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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특별기획전: 조각가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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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시 명   2016 김종영미술관 특별기획전 <조각가의 아내>
■ 기      간   2016.8.5금- 11.16수 
■ 장      소   김종영미술관 본관 
■ 전시작품   김종영의 드로잉과 조각품
                           
■ 전시개요
이번 <조각가의 아내>展 에는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이 아내를 모델로 하여 제작한 조각품과 드로잉을 선보인다.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며, 이 작품들과 함께 아내 이효영 여사에게 보낸 편지를 처음으로 공개한다. 이를 통해 좀 더 생생하게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 ‘선비 조각가’로 알려진 김종영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껴볼 수 있으며, 그가 속깊이 품고 있었던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존경어린 표현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는 아내를 출발점으로 하여 점차 인체 형태탐구로 발전해 나간 작품세계를 편년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재현적인 드로잉에서 점차 단순화를 거쳐 추상화 되는 그의 인물 드로잉 연작들을 관람할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 전시작품내용 
남성과 여성이 소화할 수 있는 직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젠더의 장벽에도 큰 구분이 없어진 요즘 ‘내조자’라는 말의 의미가 여성의 일부 사회적 자유를 가두거나 복종을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통해 여성, 남성의 구분을 떠나 전통적으로 ‘내조자’의 위치가 한 예술가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해 볼 기회를 갖고자 한다. 특히, 그가 아내에게 쓴 편지를 살펴보면 ‘선비조각가’ 김종영처럼 한 평생 창작에만 헌신한 사람에게 ‘내조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영은 서울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것 외에 평생을 온전히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특히, 김종영은 평소 별다른 대외활동도 즐겨하지 않았으며 오롯이 작품만 제작하는 삶을 지내었다고 알려져 있다. “생전에 학교 와 집만을 오가시는 모습이 마치 시계추와 같았다”던 그의 셋째아들의 증언만 보아도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온 평생을 작업실에서 창작에만 집중하는 삶을 살았던 김종영이란 사람에게 가족과 아내와의 관계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였다고 판단해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아내는 창작활동의 내적뮤즈이자 한 조각가의 예술철학 생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혼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김종영의 추상조각이 아닌 그가 남긴 아내그림에 대하여 새로운 조망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김종영의 작품연구의 중요한 부분이자, 한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가족 특히, 묵묵히 그를 내조하고 존경했던 아내에 대한 찬사가 담긴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이번 <조각가의 아내> 전은 김종영 조각가가 남긴 아내를 모델로 한 <부인상>들, 평면작들과 함께 그가 생전에 보내었던 친필 편지와 사진자료들을 모아 편년으로 구성했다.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종영이 속 깊이 품고 있었던 아내에 대한 점잖은 사랑과 그의 아내 이효영 여사가 가지고 있었던 예술가 남편에 대한 존경어린 마음이다. 김종영은 아내를 모델로 수 많은 드로잉을 남기고 돌, 나무 등을 이용한 아내의 두상을 제작했다. 근, 현대 조각가 중에 김종영만큼 아내를 모델로 한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가 있을까 싶다. 많은 양의 작품 수는 그가 품었던 아내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과 비례할 것이며, 이것은 추후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동질화 되어 작품에 반영된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김종영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조각 작품에서는 시선을 압도하는 화려함이나 정교한 세공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의 말과 같이 ‘표현은 간략하면서도 내용은 풍부한’ 작품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종영 조각가가 작품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논리이자 예술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김종영 조각가가 생전에 아내를 대하는 태도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종영 조각가와 그의 아내에 대한 일화를 살펴보면, 김종영은 아내에 대한 화려한 사랑노래라던지 드라마틱한 사건을 남겼다기 보다는 늘 한발짝 물러나 있는 자세로 아내를 보살폈고 작업에 있어서 한터치씩 묵묵히 그녀를 모델로 작품을 제작했다. 예술가로서 최고의 사랑표현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 즉, 조각가로서 아내를 작품으로 남기는 행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를 통해서 경직된 우리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깊은 울림을 감상 할수 있기를 바라며, 조각가 김종영이 추상조각의 선구자의 자리에 서기 까지 얼마나 많은 아내의 노력과 믿음이 함께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 우성 김종영 소개  

“한국근현대조각의 선구자 김종영”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 1915-1982)은 1915년 6월 26일 경상남도 창원(昌原)에서 태어났다. 고향 창원에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장발선생의 안내로 조각의 길을 택하여 일본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1948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교수에 봉임, 1980년에 정년으로 퇴임하게 된다. 김종영은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서예와 그림을 익혔으며 1982년 12월 15일 향년 68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오랜 세월 교육자의 삶에 헌신을 다했다. 

김종영은 혼탁한 시대상황 속에서도 한국미술이 나아갈 바를 앞서 보며 고고한 창작의 발자취를 남겼다. 김종영은 6.25전쟁 중인 1953년 3월 영국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린 《무명정치수(無名政治囚)를 위한 기념비》란 제목의 국제조각공모전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입상하여 한국 미술계에 희망을 심어 주었다. 선비 작가로 유명한 김종영은 교육자, 국제적인 조형언어를 작품으로 표현해낸 조각가로 인정받고 있다. 1954년부터 철재, 청동, 목재, 석재와 같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추상조각의 길을 열었으며, 이후 채색조각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한국 조각의 선구자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또한 사리사욕에 관심이 없는 김종영은 단 두 개의 공공조각을 후대에 남겼다. 그가 작업한 공공조각으로는 서대문독립공원 내 <3.1독립선언기념탑>과 포항에 <포항전몰학도충혼탑>를 남겼으며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74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0년 <국가유공자사후대통령포상>과 <4.19 유공자건국포장>을 받았다.



조각가의 아내전을 기획하며

김종영미술관 학예연구사 오보영


우리는 흔히 가정을 위해 헌신한 아내를 ‘내조자’라고 부른다. ‘내조자’라는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남편을 잘 도와주는 아내라는 의미를 가진다. 현대에 들어 남성과 여성이 소화할 수 있는 직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젠더의 장벽에도 큰 구분이 없어진 이후 ‘내조자’라는 말의 의미가 여성의 일부 사회적 자유를 가두거나 복종을 뜻하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통해 여성, 남성의 구분을 떠나 전통적으로 ‘내조자’의 위치가 얼마나 큰 역할을 가지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기회를 갖고자 한다. 특히, 김종영 조각가처럼 한 평생 예술의 창작에만 일생을 헌신한 사람에게 아내의 존재 즉, 아내로서의 ‘내조’ 역할이 창작예술 과정에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영 조각가는 서울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것 외에 평생을 온전히 예술가로서 또 조각품을 창조하는 조각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특히, 김종영은 평소 별다른 대외활동도 즐겨하지 않았으며 오롯이 작품만 제작하는 삶을 지내었다고 잘 알려져 있다. 생전에 학교 와 집만을 오가시는 모습이 마치 시계추와 같았다던 그의 셋째아들 의 증언만 보아도 그의 생활모습이 어떠했는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온 평생을 작업실에서 창작에만 집중하는 삶을 살았던 김종영이란 사람에게 가족과 아내와의 관계는 그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였다고 판단해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아내는 창작활동의 내적뮤즈이자 한 조각가의 예술철학 생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혼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김종영의 추상조각이 아닌 그가 남긴 아내그림에 대하여 새로운 조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김종영의 작품연구의 중요한 부분이자, 한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가족 특히, 묵묵히 그를 내조하고 존경했던 아내에 대한 찬사가 담긴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이번 <조각가의 아내> 전은 김종영 조각가가 남긴 아내 조각, 평면작들과 함께 그가 생전에 보내었던 친필 편지와 사진자료들을 모아 서사적으로 구성했다.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종영 조각가가 속깊이 품고 있었던 아내에 대한 점잖은 사랑과 그의 아내 이효영 여사가 가지고 있었던 예술가 남편에 대한 존경어린 마음이다. 김종영 조각가는 아내를 모델로 많은 양의 드로잉을 남기고 돌, 나무 등을 이용한 아내의 두상 조각상을 제작했다. 근현대 조각가 중에 김종영 만큼 아내를 모델로 한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김종영은 많은 수의 드로잉과 부인상을 남겼다. 많은 양의 작품 수는 그가 품었던 아내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과 비례할 것이며, 이것은 추후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동질화 되어 작품에 반영된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김종영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그의 조각품에서는 시선을 압도하는 화려함이나 정교한 세공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작품은 오랜시간 두고보아야 드러나는 아름다움과 보편성에 기초한 미(美)의 실현이라는 철학적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김종영 조각가가 작품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논리이자 예술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김종영 조각가가 생전에 아내를 대하는 태도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종영 조각가와 그의 아내에 대한 일화를 살펴보면, 김종영은 아내에 대한 화려한 사랑노래라던지 드라마틱한 사건을 남겼다기 보다는 늘 한발짝 물러나 있는 자세로 아내를 보살폈고 작업에 있어서 한터치씩 묵묵히 그녀를 모델로 작품을 제작했다. 예술가로서 최고의 사랑표현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 즉, 조각가로서 아내를 작품으로 남기는 행위일 것이다. 다음 글은 작품제작에 모델이 되었던 기억에 대하여 그의 아내 이효영 여사가 구술하여 남긴 일화다.
모델도 많이 했는데 전신이 막 뒤틀려요. 가만히 있으라고 하거든요. “조금만”, “조금만”, “오옳지” 그러데요. 애기 다루듯이. 이 그림도 지금으로부터 사십사년 됐습니다. 우리 큰아이 아들아이가 마흔너인데 그 아이 가졌을 적에 그때 전신이 아퍼죽겄는데 모델서라고 “내 예쁘구러 그릴께” 그래놓고 그리셨지요. 여러장 있어요. 그래 늙어서도 “정년 퇴직하고 나면 모델 해줄래?” 해서 한다고 했는데 어쨰어쨰 정년 퇴직 하고 획 떠나셨어요 . 

“내 예쁘구러 그릴께”… 
앞에 아내를 모델로 앉혀놓고 아이 어르듯이 달래면서 드로잉하는 김종영 조각가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는 정년퇴직 후 노년이 되어서도 아내에게 모델을 부탁하는 애정어린 약속도 남긴다. 이 일화는 김종영이 아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소박한 사랑표현이기에 더욱 숭고하다.  

또한, 이번 전시에는 최초로 아내에게 보낸 김종영의 친필 편지가 공개된다. 대부분 본인의 상태나 가족의 안부를 전하거나 아내의 안위를 걱정하는 내용들이다. 특히1968년 유네스코의 초청을 받아 유럽으로 시찰을 나갔을 적 보내었던 편지는 그 시절 머나먼 타국에서 아내와 가족을 걱정하는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그리움과 애정이 한껏 담겨있다. 김종영의 편지 속에서 아내를 부르는 호칭은 늘 정혜엄마, 익태어멈, 병태어머니 등등이다. 

‘자녀들의 어머니, 엄마 혹은 어멈’ 이라는 호칭으로 쓰여진 편지의 첫머리를 읽다보면 이러한 표현이 요즘시대의 사람들에게 익숙치 않은 호칭이란 것을 느낀다. 아마 그것은 옛 시대 아버지이자 남편들의 수줍은 사랑표현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부부라는 관계는 가족이 아니라 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하다’ 라고 주례했던 유명 방송인의 글이 떠오른다. 

요즘 사람들은 그 말에 크게 호응했고 필자 또한 그것이 현실적이고 공감가는 말이라는 것이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사고 안에는 따뜻한 온기의 사람사는 맛은 느껴지지 않는 씁쓸함이 있다. 한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온전히 나의 가족, 나의 사람으로 보필하는 옛 시대 사람들의 인내와 사랑이 오히려 마음의 위안이 되어주는 시점이다. 그런 바, 김종영 선생의 편지 속의 아내를 부르는 호칭은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마치 너는 내 가족이자 내 분신과 같으니 걱정말라 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김종영과 그의 아내는 6.25사변을 함께 겪었고 피난길도 함께 하였다. 사변 이후 그들은 살던 서울의 돈암동 집을 떠나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1951년에 김종영은 그가 아꼈던 책과 살던 집을 살피고 오겠다는 이유로 서울의 돈암동을 다녀간다. 

피란 내려가서도 만날 걱정을 하시는거에요. 자기 책을 몬 잊어갖고. 책이 상했나, 멋이 알고 내갔나, 밤낮 걱정이라요. 옛날에 보통 사람 구하지 못하는 책 당신은 다 구해갖고 있었답니다. 좋은 책이 많았어요. 이래 쌌드만 -사월인갑습니다- 가짜로 군인이라고 멋을 하니 맹길었데요. 그리고 군복을 하나 사입어요. 도강증 하고 머 다 가지고 갔어요. 그래 가지고 가드만 보름이 돼도 소식이 없어요. 그래 잡혀갔는가 이랬어요.  

이효영 여사는 서울에 다녀온다던 남편이 보름이 넘어서도 소식이 없자 혹여 남편을 잃었을까 싶어 추위가 아직 풀리지 않았던 초봄에 홀로 서울행을 택한다. 그 혼란의 시기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대단한 용기였을 것이다. 

대구 쪽으로 가는 길이 좀 경사가 졌습디다. 그 길을 이래 보니까 버스들이 오는데 대구에서 내려오는 버스라고 그래요. 사람들헌테 물으니까. 퍼뜩 생각이 나. “서울서 오믄 대구로 오는데 혹시 저 버스를 안 탔이까?” 내 이래 앉았일 께 아니라고, 강가에 폭 덮어쓰고 앉았던 수건 을 벳깄어요. 벳기야 저짝 사람도 알아보겄다 싶어 추워도 탁 벳깄어요. 하나, 둘, 대구서 자꾸 버스가 와 섭디다. 그 버스도 나와 같이 마산으로 갈라문 강을 건네가야 하거든요. 사람들이 다들 내리오드만 밥 먹겄다고 그리루들 들어가데요.

내가 한 네대쯤 지나갔는데, 참 우리 양반 겉애, 내리오는 사람이. 군복 껄렁껄렁 입고, 키가 커단 사람이… 아차 싶어. 저 아무개 아부지 아인가 싶어서 그래 갔드니, 그 사람도 놀라 눈이 뚱그래지드니 “어데 가!” 요새 사람들이라믄 끌어안고 난리가 났을 거예요. 그래 만났어요. 당신은 버스에서 내리가 오는 길이고, 나는 올라가는 중이고. 말끝도 없이 “어데 가!” 아이고 나도 그만. “당신 찾아 안가요?” 모기 소리만치이카니께 “어데 가믄 찾는다고.” 거그서 만났어요. 눈물은 나데. 빙 돌믄 눈물은 나데. 거그서 만나 같이 내리와 가지고 점심 요기 하고. “차비가 아까워 우짤라고? 저 버스 타고 마저 갔다오지…” 그리고 날 또 놀려요. 그래 대답을 했는지 안했는지… 

“어데 가!” “당신 찾아 안가요?” 하며 상봉한 김종영 부부의 일화는 마치 이산가족의 상봉 현장이 이런 느낌일까 할 정도로 극적이다. 그 전쟁통에 혹여 서로를 잃어버릴까 찾아나선 낯선 곳에서 우연히 상봉한 두 사람은 그렇게 무뚝뚝한 한마디씩을 건네었지만 그 말은 어떤 드라마나 영화의 대사보다 애정 어리다. 

두 사람의 생활은 이러했다. 조각가인 남편은 아내를 그렸고 아내는 기꺼이 남편의 모델이 되어주고자 했다.  그리고 조각가인 남편이 온전히 예술가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아내는 기둥이 되어주었다. 김종영 조각가는 작품을 통해 어느 시대, 어느 곳에고 통하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려고 평생을 바쳤다. 이것은 마치 그가 품었던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에 대한 마음과 닮아있다.  유난스럽지 않았고 시대를 초월하는 그런 마음,  그런 시선들이 김종영의 조각을 만들었고 그렇게 아내를 대했다.

김종영이 연구한 인체형상 탐구에 대한 연결고리의 맥락에 서있는 그림으로써 아내작품을 관람하는 것 또한 이 전시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김종영이 남긴 아내를 모델로 한 드로잉과 조각들은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탐구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김종영 조각가가 부인 드로잉을 가장 많이 남긴 시기는 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후반까지 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드로잉을 살펴보면, 아내를 모델로하여 초상화에 가까운 인상을 기록하고자 한 흔적도 보이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부터 아내를 대상으로 그리던 그림이 점차 인체 형태 탐구로 발전해 나가는 연작들을 함께 확인해 볼 수 있다. 

또한, 부인그림 외에 김종영이 남긴 약 3000여점의 방대한 드로잉 작품 중 여인의 두상에서 시작된 형태탐구의 흔적을 담고 있는 작품이 상당수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가령, 4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먹으로 그려진 여인두상 드로잉 연작 3점을 보면 구체적 형태탐구에서 추상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변화된 발전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여인의 두상 탐구가 그의 추상조각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김종영을 대표하는 작품은 추상 조각이다. 그의 드로잉은 그가 추구한 추상 세계에 대한 탐구의 과정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김종영은 아내를 항상 옆에 두고 그의 드로잉과 조각 세계를 탐구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가 남긴 아내에 대한 드로잉은 초기 구체적인 형상을 표현하는데서 시작해 추상화되는 드로잉의 습자 모델로서 탄생되었던 것이다. 

김종영은 평생을 예술 속에서 살았다. 아마 그의 아내는 예술 속에서 산 남편을 일상의 생활과 연결해주었던 중요한 창구였을 것이다. 글머리에 언급했던 ‘내조’의 역할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한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 과정에는 본인의 피나는 연구와 노력이 바탕이 되지만 그 옆을 지켜주는 아내의 인내와 존경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종영의 조각은 구상단계에서부터 작품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단단한 기초와 논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항상 시대를 초월한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한 성향은 작품활동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작업관과 생활관은 동일한 방향을 향해 서 있다. 마치 아내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이 그의 작품과 닮아 있는 것과 같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김종영의 아내 이효영 여사가 남긴 말을 다시금 되뇌인다. 부부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한 조각가의 아내라는 위치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바이다.

우리네 부부라는 기 그런거예요. 은연중에 마 그릏게 살아나왔어요. 난 사랑 받을라고는 생각 안허고, 내 사랑 다 내줬어요. 내 있는 대로, 내 나름대로. 그래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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