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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붓으로 조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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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0세기 서화미술거장Ⅰ>
김종영, 붓으로 조각하다 Kimchongyung Sculpture with a Brush


전시 소개

‘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성 김종영은 사실 전통 서예와 서화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우리는 김종영의 조각언어를 ‘전통과 현대의 일치’ 또는 ‘내재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의 하나 됨’이라는 결정적인 해독의 키워드로 온전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김종영 예술 위업의 진정한 가치는 20세기 서화(書畵)에서 미술로의 대전환기에 ‘사의(寫意)’라는 동양전통으로 ‘추상(抽象)’이라는 서구현대를 녹여냄으로써 동서예술이 나아갈 방향을 실천적으로 제시한 데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김종영 예술의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김종영의 조각이 서예나 문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불각(不刻)’이라는 조각언어가 철저히 일상생활 속 통찰과 비판적 해석에서 탄생된 것임에 주안점을 두고 총 6개의 테마로 전시를 구성하였다.


전시 구성
1. 창작산실 ‘불각재(不刻齋)’
2. 초월(超越)을 잉태하다 -‘ 나의 살던 고향은’
   [전통체득 시기 : 1915(1세)~29(15세) / 창원]
3. 너를 찾아서 - ‘로댕소론’
   [현대수용 시기: 1930(16세)~47(33세) / 휘문고보-동경예대]
4. 동서예술 통찰과 ‘추상미술 Abstract Art’- 추사와 세잔
   [실험시기: 1948(34세)~1963(49) / 서울대]
5. 역사와 실존의 대화
6. 생명의 근원에서 - 유희삼매(遊戱三昧)
   [완성기:1964(50세)~82(68세) / 삼선동]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은 12월 22일(금)부터 내년 2월 4일(일)까지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0세기 서화미술거장1 <김종영 - 붓으로 조각하다 Kimchongyung Sculpture with a Brush>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예술의전당과 김종영미술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전시로,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우성 김종영’의 폭 넓은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고, 김종영의 조각 작품 외에도 서화, 서예, 드로잉, 사진과 유품 등 180여 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특히 김종영이 애장했던 추사 김정희의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을 전시하며, 이 서첩은 본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12월 22일(금) 오전 11시와 오후 4시 서울서예박물관 2층에서 각각 기자간담회와 전시 개막식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12월 29일(금) 오후 1시 30분에는 <김종영과 자코메티 - 동서 현대조각의 대화>를 주제로 포럼이, 내년 1월 13일(토) 오전 10시 30분에는 김종영 의 예술세계를 재평가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된다. 입장권은 성인 10,000원, 학생 5,000원이며 예술의전당 홈페이지(www.sacticket.co.kr)와 현장매표소에서 구입할 수 있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문화가 융합한 20세기,
세계 속 한국미술의 선각자들을 조명하는
<20세기 서화미술거장전> 시리즈!

1988년 문을 연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은 2년의 리모델링 과정을 거쳐 2016년 3월 1일 재개관 후, ‘서(書)’를 키워드로 현대미술을 관통하고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세계 필묵(筆墨)공동체의 구심점을 지향하고 있다. 특히 <20세기 서화미술거장전> 시리즈는 정보통신이 주도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인간적인 예술인 서예의 현재와 미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전시이다. 지난 식민지 서구화로 대변되는 20세기는 ‘서화(書畵)’에서 미술로 넘어가는 전환기였던 만큼, 한국 미술계에는 전통과 현대, 동서 문화가 뒤바뀌는 대 변혁기에 걸맞은 역할을 감당할 인물이 절실했다. 이번 시리즈는 서화와 미술 모두에 정통하여 상호 비교분석하고 융합하여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창달하는 데 이바지할 작가를 찾아 그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특히 지금은 단절되어 있는 한국의 서예와 미술을 융∙복합하여 한국문화의 정체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동시에 획득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아버지’ 김종영
21세기 동∙서 예술의 융합을 제시하다!

‘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성 김종영은 사실 전통 서예와 서화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우리는 김종영의 조각언어를 ‘전통과 현대의 일치’ 또는 ‘내재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의 통합’이라는 결정적인 해독의 키워드로 온전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김종영 예술 위업의 진정한 가치는 20세기 서화(書畵)에서 미술로의 대전환기에 ‘사의(寫意)’라는 동양전통으로 ‘추상(抽象)’이라는 서구현대를 녹여냄으로써 동서예술의 나아갈 방향을 실천적으로 제시한 데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김종영 예술의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김종영의 조각이 서예나 문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불각(不刻)’이라는 조각언어가 철저히 일상생활 속 통찰과 비판적 해석에서 탄생된 것임에 주안점을 두고 총 6개의 테마로 전시를 구성하였다.





전시 구성

1. 창작산실
첫 번째 섹션 「창작산실 ‘불각재不刻齋’」는 김종영 예술세계의 정수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불각재不刻齋」는 김종영이 자신의 작업실 편액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다. 깎아 형상을 만드는 것이 업인 조각가가 자신의 작업실을 불각, 즉 ‘깎지 않는 곳’이라고 하였으니 일종의 모순이다. 김종영은 자신의 서예작품에 낙관할 때 ‘불각도인不刻道人’이라고도 하고 ‘각도인刻道人’이라고도 하였다. 년도를 확인 할 수 있는 작품 중에 각도인이라 낙관한 작품은 1949년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불각도인은 1974년부터이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그는 역설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는 「不刻의 美」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글을 살펴보면 1964년 경 그는 고대 중국인들이 ‘불각의 미’를 숭상한 이유가 인위적인 것을 최소화 한 자연스러움의 미를 추구한 것과 더불어 형체보다도 뜻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결국 자연스럽고 단순한 ‘불각의 미’는 ‘졸박(拙朴)의 미’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졸박’의 의미가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우며, 지혜를 써서 꾸미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졸박의 미’는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했던 미학이다. 김종영이 선비의 미학에 입각한 조각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불각의 미를 추구한 김종영은 복잡하고 정교한 기법을 싫어하였는데 그 이유는 숙달된 특유의 기법이 자신의 예술 활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능한 단순한 표현과 기법을 추구하였으며, 자신의 지향점을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라고 매우 함축적으로 정리하였다.

[대표작 : 『장자莊子』 「천하天下」편 판천지지미, 작품 80-5, 작품 74-13, 작품 80-1, 작품 79-15]



2. 초월을 잉태하다 [전통체득 시기 : 1915(1세)~29(15세) / 창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꽃 대궐’이 바로 경남 창원 소답동에 위치한 김종영의 생가이다. 김종영은 증조부와 조부 모두 정3품 벼슬을 지낸 영남명문사대부집안의 23대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7대조가 무오사화(1498) 때 화를 입은 영남사림의 영수 탁영(濯纓) 김일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부친은 일제강점기였기에 일생을 향리에서 처서로 지냈다.
현재 생가로 알려진 본가 옆에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사미루(四美樓)’란 별채가 있다. 원래 한 울타리에 있던 집이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인해 집 한가운데 도로가 개설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분리된 것이다. 본가와 별채는 1926년 김종영이 11살 때 상량하였고 본가는 1940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한 것이다. 별채를 ‘사미루’라 하는 이유는 문간채 2층 처마에 건 현판이 석촌 윤용구가 쓴 사미루이기 때문이다. 그의 증조부 김영규는 별채를 짓고 구문(求文)이라 편액하였다. 1928년 그는 구문정의 주인으로 시를 지어 원운(原韻)으로 하여 각지의 문사들에게 차운(次韻)한 시를 받아 판각하여 구문정에 걸어놓았다. 구문정 기문은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정만조가 지었다. 김종영은 “선서(善書)이며 학예장(學藝長)”, 즉 글씨를 잘 쓰고 학예에 능했던 부친의 교육과 더불어 이런 시회(詩會)와 여러 문사들과의 교류를 지켜보며 자랐다. 그는 당시 조선 사대부의 학예 전통을 가풍으로 익히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김종영은 당시 여느 미술학도와 달리 조선 사대부의 고급문화를 어릴 적부터 체화한 것이다.

“전통이란 말 속에는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작 : 사미루 현판, 증조부 모대, 의친왕 글씨, 성재 김기호 족자, 정대유 병풍, 오세창 족자]


3. 너를 찾아서 [현대수용 시기: 1930(16세)~47(33세) / 휘문고보-동경예대]
김종영의 집안내력으로 볼 때 그가 조각을 선택한 것은 의외일 수 있다. 그가 조각을 전공한 계기는 휘문고보시절 은사인 장발의 인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친구 박갑성에 의하면 김종영이 조각을 선택한 이유는 조각전통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우리이기에 식민시절 서구미술을 객관적으로 수용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측한다. 한편 김종영이 선비가 갖춰야 할 수준 높은 학예(學藝)를 가학(家學)으로 익혀 체화하였기에 그가 서양미술을 전공하면서도 이해하고 수용하는 폭이 동년배 미술인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국내 미술대학이 없는 관계로 일본 유학은 필수였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명문사대부 집안 출신은 김종영 이외에 찾아보기가 어렵다. 당시 대부분의 미술전공자들이 개화론자의 입장과 유사하게 전통 서화를 비하하였다. 심지어 이한복과 같은 동양화가들은 서예와 사군자는 소인(素人), 즉 비전문가가 하는 것이니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총독부에 청원하였고, 실제로 퇴출되었다. 그때 김종영은 휘문고보 2학년으로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 습자(서예)부분에서 전국 장원을 했다. 그는 당시 수상 인터뷰에서 수상하기까지는 부친의 지도가 있었음을 밝혔다. 부친의 한학과 서예에 대한 지도는 김종영이 서양 미술 조각을 전공하기 위해 동경에 유학하던 때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당시 부자간에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고, 그 내용을 통해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김종영은 서화에 대한 정수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미술을 서예에 ‘격의(格義)’하여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동경유학시절 오로지 인체를 똑같이 만드는 것에 열심인 학교분위기에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불만이 그의 작업에서 왜색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대표작: 동소문 고개, 조모상, 소녀상]

“결국 로댕을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正이라고 보는 사람도 不正이라고 보는 사람도 
모두 로댕의 영향 없이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로댕의 예술을 예술의 전부라고는 하지 않는다.”


4. 동서예술 통찰과 추상미술 [실험시기: 1948(34세)~1963(49) / 서울대]

1955년 11월에 쓴 그의 단상을 보면 소박한 듯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는 대단히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로서 그의 태도는 남달랐다. 대등한 입장에서 동서미술을 통찰하여 상호 부족한 점을 보완, 혼융하고자 노력하였다. 어려서부터 체화된 서예의 학습방법인 임서(臨書)를 토대로 서구 미술을 연구하였다. 당시 작업실이 없어 방학이면 학생들과 같이 빈 실기실에서 작업하면서도 그는 외국작가의 작품집을 펼쳐놓고 깊이 관찰하며 세밀하게 따라 제작하였다. 더불어 김종영은 서구추상미술의 태동과 그간의 흐름을 스스로 연구하며 대표적인 작가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간략히 평하며 정리하는 것도 병행하였다. 주목할 것은 그는 그런 흐름을 서화의 전통과 비교 성찰하는 것을 병행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그는 평론가의 여하한 비평에 대해서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용기와 소신을 가지고 자신만의 일정에 맞춰 작업에 정진해 나갔다.

“굳이 나라는 것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시대에 한계를 두고 싶지도 않다.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도 통할 수 있는 보편성과 
어느 시대이고 생명을 잃지 않는 영원성을 가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

[대표작 : 두보杜甫 <단청인증조장군패丹靑引贈曺將軍覇>, 욕후, 새, 전설, 44세 자화상, 산신]


5. 역사와 실존의 대화
1964년 1월 1일 일기에 김종영은 “지금까지의 제작생활을 실험과정이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종합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50이라는 나이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이후 환갑을 바라볼 즈음 조각가 김종영은 다시 서화(書畫)로 회귀하여 자신을 성찰하였다. 김종영이 생전에 추사 김정희를 자신의 사표로 삼았기에 추사고택을 찾아 영전에 절을 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김종영은 생전에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을 애장하여 즐겨 감상하였다. 이 서첩 첫 장은 「유희삼매(遊戱三昧)」로 시작한다. 그 다음은 고인개집고(古人皆執古) 불사동아비(不辭凍餓悲), 즉 ‘옛 사람은 모두 옛 도를 지키면서 추위와 배고픔을 마다하지 않았네’라고 시작하는 오언절구 시이다. 김종영이 「유희삼매(遊戱三昧)」를 예서로 쓰고, 「세한도」를 그리고 「유희삼매」와 「완당과 세잔느」라는 제목의 단상을 쓴 것이 이 서첩을 즐겨 감상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종영은 고희동과 여타 1920년대 미술인들이 힐난한 서화가들의 행태, 즉 옛 것을 그저 베끼기만 하는 것으로 오인된 방작과 임서를 묵묵히 시행했다. 안진경의 『쟁자위고(爭座位稿)』를 임서하였고,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를 방작하였다. 40여 년 전 임서했고, 사생해봤기 때문에 안진경과 만폭동은 김종영에게 매우 익숙한 대상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김종영이 임서와 방작을 했다는 것은 모든 서화가가 지향하는 ‘입고출신(入古出新)’하기 위해서는 대가일지라도 반드시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학습법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신(出新)한 작업들이 『북한산』과 같은 드로잉작업이며, 다양한 형태로 입체화 된 조각 작품들이다.

[대표작: 완당 김정희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 <유희삼매遊戱三昧>, 자작(自作)-도중우음(道中偶吟), 작품 71-6, 방겸재 금강산 만폭동도, 북한산, 한산(寒山) <등척한산도登陟寒山道>, 세한도, 작품 76-8]

6. 생명의 근원에서 [완성기: 1964(50세)~82(68세) / 삼선동]
추사를 사표로 삼은 김종영이 ‘입고출신(入古出新)’하여 궁극으로 지향했던 바는 ‘유희삼매(遊戱三昧)’의 경지에 도달하여 느낄 수 있는 자유였다. 그래서 그는 “작가에게 작업하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고, 손을 쉬는 시간은 온갖 잡생각을 해야 하고 생활을 고민해야 하는 괴로운 시간”이라 했다. 또 “유희란 것이 아무 목적 없이 순수한 즐거움과 무엇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다분히 예술의 바탕과 상통된다고 보겠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헛된 노력’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현실적인 이해를 떠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희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없이는 예술의 진전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예술가로서 김종영의 삶은 동양과 서양을 혈연관통(豁然貫通)하여 진정한 ‘입어유법(入於有法) 출어무법(出於無法) 아용아법(我用我法)’한 것이었다.

“작품을 누구를 위해서 제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진실한 예술가라면
서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진실로 남을 위하려면 먼저 자신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표작 : 작품 65-4, 『도덕경道德經』 제78장, 자작自作-처세광회處世曠懷,]




<작가 연보>

1915.6.26     경남 창원에서 誠齋 김기호와 이정실의 오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1930~1935    17세 때 동아일보가 주최한 서예실기대회에서 1등을 한 김종영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이쾌대, 윤승욱 등과 함께 미술선생 장발의 지도를 받으며 미술가로서의 기초를 쌓았다.

1936~1943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졸업 후 연구과에 머물면서 제작에만 몰두

1948~198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역임하다. 반평생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바쳐 교수, 학장을 역임하면서 숱한 제자를 배출하는 한편 수도자의 자세로 창작에 매진하고, 국전의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등에 참여하여 그 운영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기다.

1953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국제공모전에 한국인 최초로 입상하다.

1958           포항에 《전몰학생기념탑》 세우다.

1959          중앙공보관에서 월전 장우성과의 2인전을 개최. 목조, 석조, 철조 등 여러 가지 재료로 표현된 작품들은 혼탁한 현대조각의 이정표라고 높이 평가됨.《전설》《여인입상》《자각상》《꿈》《생성》《프로필》《기념탑》등을 출품하다.

1963          파고다 공원에 《3․1독립선언기념탑》제작하다. 마닐라 동남아 국제전 및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작품 출품 하다.

1968~1969    유네스코 초청, 파리․로마 미술연구 및 시찰하다.

1975          신세계미술관에서 회갑기념 개인전이 개최되다. 김종영의 생애를 회고하는 뜻과 함께 다양한 재료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한결같이 양괴와 볼륨의 원리를 한 치도 우회하지 않고 진정 면으로 찾아 들어갔다. 

1979           예술원회원작품전이 경복궁에서 개최되다.

1980           국립현대미술관 초대로 본격적인 대 전람회를 가지다. 이 전람회는 김종영이 전 생애를 통하여 육체와 영혼으로 갈고 다듬은 거의 모든 조각 작품과 일부의 그림들로 이루어졌고, 그의 침묵과 사색을 통한 예술에의 통찰, 바로 그 예술정신이 이루어 놓은 일대장관이었다. 화집『김종영 작품집』을 문예원에서 출판하다.

1982           1년이라는 세월을 병고와 싸우다가 12월 15일 68세의 일기로 타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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