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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숙 : 추상하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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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서문 / 홍영숙- 환상과 어떤 낯섦

 미술은 있을 수 있는 상황, 가능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애초에 환상이다. 미술 자체가 일종의 환상이란 얘기다. 그런데 환상이란 미메시스로부터의 일탈이요, 나아가 리얼리즘으로부터의 일탈이다. 돌이켜보면 결국 예술은 유희적이자 현실 도피적 기능 및 기존질서를 파괴하는 기능 내지는 그것을 비판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후자를 본다면 현재 상태를 부정하고 파괴하며, 나아가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설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상상을 필요로 한다. 상상은 공허한 무와 허망한 가짜만이 아니다. 이로써 형상화되는 현실은 다름 아닌 가능성의 세계다. 그것은 일견 황당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주어진 현실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틈과 사이를 벌리고 상처를 낸다. 이로써 기존하는 것은 균열을 일으키고 주어진 여건에 합당한 또 다른 대안이 생겨난다. 그것들이 마냥 꿈꿔진다. 하여간 미술은 백일몽이다. 한낱 꿈에 불과하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것은 또한 주술이었다. 종교나 믿음, 예술 활동 역시 자기 구원이나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주는 과정의 하나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힘을 빌려 다시 지상의 삶과 육체를 구원해주기를 이미지를 통해 빌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술은 마술이고 주술이었다. 예술적 활동이 영혼과 교감하는 활동이라면 보이지 않는 세계,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 깃들여 있는 잠재된 세계, 동시에 한 개인의 내면 속에 있지만 우주 전체가 함께 호흡하는 세계를 드러내고 그 세계를 교감하는 것이 바로 예술의 의미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고 동시에 인간과 세계가 처한 질병을 영적으로 치유하는 일을 하는 것은 예술가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보여 지지 않았던 것들에 몸을 만들어준다. 그것을 통해 비합리적인 소통 가능성의 여러 갈래의 길과 힘을 만들어나간다.   

환상은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다. 한편으로는 (거짓, 속임수, 현혹 등과 관련되는) 환영(illusion)을 지칭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능성, 낮 꿈, 미래 등과 관련되는) 상상(Vision)을 지칭한다. 그러니까 두 가지 대립되는 특성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환영이 부정적 환상이라면 상상은 긍정적 환상이다. 우리는 이 두 개를 모두 필요로 한다. 부정적 환상의 하나가 바로 밤에 꾸는 꿈이다. 그것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지나간 경험을 토대로 축조된다. 그것을“억압된 리비도의 전이된 수많은 양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동안 꿈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꿈을 그저 과거 지향적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한다는 것도 기실 이미 보았던 것, 어디선가 접했던 이미지, 학습된 것들이다. 그것은 과거의 시간, 그러니까 기억에 속한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이란 것이 사실은 이미 지나간 경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얘기다. 과거의 인상 깊은 체험이 반영되는 것을 우리는 예술작품이라고 말한다.

 홍영숙의 그림은 일종의 환상, 혹은 상상의 이미지이자 낯섦은 안기는 기이한 세계다. 촘촘히 화면을 채워나가면서 마구 증식되어나가는 기호의 세계이기도 하다. 자잘한 저모가 선들로만 가득 채워진 공간공포증을 연상시키는 화면이기도 하다. 극도로 작은 입자들이 모여서 이룬 엄청난 세계상이자 운동과 속도를 지닌 에너지의 진동 과 활력이 느껴지는, 묘한 기운들로 팽창하는 그런 화면이기도 하다. 본능적으로 마음에서 몸에서 풀려나오는 저모가 선으로 내적인 세계를 기호화하거나 그것들만을 집요하게 반복해서, 조합하고 병렬해 자신만의 기호의 왕국을 만들어나가는 작업들이다. 그것은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인 동시에 작가에게만 귀속된 은밀하고 자의적인 텍스트들이다. 그러나 그 텍스트들이 특정한 주제나 내용을 거느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각적인 기호들 자체가 들려주는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는, 귀에 눈을 달아주는 눈에 귀를 올려놓는 그런 그림들이다. 환시적인 느낌을 어질하게 안겨주기 한다. 기존에 통용되는 문자나 언어와는 또 다른 시각적 언어, 음성들이다. 그것은 기존의 소통체계와는 다른 새로운 소통언어에 대한 욕망을 반영한다. 관습적인 모든 기호, 언어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지우고 다른 코드를 만들러내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홍영숙의 그림에는 그가 창안한 도상과 색채, 선들이 자족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로고와 기호들로 흘러넘친다. 생각과 환상이 꼬리를 물면서 번지고 이를 자동적으로 받아서 도상과 기호들로 출력시키는 그런 그림이라는 생각이다.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어떤 확고한 세계관, 우주관, 영성에 대한 신뢰, 그리고 생명과 에너지 등에 대한 입장을 도해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입증한다고 할까 아니면 증거 하려는, 공감하게 하려는 그런 시도에서 풀려나온다고 보여 진다. 꽃을 연상시키는 형상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잘한 선들이 세포처럼 퍼져있고 컴퓨터 회로처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은 무의식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무의식을 보여주고자 하는 일이다. 사실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그것이 실체가 아니다. 그 내면, 내부는 에너지와 진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단순한 외형만이 그 존재의 진실은 아니다. 그림 역시 사물의 겉모습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서구 전통미술의 재현주의에서 풀려난 현대미술은 사물, 대상의 내면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주체의 정신세계를 시각화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우리가 보는 세계, 대상은 외면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충만하다. 그것은 눈으로 보고 알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작가는 무의식을 통해서 사물과 대상의 에너지를 느낀다. 눈으로 보여 지는 것만이 아닌, 몸 전체로 에너지의 진동을 느끼고 나아가 그것을 가능한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시각화하는 일이고 그것을 담아내는 효과적인 방법론의 구사가 그만의 기호, 로고로 이루어진, 무의식적으로 풀려나오는 선으로 충만한 것이 되고 있다.    홍영숙의 그림에는 점과 실과 같은 가느다란 선들이 촘촘히 연결되고 빼곡히 차있다. 템페라로 그려진 그림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고스란히 발산한다. 그림 속에 자리한 모든 선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 점과 선은 그래픽적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 선은 항상 연속적이며 우연의 법칙을 따르고, 외곽선이 되어 형상을 이루고 결국에는 상징이 된다. 강렬한 그래픽 양식을 거대한 상상의 세계와 결합한다. 화면은 본능적인 조형욕구로 가득 차 있다. 선들은 꿈틀대고 그것이 어떤 형상이나 기호, 문자를 흉내 내고 에너지로 진동한다. 아울러 전면적인 그리기는 중심도 주변도 지워나갔다. 온통 화면 전체가 속도감 있고 모종의 에너지로 충만해 보인다. 그것이 마냥 발산되고 있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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