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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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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은 존재의 집

  • 전시분류

    단체

  • 전시기간

    2017-12-07 ~ 2017-01-17

  • 참여작가

    김다솜, 서슬기, 손배영, 이산, 이인강, 김효진, 김비주, 김효정, 김혜경, 방미화, 짠민우, 임상철, 김진호, 임동현, 신건우, 정동호

  • 전시 장소

    대안공간눈

  • 유/무료

    무료

  • 문의처

    031-244-4519

  • 홈페이지

    http://www.spacenoon.co.kr

  • 상세정보
  • 전시평론
  • 평점·리뷰
  • 관련행사
  • 전시뷰어


2017 대안공간 눈 신진기획자 지원전시

취향은 존재의 집


2017.12.07(THU) - 2018.01.17(WED)

 Artist Talk : 2017. 12. 09. 4PM
Curator Talk : 2017.01.06.4PM 




프로그램 기획 의도


대안공간 눈은 다년간 신진 작가를 지원하고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해왔습니다. 더불어 2014년부터는 시각문화예술 분야의 평론가로서 활동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새싹이음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습니다.  더 나아가 2017년 연말부터 새로운 한 해를 여는 2018년 1월까지 시각문화예술 분야에서 새로운 예술 담론을 형성하고자 하는 예술 기획자들을 지원하는 <2017 대안공간 눈 신진기획자 지원전시>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습니다.  이 기회를 바탕으로 대중들이 어렵게 느껴왔던 현대 예술에 부담 없이 다가가고, 더 나아가 확장된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음을 기대합니다.



 

참여 기획자 : 나윤주, 목명균, 박주원, 마틴 배런, 손배영, 조재연, 전유정
참여 작가 : 김다솜, 서슬기, 손배영, 이산, 이인강, 김효진, 김비주, 김효정, 김혜경, 방미화, 짠민우, 임상철, 김진호, 임동현, 신건우, 정동호 (16명)

세부전시 : <따뜻한 밥을 지어>展
          : <글로 배우는 연애>展

          : <너와 나의 아비투스>展
          : <마담의 주방>展
 

전시기획의도:
가장 혼자여야 하는 시간이 있다. 아무도 같이 있을 수 없는 ‘나’일 때가 있다.
그 순간에도.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전시서문:

“이해”란 해석학적으로 공통-보편이라고 할 만한-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 반대로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이기만한 일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취향존중, 줄여서 “취존”이란 낱말의 쓰임새는 그 개인적이기만한 일을 이해해달라는 요청임에도, 그자체로 그것은 모순을 갖게되는 셈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 즉 취향과 공통의 지평이라 칭해지는 이해는 서로를 늘 포함하지 않는다. 그래서 “취존”은 그것이 내뱉어질 때마다 상대의 안으로 들어가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쉽게도 방치해왔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취향이라면 더 이상 상대를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취향은 그래서 존재가 가장 혼자여야 하는 시간이며, 아무도 같이 있을 수 없는 때이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진정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이라면, 그리고 그 믿음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는 가장 개인적이기만한 일들에서도 공통의 지평을 찾는 일에 종사해야만 한다. 기획된 전시들이 모두 경유하는 지점은 그렇게 취향에서 공통의 지평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리고 가장 개인적인 것을 공통의 지평에 위치시키는 것은 가장 고유한 예술의 몫이다. “저 그림은 아름답다.”라고 일컬어질 때, 그것은 내게만 아름답다는 말로 풀이되지 않는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판단’임에도 표현을한 예술가의 취향도, 받아들이는 ‘나’의 취향도 그것이 모두에게 아름답길 염원한다. 사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진정으로 가능하다고 가장 오랜 믿음을 가지고 헌신했던 것은 예술일지도 모른다.

취향은 가장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장소는 늘 사회에 놓여져있고, 그것의 문을 연다면 그 사회 그러니까 공통의 지평과 마주할 수 있다. 가장 혼자여야 하는 시간이 있다. 아무도 같이 있을 수 없는 ‘나’일 때가 있다. 전시는 그 문을 열고 이음을 만들고자 한다.

그 순간에도.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세부전시 : 따뜻한 밥을 지어 展


전시 기획 : 목명균
참여 작가 :  김비주, 김효정, 김혜경, 방미화, 짠민우
전시 서문




배경은 속초의 어느 집이다. 그 집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인간이자 여자이고 한 아이의 엄마이며 누군가의 딸인 사람,
그 집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공기를 이루고 있다. 살아가기 위한 몸짓들, 소소한 웃음, 치열함, 소란스러움, 외로움, 처절함, 희망, 절망, 고통, 공무원 시험을 위한 책, 맥도날드 컵.
그 집은 바다와 닮아있다. 위로와 푸근함이 있는 바다. 동시에 우울함과 황량함, 공포감을 주는 바다. 그것들을 철썩 거리며 밀고 들어왔다가 나가 어느덧 고요해지는 곳이다.
그 집에는 인생이 담겨있다. 그 집에서는 인생이 시처럼 쓰여진다.
그 집에는 인생이 담겨 있었다. 그 집에 살던 사람은 사라지고 그 집에서 쓰여진 시만 남았다. 거친 바다가 고운 인생을 빼앗기도 한다. 그리곤 잠잠해졌다.
고요해진 집에 다른 이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과거의 인생이 담긴 공기를 맡아보기 시작했다. 새겨진 시를 읽으며 살림을 이어나갔다.

원래의 주인은 시인 김비주.

빈 집에 짠민우가 등장했다. ‘짧고 굵은 황홀경 3년에 빚이 30년. 자식년 또한 그 지랄...’(내가 너 때문에-간난艱難2 中) 그의 일러스트는 끝나지 않는 인생의 지랄 같은 면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뭐든 반대로 그려낸다. 그렇게 그려진 귀여운 해학은 사람을 웃게 하고, 건강하게도 한다. 자식년 또한 그 지랄인 게 뭐 대단한 일이야? 특별할 거 없어. ‘우리는 모두 생生이란 이름을 가장한 공동묘지에 살고 있’는걸(공동묘지 中). 모두 똑같아. 몸을 움직여 살아가자고 한다.
김혜경은 꽃을 들고 나타났다. ‘이보시오 뭐가 그리 바쁘오. 나와 달빛이 드는 창가에 마주보고 앉아 술 한 잔 곁드오’ 하는 시인의 친구가 기꺼이 되어 준다(달빛 드는 날에 中). 그럴 때면 꽃으로 물든 달빛이 술잔으로 쏟아진다. 그리곤 그녀에게 붉게 타오르는 레드 다이아몬드와 루비구두를 신겨준다. ‘세상에서 너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나는 마네킹 中), 너의 하나뿐인 인생도 아름답다, 너는 너이기에 온전히 아름답다 한다. 김효정은 천으로 작업한다. 그녀는 온기를 몰고 왔다. ‘라먼 끓여요? 라먼 끓여요? 물어보고 물어보’는 ‘쪼끄만한 아들 녀석’과 그 아들 녀석이 잠든 모습을 보며 ‘꺼억꺼억... 눈물 쉴 틈 없’는 여인에게 고봉밥을 몇 그릇 올린 밥상을 내밀며 어깨를 토닥인다(라먼-간난艱難1 中). 밥이고 뭐고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는데, 내 안에서만이 멈춰버린 것 같은 그런 날’에는 너의 머리 위에도 푸른 하늘이 있다고 이야기 하며 포근하게 안아준다(그런 날 中).
방미화는 글씨로 대화한다. 내면의 복잡함, 기쁨, 걱정, 투쟁, 자신조차도 모를 갖가지 감정들을 글로 옮긴다. ‘살아온 시간들이 처량 맞’다고 말하는 이를 위해 창문을 닫아주고 이야기를 들려준다(처량 中). 그대가 떠나버린 이 집의 고통과 아픔, 걱정 모두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이제 그대가 머무는 곳에서는 기쁨과 행복만이 당신의 몫이라고 안심시켜 준다. 떠난 집주인과 함께 ‘하늘을 쓰고, 구름을 쓰고, 달을 쓰고, 별을 쓰고, 단 하나의 사랑을’ 함께 쓴다(꼬마 시인 中).
바다를 닮은 그 집은 우리 모두의 집이다. 바다는 영원할 것 같다. 파도도 쉬지 않는다. 바다는 변치 않음의 희망을 준다. 반면에 이 지구상의 고통 또한 광활히 영원할 것이라는 절망도 준다. 우리는 이 집에서 해학과 아름다움, 온기, 공감으로 위로하며 버텨나갈 것이다. 아무리 험상궂게 생겨먹은 바다라도 ‘우스운 얘기 한 소절’이면 ‘눈 근처 어디쯤 실선들이 활짝 번져 틈틈이 어느 시골 밭의 푸근한 흙내를 풍’길 것이며 그 ‘퉁명스러운’ 바다의 ‘푸석진 웃음 한 자락에 온 마음이 푼푼해’질 것이다(퉁명스러운 아줌마 中).

모두에게 위로를 전하며.

 





세부전시 : 글로 배우는 연애



김효진, <내면의 이끌림(drawing series)>, colorpencil on paper, color on korean paper, 

variable size(each 25*25cm), 2017



전시 기획 : 박주원 
참여 작가 :  김효진  
전시 서문


연애란 무엇일까? 단순히 두 명의 사람이 만나서 사랑이란 감정을 나누는 것일까? 그렇게만 말을 하기엔 그 사이사이에 있는 감정들이 너무나도 폭발적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은 열심히 배우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맺는 법은 배우지 않는다. 그렇게 ‘어떻게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누군가에 의해 ‘이것이 연애’라고 정의된 것에 따라서 연애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사적인 경험에만 기반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애는 항상 실패하곤 한다. 어찌 어찌 잘 이어간 연애가 결혼으로 귀결된다고 하더라도, 결혼조차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사람을 만나면서 즐거워하고 실패하고 슬퍼하는 과정을 무한하게 반복하면서 살아 나간다. 무엇이 맞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재미있는 점은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다른 사람과 제대로 나누지 않고,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을 열심히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온전히 나에게만 존재하는 슬픔과 고독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나를 이해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도 고독과 외로움 속에 갇혀 또 한 번 고립됨을 스스로 선택한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우리의 고립을 연결로 바꾸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들이 쓴 글들, 책의 구절들, 누군가의 코멘트를 통해서 우리의 연애는 혼자만의 실패가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경험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글로 연애를 배움으로써 우리가 혼자된 존재가 아니고, 우리의 연애가 실패한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사랑의 종류가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외로움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글들은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렇게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되돌아볼 수 있다. 결국 타인을 잘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더 넓게는 관계와 인연에 관한 이 전시가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넘어 스스로의 감정 역시 들여다 보는 시간을 주기를 바라 본다.  





세부전시 : 너와 나의 아비투스






전시 기획 : 마틴 배런
참여 작가 : 김진호, 임동현,  임상철, 신건우, 정동호

전시 서문


너와 나의 아비투스

배민영 / 미술비평가, 큐레이터

우석훈의 <너와 나의 사회과학>이 나온 지도 벌써 6년이 되었다. 그는 ‘사회학’이 아닌 ‘사회과학’으로 명기함으로써, 그 한 글자가 왜 더 들어갔어야 했는지를 말하려는 듯했다. 그래도 그 책보다 더 알려지며 유행어를 만든 그의 전작 <88만원 세대>에서 얻은 공신력 덕분에 왠지 다가가기 싫은 영역을 대중들은 자신의 처지가 섞여있다는 인지를 통해 적어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88만원 세대> 출간 이후 10년간 상황이 나아졌다고 볼 수는 없으며, 급기야 대통령이 자신의 성을 너무 공고히 쌓으려다 붙잡혀가는 불상사가 터지고 말았다.

더욱 불행한 사실은 그 사이 까다로운 의전을 요구한 그녀의 특이한 취향,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은 아무튼 그 ‘사항들’ 때문에 ‘취향’이라는 말이 꽃은 피우지 못할망정 오염된 측면이 있다는 데 있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있으며, 어떤 문화와 취향을 향유할 수 있는 존재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고 싶다. 지난봄의 앞당겨진 대선 결과에 성급히 만족한다면 일찍이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통해 일갈한 대혁명 직후의 프랑스 시민들의 자위와 하향평준화, 즉 새로운 군중의 고독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고독한 시대이다. 혼사족, 혼밥족, 혼술족이 늘어날수록 ‘취향’을 건드리는 문화상품들은 많아질 테지만, 그것이 진짜 취향인지 아니면 그냥 취미인지 알기 위해서는 ‘너와 나의 아비투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단순히 부르디외라는 대 사회학자에 대한 경탄과 교육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예술 하는 사람으로서의 생각이다. 이제는 사회학에서 사회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에서 예술, 즉 인문학의 차원으로 넘어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취향은 존재의 집>이라는 큰 지붕 아래에 작은, 그러나 열린 울타리를 튼 본 전시는 ‘각계각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 김진호, 임동현, 임상철, 신건우, 정동호 이렇게 다섯 명의 작가들로부터 시각과 퍼포먼스와 논쟁을 유도하고자 한다. 바라건대는 그냥 그대로를 관찰하고자 한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에게 ‘아비투스’란 무엇일까. 습관일까, 규정일까, 무의식일까,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것일까. 



세부전시 : 마담의 주방







전시 기획 : 조재연, 손배영 

참여 작가 : 김다솜, 서슬기, 손배영, 이산, 이인강

전시 서문

예술가가 어떤 학력과 경력을 거쳤고 그가 표현하는 정서가 무엇인지 등의 과정으로부터 비평은 참 ‘다행’히도 탐색되고 추궁된다고 믿었지만 그 순간에도 예술가의 ‘일상’은 늘 생략된다. 예술가는 어떻게 생활하고, 어떻게 ‘안녕’한가는 이전에도 지금도 물음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술가의 ‘일상’이 물음되지 않을 때, ‘일상’을 가지지 않는 예술가란 관객에게 언제나 낯설고 권위적인 대상으로 출현하게 된다. ‘일상을 가진 관객’에 대하여 ‘일상을 갖지 않는 예술가’는 상품과 다르지 않은 대상-화된 존재이다. 이 비대칭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이란 장막 앞에 수동적인 존재로 숨을 죽이게 만든다. 이때 모더니즘 미학이 생성하려던 ‘관계성의 미학’은 자취를 감춘다. 창작의 과정과 예술가의 낯을 보존한 예술이 예술가의 ‘일상’을 생략하는 것으로 관객의 숨을 죽인다면 그것은 그래도 도구성에서 벗어날까.

《마담의 주방》은 참여 작가들의 프랑스 레지던시 경험을 토대로 예술가의 ‘일상’을 가장 깊숙하게 관여하는 ‘마담(Madame)’을 소재로했다. 여기서 ‘마담’은 당시 작가들의 프랑스 레지던시를 총괄했던 후원자이자 ‘관리자’이다. 예술가는 오직 작품이라는 ‘결과’가 매개하는 관객에 한해서 예술가로 드러나지만 ‘마담’은 작가들을 일상에서 조차 예술가로 소환한다. 그녀가 단순히 후원자나 공간의 제공자을 넘어 ‘관리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예술가들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예술가들에게 작업에 대한 꾸중과 구박 그리고 뒷담화와 같은 ‘적대’를 일상 속에서 진행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때 예술가는 기존의 작품이라는 결과물에 따라서 과정을 추궁받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부터 또 과정과 결코 단절될 수 없는 연속성으로 묶여 추궁받는다. 그리고 이 관계 위로 과정을 공유하고 그 적대 속에 긴장하면서 ‘과정 전체-자체-‘가 하나의 예술로서 취급되고 또 생활 내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게된다.

마담에 대한 경험은 모두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지만 두 반응의 공통점은 예술가의 ‘일상’을 깊숙이 포착하며 관여했다는 ‘형식’에 있다. 그리고 예술가의 ‘일상’의 포착과 관여는 모더니즘 미학이 가망없는 헌신을 하려고했던 예술의 ‘탈-도구성’과 그로부터 관계 미학이 추구했던 희망의 극한 값이다. 《마담의 주방》은 관객을 이러한 형식을 갖고 있는 ‘마담-화’로 이끈다. 작가는 ‘레지던시’에서 나온 사건들을 일정한 내러티브를 가진 작품으로 드러낸다. 사건들은 모두 마담과의 사건이며, 관객은 다양한 시점으로 구성된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감각으로 전시에 마담으로 ‘참여’된다. 마담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예술가의 ‘일상’의 재생과 마주한 관객이 더이상 예술을 ‘일상’을 소유하지 않은 대상화된 ‘상품’이 아니라 일상의 ‘아무 것’으로서 예술을 대하며 참여의 가장 적극적인 ‘관계’인 적대를 형성함을 의미한다. 이때 관객은 손쉽게 비평이란 어색한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예술을 꾸중하고 구박하고 뒷담화하는 즉, 적대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한다.

기획자는 여기에 주목하고 그 마담의 형식을 전시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불투명해진 미학이 걸었던 ‘희망’을 재생하고, 늘 여백으로 남겨졌던 예술가의 ‘일상’을 재생함으로써 재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담의 형식을 관객에게 부여함으로써 숨죽인 관객을 해방시키는 것을 향한다. 그럼으로써 예술은 우리의 삶을 더나은 방향으로 변화 시킨다고 믿었던 모더니즘 미학이 진행한 가망없는 헌신을 현 시대에도 보태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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