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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개인전 : 내재된 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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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개인전 : 내재된 기호
2018-07-25 ~ 2018-07-31
갤러리1898



전시서문

김영수의 ‘내재된 기호’의 전후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들어가는 말 

작가 김영수의 최근 작업의 화두는 ‘내재된 기호’라는 테제를 회화의 언어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최근 작업은,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필두로 한 2000년 첫 개인전 이래 2017년 이후의 추상적 화풍의 기호 형상 탐구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조형 실험을 거친 필연적 결과라 하겠다. 더욱이 2018년 최근에는 화면에 틈새의 조형 효과를 도모하는 ‘필드‘라는 이름의 시리즈 작업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일관된 주제 의식인, ‘인간-무의식-욕망’과 같은 관계적 담론을 조형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 글은 그녀의 최근작을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의 조형적 변모를 함께 다루면서 그의 일관된 주제 의식을 전반적으로 논하면서 최근작이 가지는 의미를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I. 인생연주 -  내재된 무의식으로부터의 자기 성찰  

작가 김영수의 최근까지의 작업을 개인전에 나타난 소주제를 중심으로 일괄한다면, 다음과 같다: ‘공감(Sympathy, 2004)’, ‘작곡 되기(Being music composition, 2008)’, ‘인생연주(Life is like playing instrument, 2008)’, ‘소나타를 위한 드로잉(drawing for sonata, 2011)’, ‘아다지오 소나타(adagio in sonata, 2014)’, ‘내재된 기호(Inherent Signs, 2017)’.

최근작인 ‘내재된 기호’ 시리즈를 제외한다면, 첫 개인전에서부터 비교적 최근까지 사람을 주제로 한 채, ‘인간-무의식-욕망’과 같은 담론을 조형적으로 탐구했다고 볼 수 있겠다. 김영수는 2014년, “Adagio in Sonata, 사랑으로 연주하다–느리게”라는 제목의 작가노트에서 “2000년부터 줄곧 사람을 주제로 작업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여성성, 누드, 전쟁, 관계, 무의식적 내면의 섬, 그리고 인생에 대한 철학 등 삶에서 비롯된 감성적 공감과 연민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바탕에 가득한 의식들은 그녀가 보기에 자신의 작업 속에서 “무의식에 밀어 넣었던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진실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무의식 속 잠재적 사유들이 꿈틀대며 의식의 표층을 두들기는 자기 성찰과 같은 셈이다. 이러한 성찰을 작가 김영수는 2008년부터 근 10년에 세월 동안 “인생이란 바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인생연주(Life is like playing instrument)’라는 주제에 천착해 왔다. 



Inherent Signs 18-1, 162x130m, Acrylic on Canvas, 2018


그녀는  2010년, “나의 그림은 연주를 주제로 한다”는 제목의 작가노트에서 다음처럼 언급한다: “삶은 일종의 연주와 같다. 음악을 연주함에는 좋은 악기와 함께 연주자의 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연주에는 많은 외적인 경험과 내적인 동기가 뒤따른다.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인 경험적 학습은 내재된 무의식의 동기화를 부여하고 내게 그것은 그림으로 형상화된다. 그림은 그리는 순간의 행위의 나와 무의식의 나가 함께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다. 결국 나는 음악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그리는 것이다.”

‘삶, 연주, 외적인 경험, 내적인 동기, 내재된 무의식, 그림, 그리는 순간의 행위의 나, 무의식의 나, 음악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그리는 것’과 같은 진술의 파편들은 작가 김영수가, 자신의 작업을 연주라는 테마를 통해서 인간 주체의 삶을 탐구하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임을 명백히 한다. “내 궁극의 자아 찾기란 바로 자유의 추구이므로 내게 있어 그림은 자유이며 자유는 바로 사람 ‘나’이다”라는 작가의 진술은 이러한 우리의 주장을 반증한다. 그런 면에서 ‘인생연주’ 시리즈는 작가 김영수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실존을 모색하는 한 방편으로 천착한 주제 의식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전체 작품 세계를 이끌고 있는 하나의 메타포로 훌륭히 기능한다. 

달리 말하면, ‘음악 연주’란 소재주의는 김영수의 작품 세계에 드러난 가장 기본적인 모티브인 ‘욕구와 사랑’의 성취, 실현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일 따름이다. 그녀의 작품이 지향하는 궁극의 주제 의식이자 목적은 ‘자기 사랑’을 성찰하고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발언을 보라: “내 그림의 가장 기본적인 모티브는 욕구와 사랑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사랑이고, 그 근간은 욕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방식으로 연주하는 음악이다. 이 음악에는 삶의 매 순간의 감정이 실려 있다.” 따라서 작가 김영수에게 있어 첼로와 같은 악기가 드러내는 인체 이미지는 이러한 인간 욕구와 사랑에 대한 은유이며, 이러한 “(악기의) 연주는 사랑의 방법”을 찾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서 “욕구와 사랑”으로 표현되는 작품 속 기본적인 모티브를 운용시키는 담론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필자는 ‘무의식 속 억압되고 잠재된 사물표상의 소환’으로 정의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의 최근작 ‘내재된 기호’ 시리즈를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본다. 

III. 내재된 기호 -  비언어의 ‘소리이미지’와 무의식 내 사물표상의 귀환 

작가 김영수의 최근작 ‘내재된 기호(Inherent Signs)’ 시리즈는 물감의 흘림과 겹침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추상표현주의적 바탕 위에 고대 상형문자와 같은 검은 선묘가 비문(祕文)의 텍스트처럼 커다랗게 자리한 작품이다. 간혹 영문이나 한글 텍스트가 콜라주나 공판화의 방식으로 화면의 일부분에 올라서거나 실제로 작가에 의해 써지기도 하는데, 그것들은 간혹 읽을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대개는 ‘독해가 어려운, 어쩌면 독해가 의미 없는 것들’이다. 그녀의 화면 속 텍스트라는 것이 가독성을 전제로 한 텍스트의 고유 기능을 제시하기보다 마치 ‘비가독성의 이미지’처럼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업은 다분히 우리로 하여금 기호학자 소쉬르(F. D. Saussure)가 기표(signifiant)을 지칭했던 또 다른 용어인 ‘소리이미지(image acoustique)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빠롤(parole)이라는 음성으로 제시되거나, 흔적(trace)이라는 이미지로 제시되는 기표라는 점에서 음악적 연주를 시각화했던 김영수의 이전 작업들이나 기표 또는 비가독성의 ’소리이미지의 연쇄들(chaîne acoustique)‘로 산포(散布)된 그녀의 최근작들에 어울리는 개념이라 하겠다. 우리는 안다. 이러한 기표란 기의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을 말이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종이의 앞면과 뒷면을 분리되어 자를 수 없다”고 했던 소쉬르의 비유처럼 결코 분화될 수 없는 종이의 앞뒷면과 같은 존재이다. 이 둘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전제관계이다. 

그렇다면, 기표들이 넘실대는 김영수의 작업에서 기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프로이트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무의식의 심층에서 ‘잠재된 기호’(언어화되지 않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체)의 상태로 활동하는 중이다. 프로이트에게 의식의 세계란 곧 언어의 세계인 반면에, 무의식의 세계는 기호의 세계인 까닭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김영수의 회화는 기표와 기의가 완벽히 결합해 의식의 지층에서 활동하는 언어가 되기를 지속적으로 미루어두고 무의식에 표층에 잠재하는 ‘기표와 기의의 덩어리 결합체’를 지향한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세계는 언어구성체(formation du mot)이고 무의식의 세계는 사물구성체(formation de l'objet)”라고 보았듯이, 김영수의 회화에 드러난 ‘비가독적인/가독이 의미가 없는’ 텍스트는 기표와 기의가 완벽히 상응하는 언어의 의식 세계가 아닌 단지 기표가 전면에 나선 기호의 세계로 존재한다. 그 텍스트는 사회 속 문법화된 ‘랑그(langue)’이기보다 작가 김영수의 무의식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개별화된 ‘빠롤(parole)’이다. 프로이트 식으로 본다면 그것은 의식 속에 구조화된 ‘언어(구성체)’가 아닌 무의식 속에 부유하는 ‘사물(구성체)’이다.  

그렇다! 김영수의 최근작의 주제인 ‘내재된 기호’는 무의식으로부터 발화된 채, 언어가 주동하는 의식의 세계로 나서지 않고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면에서 부유한다. 그녀의 ‘내재된 기호’는 그렇게 이해된다. 먼저 그것은 “그림은 그리는 순간의 ‘행위의 나’와 ‘무의식의 나’가 함께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라는 2010년 작가노트나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된 희로애락은 예술작품을 통해 파토스(pathos)를 이끌어낸다”는 2018년 작가노트의 진술들에서처럼, 의식의 현실계로 무의식을 소환한다. ‘어린 시절 자주 이사를 하게 되면서 친구가 적었던 탓에 착한 페르소나 뒤로 스스로를 가두며 성장했던 그녀의 경험’은 오늘날 자신의 회화 창작에 있어서, 무의식 속에 억압되었던 본능과 근원적 욕구들을 성찰하게 만드는 바탕이다. 
그녀의 다음의 발언을 보라.

 “프란츠 클라인의 건축적인 구조를 가진 선들은 선행 작가로서 나의 작업에 용기를 주었으며, 크리스토퍼 울과 멜 보흐너의 마치 낙서를 하듯 의미 없는 단어들은 그동안 억압되어왔던 말하는 욕구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무의식의 바다에 깊이 침잠해있는 원초적 본능을 만나는 일과 같았다. 잠재된 욕구의 모습인 본능이 ‘스스로 드러내어 하고 싶은 말’, 즉 내 안의 나로부터 2차원 평면의 공간으로 ‘발현되어져 나오는 말’인 기호(Signs)를 쓰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작가노트, 2018) 



Inherent Signs18-3, 130x162cm, Acrylic on Canvas, 2018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의 동양적인 서체추상, 크리스토퍼 울(Christopher Wool)과 멜 보흐너(Mel Bochner) 의 낙서와 같은 무의미적 의미의 연쇄에 영감을 받은 김영수의 회화는 추상표현주의적인 색채의 바탕과 굵고 검은 ‘텍스트 아닌 텍스트’ 그리고 독백처럼 주절거리는 무의미한 텍스트들로 중첩된다. 그것들은 억압된 본능처럼 무의식으로부터 생성되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면을 떠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본능은 “정신과 육체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의식도 무의식도 아니다. 그렇다면 본능은 어떻게 파악되는가? 결코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본능은 오로지 ‘본능을 대표하는 표상’을 통해서만 의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본능은 무의식 세계의 ‘사물 표상(représentation de chose)’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억압은 이 사물 표상이 의식 세계의 ‘언어 표상(représentation de mot)’으로 번역되는 것을 금지한다. 

김영수에게서 ‘내재된 기호’란 이러한 언어의 억압에 복종한 것이 아니며, 억압된 무의식 본능으로부터 떠올려진 사물 표상(언어가 되기를 거부하는)을 지속하는 '소리이미지'이자 빠롤로서의 존재이다. 그녀의 말대로 “선(또는 획)으로 펼쳐지는 욕구를 향한 의지, 기억과 감정의 색채는 파롤의 상태로 흩어진 기호를 통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도구로서 작용한다.” 즉 화면 속 텍스트는 더 이상 랑그가 아닌 파롤의 기호로, 시니피에를 상실한 시니피앙으로 잠재된 무의식으로부터 발현되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부유하는 것들이다. 

그렇다. 김영수의 작업에서의 사물 표상들은 억압으로부터 언어가 되겠다고 저항한 것들이 아니라, 억압된 것, 즉 ‘시니피앙으로서의 기호, 빠롤로서의 기호’, 그 자체로 소환된 것들이다. 칸트(Immanuel Kant)적 의미에서 그 표상이 거짓된 상, 주관적 점유로 얼룩진 물 자체의 심연의 표식일 따름이더라도, 김영수는 프로이트 식의 억압된 표상에 생기를 불어 넣은 채, 원래 ‘그 모습 그대로’의 정당한 소환을 지속한다. 

IV. 크랙  - 기억흔적 혹은 무의식 속 구조적 생성체 

작가 김영수는 대략 2017년부터 시작된 ‘내재된 기호’ 시리즈를 2008년까지 지속하는 한편, 주제 면에서는 연장선 위에서 탐구되는 것이지만, 형식적으로 완전히 상이한 새로운 작업을 선보인다. '필드(Field)'라는 제목의 크랙(crack) 시리즈가 그것이다. 크랙이란 “무엇이 갈려져 생긴 금”이거나 “좁은 틈”을 지칭한다. 그것은 작가가 캔버스 위에 안료와 미디엄을 섞어 화학적인 효과를 통해서 고의적으로 갈라짐의 효과를 만든 것이다. 

대개 바탕과 색을 달리 하거나 균열의 정도를 달리한 십자가 형상이나 기다란 직사각형의 면을 화면 속에서 따로 고려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업에서 ‘크랙’은 의도된 결과이다. 그런 면에서 크랙은 마치 실수로 생긴 흔적처럼 보이게끔 과장하려는 의도적인 작위(作爲)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필연을 전제로 한 우연의 효과를 기대한다. 필연과 우연, 행위와 무위(無爲) 그리고 의도적 작위와 무작위(無作爲) 사이에서 그녀의 회화는 마치 가뭄의 논바닥처럼, 노인의 손등처럼 무수한 틈새와 주름을 만들며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그것은 파열과 해체인가? 아니면 또 다른 생성인가? 그것은 언제 파열되고 언제 생성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그녀의 작업이 부단히 의식과 무의식의 접경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과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프로이트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러한 그녀의 크랙은 의식의 연쇄로부터 이탈한 구멍, 간극, 단절, 실수와 같은 모습으로 무의식에 자리 잡은 균열이자 ‘기억흔적(traces mnésiques)’이다. 즉 그녀의 작품 속 크랙은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언어처럼 구조화되지 못한 비언어의 ‘소리이미지’자 의식 속 언어표상에 도달하지 못한 무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사물표상인 것이다. 

그런데, 왜 작가는 프로이트 식의 리비도(libido)와 정념(pathos)이 화면 가득 충만했던 표현주의적 화면과 서체 추상이 횡단하는 이전의 작업으로부터 확연히 다른 양상의 작업을 펼치고 있는 것일까? 이전의 회화와 달리 그것은 마치 새로운 단색화의 화풍을 제시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는 그녀의 회화가 새롭게 도달하려는 지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프로이트로 벗어나 그의 제자 라캉의 눈으로 이 크랙들을 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무의식을 의식 내 언어 세계에 이르지 못한 존재로 보는 프로이트의 사유와 달리, 그의 제자 라캉은 무의식을 마치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는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비언어의 기호’가 작동하는 세계로 인식하고 있다면, 라캉은 이 무의식에도 ‘구조적 언어’가 작동하는 세계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서 무의식은 억압된 주체의 본능과 충동에 작용하여 생겨난 후존재론적(post-ontological)인 결과물로 볼 수 있다면, 라캉에게서 그것은 선존재론적(pre-ontological)이라 할 것이다. 라캉에게 무의식은 주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던 사회적 전통, 규범, 및 언어체계(상징적 질서), 즉 이데올로기가 그의 정신에 침투하여 형성된 기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Inherent Signs18-5, 130x162cm, Acrylic on Canvas, 2018


프로이트 관점의 무의식 세계에 몰입했던 김영수의 ‘내재적 기호’ 시리즈가 파토스의 경지에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라면, 새로운 ‘크랙’ 시리즈는 라캉의 관점에서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의 세계를 유영하듯이 명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념할 것은 기표/기의의 결합체를 전제하고 기의에 방점을 찍고 있는 소쉬의 견해와 달리, 라캉은 양자의 결합 자체에 무신경한 채, 기표에 보다 더 방점을 찍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라캉에게서 무의식의 세계란 ‘언어(적 기표)처럼’ 구조화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숨겨져 있거나 잠재되어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 아니듯이, 김영수의 크랙은 억압된 잠재적 변형체가 아니라 해체/재구조화로 발현된 ‘구조적 생성체’라는 점이다. 

라캉이 언급하는 ‘타자로서의 주체 개념’ 또한 작가 김영수의 ‘크랙’ 시리즈를 이해하는데 있어 일정 부분 도움이 된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이야기할 수 없다고 본다. 자신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말하는 나(énoncé)’와 ‘말해진 나(énonciation)’ 사이의 영원한 불일치는 언어 구조의 필연성 때문에 야기된다. 여기서 주체는 분리되고 자아는 소외된다. 이때, 인간은 자기 불일치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기 소외를 받아들이고 주체를 나타내는 시니피앙을 만나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말하는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근거할 때, 라캉이 찾은 해결책은 언어 바깥에 어떤 절대적 존재가 지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타자(Autre)의 담론이다. 보라! 인간 주체의 무의식은 대타자의 말과 담론에 의해 형성되고, 주체는 결핍, 빈자리,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대타자의 담론을 욕망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는 이러한 상징적 질서, 언어의 질서, 담론의 질서에 종속된다. 

라캉의 주체는 바로 ‘타자로서의 자아’와 ‘타자의 담론으로서 무의식’ 사이에서 ‘분열된 주체’, ‘분할된 주체’, 혹은 그의 언급대로 ‘빗금 쳐진 주체’이다. 이때 라캉의 주체는 능동적 자아이기보다 오히려 ‘고착과 나르시스적 애착의 자아’이다. 자아는 어쩔 수없이 ‘잘못된 이미지들'을 포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영수의 크랙은 라캉의 대타자 담론이 야기한 ‘분열된 주체, 잘못된 이미지들’에 대한 은유로 기능한다. 구조화된 무의식의 세계를 유영하듯이 명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것이 이러한 차원에서 일순간 균열과 균열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인간 주체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다만 유념할 것은 김영수의 크랙이 아직은 발표조차 되지 않은 진행형 작업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비유와 해석은 섣부른 예단일 수 있다. 

V. 나오는 말

작가 김영수의 작품 세계는 사람을 화두로 인간 실존을 모색했던 초현실적 형상의 작업으로부터 악기 연주를 테마로 무의식 속 희로애락의 감정을 탐구하는 작업, 그리고 ‘내재적 기호’를 주제 의식으로 삼아 무의식 속 잠재된 욕망을 가시화하는 추상표현주의적 화면과 서체 추상이 혼재된 작업들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실험과 변화를 거듭해 왔다. 최근에 후속작으로 진행하고 있는 크랙 시리즈의 변화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 외에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는 ‘판화 작업들’까지 거론한다면, 그녀가 추구하고 있는 다양한 변주의 진폭은 한 사람의 작가가 천착해 온 작업이라고 여기기 어려울 만큼 크고 변화무쌍하다. 

다만 그 주제들이 무의식, 인간, 존재, 나, 정념처럼 일관된 화두로 늘 진행되어 왔다는 점에서 앞으로 전개될 작업들에 대한 외적 변화보다는 내적 변화에 대한 기대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비언어로 소통하는 미술 작품을 평론이라는 언어로 해석하고 관객들에게 강압적인 분석의 틀로 안내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부질없는 일인지 잘 안다. 그럼에도 필자의 무모할 수 있는 이 비평이 작가 김영수에게는 향후 작업을 위한 곱씹어 볼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관객들에게는 무수한 해설 중 한 번 읽어봄직한 작품 안내서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 ● 


작가약력

김영수 (YoungSoo,Kim)

born in 1958 in Busan, Korea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전공(M.F.A)

Solo Exhibitions: 23times

2017.9 Inherent signs, Gallery 1898, Seou,Korea
2016.4.1~4.30 'Transparent Tree-Wind', Hanilkwan Invitational Exhibition(Seoul station)
2015.6 'Sonata in Adagio' Gallery 1898,Seou,Korea
2015.1'YoungKim 2007~2014' Hwe Hwa Art Center,Seoul,korea
2014 'Beyond the Storm',Wee Gallery,Scottsdale AZ,U.S.A
                                           Gallery Park Ave.LA.U.S.A
2014 'Adagio in Sonata',Art & Culture Hall, Ansan, Korea 
2014 'Adagio in Sonata', U-gyeung Gallery Invitational Exhibition
         (Geoje Haegumgang Theme Musium),Geoje,Korea
2014 VergilAmerica 10th Anniversary Invitational Exhibition,
         'The Island', Sea & Sea Gallery,Pusan,korea
2014 'Life is like playing instrument'- Hwe Hwa Art Center,Seoul,korea
2013 'The Letter',Art & Culture Hall, Ansan, Korea        
2012 'Playing My Sonata', The K Gallery, Seoul, Korea
2012 'Island', Hangaram Art Hall, Seoul, Korea
2012 'Island', Art & Culture Hall, Ansan, Korea
2011 'Drawing for Sonata', Art & Culture Hall, Ansan, Korea
2010 'Sonata', Art & Culture Hall, Ansan, Korea
2009 'Being- Music Composition' Ansan, Korea
2008 'Being-Music Composition', Danwon Art Museum, Ansan, Korea
2008 'Nude Drawing', Insa Art Plaza, Seoul, Korea
2007 'Human Being', Danwon Art Museum, Ansan, Korea
2004 'Sympathy', Pyongtaekho Art Hall, Pyongtaek, Korea
2002 'Cross', Pyunghwa Gallery, Seoul, Korea
2000  Pyunghwa Gallery, Seoul, Korea

Main Exhibitions:

2017.9 Inherent signs, Gallery 1898, Seou,Korea
2015.6 'Sonata in Adagio' Gallery 1898,Korea
2015.1 ' Young Kim 2007~2014'  HweHwa Art Center,Seoul,korea 
2014 'Beyond the Storm',Wee Gallery,Scottsdale AZ,U.S.A
                                           Gallery Park Ave.LA.U.S.A
2014 'Life is like playing instrument'- HweHwa Art Center,Seoul,korea 
2012 'Playing My Sonata'-The K Gallery, Seoul, Korea
2012 'Island', Hangaram Art hall, Seoul, Korea
2008 'Being-Music Composition', Danwon Art Museum, Ansan, Korea 
2007 'Human Being', Danwon Art Museum, Ansan, Korea 
2000  Pyonghwa Gallery , Seoul, Korea

Art Fair

2017.6 Art Gyoengju, Hico, Gyoengju
2016.9 Healing Arts Festival, Coex, Seoul
2014.12 Busan International Art Fair, Bexco, Busan
2012.11 Daegu Art Fai, Exco, Daegu

Group Exhibition: Domestic and International  Over 120 times

Present

Member of Korean Contemporary Art Society Exhibition(현대작가회)
Member of Korean Fine Art Association, Korea(한국미협)
Member of Philoprint Printmakers' Association, Korea(필로프린트판화가회)
Reporter and Member of VergilAmerica Art Magazine(버질아메리카리포터)
* 2007~2016 Member of Standing Committee  Gyeonggi-Ansan Art Fair(국제경기안산아트페어상임운영위원)


작업노트

내재된 기호 (Inherent Signs) 
우리의 무의식에는 언어, 관념, 상징의 원초적 표상체인 기호이미지가 잠재한다. 이는 주체로서의 실존적 태도를 암시하는 자발적 언어행위인 제스처(gesture)라는 몸의 표현 현상으로 나타난다. 나의 작업은 무의식에 내재된 경험과 기억을 재현(혹은 인유)하는 동시에 의미화의 강박을 떠난 원형의, 원시적인 제스처이다. 

연주하다(Life is like playing instrument): 삶의 희 노 애 락의 과정이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과정처럼, 주어진 악기를 다루고  훈련하여 마침내 하나의 음악이 되어가는 과정에 비유한 작업으로 파토스적인 색채와 동양적 사고의 여백을 포함, 기의 운용을 뜻하는 일필휘지의 드로잉선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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