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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섭: 비에이의 눈, 빛, 선 그리고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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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섭 사진전
[비에이의 눈, 빛, 선 그리고 언덕]

2019.04.03.~04.15




거기 설국이 펼쳐졌다

일본에 첫 번 노벨 문학상을 안겨 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 첫 문장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로 시작한다. 신항섭의 사진의 대상도 ‘설국’이다. 소설가의 설국이 쓰는 자뿐 아니라 읽는 자의 정신의 깊이에 따라 글의 깊이와 감동이 달라지듯 찍혀진 비‧에이도 눈밭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눈에, 혹은 작품을 보는 자에 따라 의미의 구조나 깊이가 달라지리라. 겨울만 되면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홋가이도의 설국. 그 많은 사진들이 카메라에 쟁여져 반입되지만, 같으면서 또 다름은 무엇에서 오는 것일까?      

모든 예술은 세계에 대한 감각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세계는 그가 조응한 세계에 대한 반응물이다. 작가라고 한다면 감수성이 곤충의 더듬이 같아야 한다. 작가의 오감이 촉수가 되어 세계와 대상을 더듬는다. 사진의 운명은 특히 그렇다. 프레임을 통해서 밖의 세계를 보는 것으로 사진은 출발한다. 그러나 단순히 밖의 대상물을 그대로 종이 위에 옮겨야 한다면 굳이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이 없다. 그냥 무심히 보면 안 되는 일인가? 조선 전기 화가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처럼. 그게 사물을 더 정확하게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본다는(觀), 그 많은 장점을 내려놓고 다시 사진으로 옮겨야 한다면, 이때 사진이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외부 세계와는 다른, 사진만이 가지고 있는 독립되고 자율적인 세계라고 믿는다. 3차원의 세계를 빈약한 2차원으로 옮겨야 한다면 3차원의 질서와 다른 질서가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3차원과 2차원을 분주히 오고 가면서 만든, 사진가의 고유한 질서여야 한다.




눈(雪)은 있던 것을 감추는 새로운 질서다. 지상의 모든 것을 덮으며 짧은 겨울 한 철을 살다가 봄기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눈이 그친 곳을 다시 채우는 것은 삶의 흔적이다. 삶의 다양한 결이 아니라 눈을 찍는다는 행위는 환원된 원초적 세계에 대한 가없는 그리움이다. 깊이는 단순함에서 나온다. 먼 하늘은 평면으로 보이지만 그 깊이는 가늠할 수 없다. 무한(無限)은 깊이를 추상하게 만든다. 사진의 깊이도 그렇다. 섬세함을 강조하면 깊이를 잃어버리기가 쉽다. 뭔가 더하고 더해서 설명하고 정보를 주고 싶은 사진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것만 남겨두고 걷어내야 하는 까닭이다.

설국을 찍은 사람은 사진가이기 이전에 그림의 속살을 헤집고, 평론하는 평론가이기도 하다. 이론이 실제 예술 생산물과 평화로운 공존은 꿈일 수도 있다.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자기검열은 순수하게 작업만 하는 사진가와는 차별화될 수 있다. 우선 그의 모든 사진의 특성은 변형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자연 스스로가 가장 아름답게 치장하는 순간을 찾아야 한다. 그게 빛과 대상이 빚는 조화가 결정적이다. 빛은 일출과 일몰 무렵의 짧은 시간에 뿌려질 때가 으뜸이다. 이 시간대를 매직 아워라 했던가. 다음으로 그의 지론처럼 최소한의 것만 남겨두는 단순화가 필요하다. 음악가가 음표와 음표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공명을 중요시하듯, 이미지의 울림도 비움에서 빚어진다. 눈, 나무, 하늘에 빛을 얹어서 빚은 공명은, 프레임 밖의 대상을 하나로 묶는 절제의 산물임을 설국에서 보여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절제는 감추려하고 우리는 보려한다.

최건수(사진평론가)








작가노트

홋카이도 ‘비에이(美瑛 Biei)’는 사진작가 마에다 신조(前田 真三 1922-1998)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 이전에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평범한 농촌일 따름이었다. 구릉지라는 지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비에이는 벼, 보리, 밀, 콩, 옥수수, 감자 등 농작물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시각을 바꾸어 보면, 이들 서로 다른 모양 및 색깔의 농작물이 지어내는 풍경은 가감할 것 없는 빼어난 구성적인 회화이다. 특히 곳곳에 자리한 방풍림과 언덕 위에 한 두 그루 또는 줄지어선 낙엽송이나 자작나무는 그대로 서정적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도 겨울이 되면 1미터 전후로 쌓이는 눈에 의해 감쪽같이 사라진다. 백설과 나목과 뾰족한 농가의 지붕이 돋보이는 지극히 단조로운 풍경으로 바뀐다. 산악에 둘러싸인 ‘비에이’는 겨우내 그저 눈만을 불러들이는 순백의 풍경이 지속될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빛에 의해 깨어나는 환상적인 이미지와 마주하면 숨이 막힐 듯싶은 감동을 억제할 수 없다. 눈과 빛과 선의 다양한 조합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에, 어떻게 하면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켜 영속성을 부여할 것인가가 관심사였다.

이번 전시는 비경사진클럽 고광중대표의 열성적인 가이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에이’ 겨울풍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신 갤러리 인덱스 최건수대표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신항섭 

1982년 12인의 현대미술가의 작품 평론집 <현대미술의 위상>으로 평론활동을 시작하였고,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으로 있다.

사진작업으로는 2010년 중국 상해 <Mulin Gallery>에서 첫 초대전 ‘중국 풍경전’을 열었으며, 이듬해인 2011년 서울 인사동의 <토포하우스>에서 두 번째 초대전 ‘바다를 논하다’를 개최했다. 2012년에 글로벌 이미지 스톡회사인 <Getty Images>의 아티스트로 계약한 이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2019년에는 아스티호텔 부산 <아스티갤러리> 초대로 ‘한국의 자연미’라는 명제의 풍경사진전을 가졌다.
이메일 | boy128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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