동되고 견인된 것이란 점에서 보면 차라리 객관적인, 그런 그림이었다. 


 
사람의 모습 중에서, 112x145cm, 1984


이를테면 네거티브와 역광 같은 광선 혹은 조명을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효과를 불러내고 극화하기 위한 미학적 장치로 사용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내면으로부터 발원한 기로 자기 주변에 방벽을 쌓거나 사악한 기운을 떨쳐내는 사람, 더러 무덤(아니면 폐허? 어둠 자체?)에서 걸어 나오거나 관을 깨고 나오는 사람과 같은 시대적 징후를 암시하는 알레고리와도 같은, 그런 그림이었다. 그에게 시대는 때론 중얼거리고, 분노하며, 냉소적이고, 절망에 찬 증상을 온몸으로 앓는 것이었고, 그렇게 앓으면서 내뱉는, 차라리 속으로 삼키면서 웅얼거리는 화술이 우회하면서 아우르는, 그리고 그렇게 심부를 파고드는 알레고리의 화법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그 자체 이미 알레고리인 암흑시대를 인간의 실존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거울로 본, 정치적 현실을 인간실존을 비추는 거울로 본, 그런 그림을 그렸다. 실존적 인간에게 모든 시대는 암흑시대다. 그러므로 암흑 자체는 환경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자의식에 속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그림이, 내적으로 응축되고 속에서 파열하는, 그래서 외부적으론 다만 정적으로 보일 뿐인 그림이 <사람의 모습 중에서>라는 주관적인 자의식으로 표출되고 보편적인 주제의식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얼굴과 머리 

얼굴을 해체해 그 밑에 숨겨진 머리가 솟아나도록 하거나 다시 찾는...얼굴을 분해하고 지우면서 그 대신 머리가 솟아나게 하는...얼굴 없는 머리...인간의 머리가 동물에 의해 대체되는...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고 명확히 할 수 없는 영역...인간이 동물이 되는...신체적인 숨결이고 동물적인 것...고통 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 고기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 영역이고 그들 사이를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이다. 비구분의 영역인 것. 고통 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 받는 동물은 인간이다. 인간과 동물의 객관적인 비결정의 영역...때로 몸 전체가 머리로 대체되는...입은 더 이상 특수한 기관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몸이 빠져나가고 살이 흘러내리는 구멍이다(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사람의 모습 중에서, 91x106cm, 1989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 부처와 불화가 들어온다. 만다라와 단청이 차용되고, 조사상과 금강역사가 재해석되면서 작가의 그림은 전기를 맞는다. 대략 199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마치 뭉게구름 같이 몽실몽실한 얼굴들, 근육들, 흐르는 신체, 이행 중인 신체, 비결정적인 신체, 뭉개진 신체가 중첩되고 병치된다. 현실상황 그러므로 어쩜 실존상황과 전통불화가 하나의 화면 속에 오버랩 된다. 그렇게 오버랩 된 화면이 어떤 잠정적인 움직임이며 운동성을 암시한다. 평면적으로 처리된 부분과 묘사부분이 대비되는, 그리고 그 위에 드로잉 같은 선이 흐르는, 그리고 그렇게 구획된 화면이 화면 내에 인위적으로 구축된 어떤 공간을 암시하는, 아마도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을 암시하는, 심리적인 억압상태를 암시하는 마치 고립된 방과도 같은 추상공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람의 모습 중에서, 70x140cm, 1990


사람의 모습 중에서, 130x162cm, 1992


여기서 다시, 실존적 인간에게 모든 방(그리고 어쩜 모든 공간마저도)은 고립을 의미하고 추상적 공간이 된다. 그러므로 고립 자체는 심리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이때의 고립은 동시에 방으로 추상화되고 객관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추상화된 현실, 그러므로 어쩜 창출된 현실, 자족적인 현실을 통해 현실을 본다. 그 현실, 그 현실인식이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세계에 내던져진 소외의식(하이데거)을 상기시키고, 스스로에게마저 낯선 자기소외(이방인의식)를 상기시키고, 억압된 것들의 귀환(프로이트)을 상기시키고, 억압적인 현실과 무의식적 현실의 돌발적인 출현, 실재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자크 라캉)을 상기시키고, 인간내면의 또 다른 실재를 인정한 카니발과 그로테스크리얼리즘(미하일 바흐친)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특히 뭉개진 얼굴이 지워진 얼굴 뒤편으로 동물성이 드러나 보이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여기에 베이컨에 대한 질 들뢰즈의 분석, 특히 얼굴과 머리의 비교분석 부분은 마치 미지의 작가를 위해 예비해놓은 것만 같다. 얼굴은 가면이다. 페르소나다. 사회적 신분이며 제도적 인격이, 그리고 요새로 치자면 정치적 권력이 표정으로 그리고 기호로 상영되는 스크린이다. 인간이 제도화되고 사회화되고 문명화되면서 제도에 사회에 문명에 걸맞게 길들여지고 틀 화된 표면이다. 그 표면 밑에 길들여지지도 틀 화되지도 않은 자기가 억압되는데, 그렇게 억압된 자기가 머리다. 그렇게 억압된 탓에 너는 나를 결코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알 수도 없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그렇다. 



사람의 모습 중에서, 150x150cm, 1994


사람의 모습 중에서, 50x50cm, 1994


그게 뭔가. 동물성이다. 고기로 환원된 고통이고 육화된 고통이다. 고통의 몸이다. 야성이고 야생이다. 본성이고 천성이다. 숨결이고 생기다. 주술이고 신비다. 결핍이고 잉여다.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침묵이고 웅얼거림이다. 차라리 의미 없는, 그러므로 사실은 의미들로 팽배한 침묵의 소리다. 이성의 이름으로 한 번도 호명된 적이 없는, 그러므로 심지어 자기 이름마저도 없는 타자다. 들뢰즈는 다시 찾아진다고 했는데,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이다. 그렇게 작가는 얼굴을 지워 인간이 동물이 되는, 고기가 되는, 고통이 되는, 인간과 동물이, 고통과 고기가 경계 너머로 넘나들어지는 비구분의 영역, 비결정의 영역을 그렸다. 

이로써 들뢰즈는 비록 <동물_되기>에 대해 말할 것이지만, 이는 그대로 작가의 그림에서 <부처_되기>로 환원해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는 인간과 동물이, 동물과 부처가, 부처와 인간이 경계 너머로 넘나들어지는 비결정성의 차원을 그렸다. 개념 이전의 실재차원 자체를 그리고, 의미 이전의 생성차원 자체를 그렸다. 여기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사람들은 항상 이론에 의해 그림을 이해하지, 그림 그 자체로 그림을 평가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론에 대한 불만과 한계를 지적한 것이지만, 그리고 이 글 또한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이론으로 작가의 그림을 덧칠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작가는 이론 이전의 그림 자체를 그렸다. 이론에 의해 추동되고 견인되고 평가되는 그림이 아닌, 그림 자체가 현실이 되고 존재가 되는 그림, 그러므로 어쩜 매번 다른 읽기(흡사 롤랑 바르트의 작가적 텍스트에서와도 같은)를 강요해오는 그림을 그렸다. 


발랄한, 불온한, 건강한 에로티시즘 

제도적 사회에서 욕망은 억압된다. 출구를 찾을 수가 없다. 그 출구는 제도 밖에 있고 내면에 있다. 속에 있고 안에 있는 것, 은폐돼 있고 숨겨져 있는 것, 그렇게 그림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욕망의 운명이다. 제도에 의해 억압된 탓에 태생적으로 반제도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욕망이 에너지가 되고 동력이 되는, 기능이 되고 변혁의 도구가 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건 억압된 탓에 실재보다 더 발랄하고 더 불온하고 더 에로틱하다. 억압이 실재를 부풀리고 상상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억압된 욕망은 내면에서 화려하게 개화한다. 어쩜 프로이트가 승화라고 부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삶의 충동과 죽음충동이 하나로 결합된 이율배반적인 그리고 자기모순적인 욕망의 개화라고도 볼 수가 있겠다. 작가는 그렇게 내면의 꽃밭에 만개한 꽃을 그렸다. 욕망을 표상하는 꽃을 그렸고, 욕망하는 꽃(핑크 프로이드의 벽에서 보는 것과 같은)을 그렸다.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자화상, 72x91cm, 1998


사랑잔치, 112x145cm, 2003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사랑잔치>라고 부른다. 그동안 <사람의 모습 중에서>로 일관했던 주제가 처음으로 바뀌는 것인 만큼 또 다른 전기를 예비하고 있다. 사랑잔치답게 색채사용이 눈에 띠게 다채로워지고 색채감정이 풍부해졌다. 현란한 원색사용과 대비에 거침이 없어서 그런지 그림 자체는 식물을 그린 것이지만 보면 볼수록 살아서 꿈틀거리는 동물성이 엿보인다. 꽃과 동물, 식물과 동물, 에로티시즘과 동물, 욕망과 동물이 경계를 허물고 넘나들어지는, 그렇게 자유자재로 변태되면서 건강한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꽃들의 환희를 보는 것 같고(사랑은 기쁘다), 선혈처럼 붉은 상처 위로 피어난 꽃들의 소리 없는 절규가 들리는 것도 같다(사랑은 때로 아프다). 때로 파란 하늘을, 더러 붉은 대지를 배경 삼아 부유하듯 그려진 꽃들은 꽃이면서 꽃이 아니다. 성적 메타포다. 욕망의 메타포다. 상처의 메타포다. 그리고 죽음의 사신이다. 동양의 경우 화무십일홍이 그렇고, 서양의 경우 바니타스 정물화가 그렇다. 그렇게 꿀이라도 바른 듯 번들거리는 입술 사이로 불쑥 내민 혀가 꽃잎을 희롱하고 꽃술을 희롱하고 꽃의 질을 희롱한다. 마치 욕망이 저 갈 길을 잘도 알아서 찾아가는 것 같은 분방한(아님 방자한?) 그림이 <쾌락의 정원>의 또 다른 버전을 보는 것 같다. 



사랑잔치, 2003


사랑잔치, 150x150cm, 2008


그렇게 작가는 시대적 징후와 증상을 온몸으로 앓는 실존주의적 자의식을 그렸고, 머리 위로 솟아난 동물성(그러므로 어쩜 잃어버린 본성, 그리고 억압된 욕망)을 그렸고, 억압된 욕망의 발랄하고 불온하고 건강한 분출을 그렸다. 그 중에서도 작가의 대표작이랄 만한 불교도상과 실존상황을 결합한 일련의 그림들은 무속과 시대극을 결합한 박생광의 그림(이를테면 명성황후와 같은)에 비교할 만하다. 그렇게 비교되면서 또 다른 지점을 짚어내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말년의 꽃그림은 꽃그림에 대한 선입견을 바꿔놓을 만큼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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