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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문화전 4부 : 매.난.국.죽. - 선비의 향기

  • 전시분류

    유물

  • 전시기간

    2015-06-04 ~ 2015-08-30

  • 참여작가

    탄은 이정,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외

  • 전시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

  • 유/무료

    유료

  • 문의처

    070-7774-2524

  • 홈페이지

    http://www.ddp.or.kr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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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송문화전 4부 : 매, 난, 국, 죽 _ 선비의 향기 >>

「 국난 극복을 위한 군자의 기상이 담긴 삼청첩(三淸帖), 최초 전면 공개 」
 - 탄은 이정, 비단에 금빛 수를 그려내다 -



□ 간송미술문화재단에서는 <1부 : 간송 전형필>, <2부 : 보화각>, <3부 : 진경산수화>에 이어 <간송문화전 4부 : 매,난,국,죽_선비의 향기> 전시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에서 2015년 6월 4일부터 8월 30일 까지 진행합니다. 

□ <간송문화전 4부 : 매,난,국,죽_선비의 향기>에서는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의 <삼청첩(三淸帖)>이 최초로 일반에게 전면 공개됩니다. <삼청첩>은 조선중기 문예의 정수로 불릴만한 화첩으로써, 대나무와 매화, 난을 그리고 자작시와 함께 엮은 시화첩입니다. 

ㅇ <삼청첩>은 검은 비단에 금니(金泥)로 그린 탄은의 그림 뿐 아니라, 간이 최립, 석봉 한호, 오산 차천로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시문과 글씨가 함께 실려 있어 조선중기 선비 문화의 역량과 성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ㅇ <삼청첩>의 또 다른 가치는 당대에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관련 기록들이 풍부하게 남아있어 제작 당시의 상황과 현재 이르기까지 전래 과정이 비교적 소상히 밝혀져 있습니다. 단순한 예술작품을 넘어 역사상을 내포한 문화사적 사료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 <삼청첩>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침탈로 이어지는 조선 역사의 굴곡과 극복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ㅇ <삼청첩>은 세종대왕의 고손인 탄은 이정이 임진왜란 때 심각한 부상을 입어 다시는 붓을 들지 못할 뻔 했지만, 강인한 의지로 이겨내고 만들어낸 필생의 역작입니다. 전란 중임에도 최고가의 재료인 먹물을 들인 비단에 금으로 대나무와 매화, 난을 그림으로써 국난을 맞아 군자의 기상이 담긴 그림을 통해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하였습니다.

ㅇ 그 후, <삼청첩>은 선조의 부마인 영안위 홍주원에게 건네졌고, 병자호란 때에 화마를 입어 소실될 위기를 겪습니다. 불에 탄 흔적은 지금까지도 역력히 남아있습니다. 이후 병자호란이 끝나고 홍주원의 후손들에 의해 7대를 이어가며 가보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조선말기 외세침탈의 와중에 일진함 함장으로 온 쯔보이코우소에게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 다행히 간송이 이를 되찾아 왔고, 이 화첩이 최초로 이번 전시를 통해 전면 전면 공개됩니다.

□ <간송문화전 4부 : 매,난,국,죽_선비의 향기>에서는 탄은 이정의 <삼청첩> 이외에도 추사 김정희,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등 31명 작가가 그린 100여점의 작품을 교체 전시로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기존과 다르게 영상물 및 체험공간을 준비함으로써,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 2015년 9월 부터 진행될 예정인 <간송문화전 5부 : 화훼영모(전시명 미정)>의 주제는 꽃과 풀, 새와 짐승을 그려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소재의 특성상 우리가 가장 쉽고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는 주제입니다. 간송문화전은 2017년 3월 까지 다양한 주제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한기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에 추위를 무릅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청초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주위를 맑게 하는 난초, 모든 꽃들이 시들어 가는 늦가을에 모진 서리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국화, 칼날 같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옛 문인들은 이들의 생태와 특성을 보고 군자를 떠올렸다. 군자에 비유되며 시문과 그림으로 사랑받던 이 네 가지 식물들이 17세기 이후에는 ‘사군자(四君子)’라는 이름으로 함께 불리기 시작했다. 그 명확한 이유와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사계절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봄-난초, 여름-대나무, 가을-국화, 겨울-매화로 설정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봄-매화, 여름-난초. 가을-국화, 겨울-대나무로 계절과의 조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계절 감각에 따라 변화를 준 것으로 보인다. 군자의 상징성을 지닌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는 오랫동안 문학과 예술의 핵심적인 소재로 사랑받았다. 특히 사군자 그림은 조형성과 미감에서 동양화의 특징과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이다.




1. 사군자(四君子)란 무엇인가?
한기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에 추위를 무릅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청초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주위를 맑게 하는 난초, 모든 꽃들이 시들어 가는 늦가을에 모진 서리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국화, 칼날 같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옛 문인들은 이들의 생태와 특성을 보고 군자를 떠올렸다. 

군자에 비유되며 시문과 그림으로 사랑받던 이 네 가지 식물들이 17세기 이후에는 ‘사군자(四君子)’라는 이름으로 함께 불리기 시작했다. 그 명확한 이유와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사계절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봄-난초, 여름-대나무, 가을-국화, 겨울-매화로 설정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봄-매화, 여름-난초. 가을-국화, 겨울-대나무로 계절과의 조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계절 감각에 따라 변화를 준 것으로 보인다.

군자의 상징성을 지닌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는 오랫동안 문학과 예술의 핵심적인 소재로 사랑받았다. 특히 사군자 그림은 조형성과 미감에서 동양화의 특징과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이다.

2. 사군자를 사랑한 문인들
사군자는 특히 문인들에 의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중국 전국시대의 초나라 문인 굴원(屈原,기원전 343-278)은 임금에게 자신의 충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가 죽기 전 자신의 절개와 충성심을 표현했던 것이 바로 난초였다.

중국 동진의 서예가 왕휘지(王徽之)는 “이 사람(此君)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겠는가?”라며 대나무를 친구로 여기며 사랑했던 인물이다. 대나무 없는 곳에서는 잠도 잘 수 없어서 거처하는 곳에 대나무가 없으면 반드시 옮겨 심은 다음에야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고 한다.

국화를 사랑했던 대표적 인물은 귀거래(歸去來)의 주인공 도연명(陶淵明)이다. 조정의 관직과 복잡한 세상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도연명이 담장에 핀 국화를 꺾어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던 일은 수많은 문인들에게 은일의 상징으로 사랑받았다.

간밤의 빗소리에 떨어질 꽃잎을 걱정했던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은 해마다 이른 봄이 되면 나귀를 타고 아직 눈 녹지 않은 산속으로 매화를 찾아다녔다. 송나라 문인 임포(林逋)는 서호(西湖)에 은거한 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집 주변에 삼백여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기르며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아 평생을 지냈다. 

사군자를 사랑했던 역대 문인들의 이러한 이야기(story)들은 훗날 문인화가 발전하는 북송대에 이르러 중요한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3. 사군자를 그리다
화훼화(花卉畵: 꽃그림)의 일원으로 그려지던 사군자는 북송대에 이르면 문인화의 대표적인 주제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대문호 소식(蘇軾)을 비롯한 북송대 문인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기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하며 그림에 내포된 의미와 상징을 중시하는 문인화의 이론을 마련했다. 그림의 본질은 대상의 외형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내면세계 또는 화가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군자의 상징성을 지닌 사군자는 문인들이 자신의 생각과 삶을 그림으로 표현할 때 가장 유용한 소재였다. 특히 문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글씨의 필획과 사군자를 그리는 필획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더욱 문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사군자는 화려한 채색을 사용하는 것 보다는 먹으로만 그리는 수묵화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묵매, 묵란, 묵국, 묵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내용과 기법에서 모두 문인들에게 가장 적합했던 사군자는 문인화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4. 조선시대의 사군자 그림
4.1 국법으로 정한 1등 그림
고려 중기 이후 문인 귀족들에 의해 그려지던 사군자는 조선시대 더욱 크게 유행했다. 화원(畵員)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산수나 인물화 보다 대나무 그림이 더 중시 되었을 정도였다. 세종대왕과 문종(文宗), 안평대군의 3부자가 모두 난초와 대나무 그림에 탁월했고, 당대를 대표하는 화원화가인 안견(安堅)과 사대부 화가 강희안(姜希顏) 역시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다만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그 기량과 품격, 특징들을 확인할 수 없다. 몇몇 기록들을 통해 북송대 문인화풍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전통, 고려말 유입된 원나라의 문인화풍, 사행(使行) 등을 통해 접하게 된 최신의 명나라 문인화풍이 공존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4.2 조선의 모습으로 그려진 사군자
우리나라 사군자 그림의 전형은 조선중기에 확립되었다. 신숙주의 증손 신잠(申潛)은 대나무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고, 신사임당(申師任堂)은 화조화 뿐만 아니라 대나무 그림 역시 매우 잘 그렸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묵죽화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이정(李霆)은 굳세고 탄력 있는 필치와 독특한 화면 구성으로 조선 묵죽화의 전형을 이룩했고, 어몽룡(魚夢龍)은 간결한 구도와 담백한 필치로 조선 묵매화의 기틀을 확립했다. 이후 이정의 외손자인 김세록(金世祿) 등이 이정의 묵죽화풍을 계승하였지만 한계를 보였고, 조속(趙涑)과 그의 아들 조지운(趙之耘)이 어몽룡의 묵매화풍을 계승하며 세련미를 더했다. 

4.3 문사의 아취와 시인의 풍류가 깃든 사군자 그림
조선후기에는 다양한 사군자 그림들이 그려졌다. 유덕장(柳德章)은 이정의 묵죽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여유롭고 윤택한 필치로 자연스러움을 배가시켰다. 조선후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심사정과 강세황에 의해 중국의 화보(畫譜)를 바탕으로 하는 사군자 그림들이 유행했다. 심사정은 회화성을 중시했고, 강세황은 문인 취향의 우아함을 강조하며 명나라 문인화풍의 영향을 반영한 사군자를 그렸다.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도(金弘道)는 사군자를 통해 시정과 흥취를 담아내며 서정성이 풍부한 작품을 다수 남겼고, 역관 출신 임희지(林熙之)는 거칠고 분방한 필치로 표현성이 강한 난죽화를 주로 그렸다.   

4.4 서화일치의 품격과 망국대부의 자화상
사실성을 중시했던 조선후기 화단의 풍토 속에서 다소 침체되었던 사군자 그림은 조선말기에 들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는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그의 문도들이 있었다. 김정희는 그림에서 절제된 이념미와 서예적 필치를 강조했는데 묵란을 통해 그의 창작 이론을 실체적으로 구현해 보였다. 추사를 추종했던 조희룡(趙熙龍)은 추사의 묵란을 흡사하게 구사했지만, 매화와 대나무 그림에서는 자유분방한 필묵의 기교로 강렬한 시각적 감흥을 이끌어내며 추사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반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왕실의 엄중한 풍모와 당당한 기개를 바탕으로 스승인 추사의 묵란화를 계승하여 ‘석파란(石坡蘭)’이라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이룩했다. 가학(家學)을 통해 추사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계승한 민영익(閔泳翊)은 중국 상해에 망명하여 살면서 나라를 잃은 망국대부의 울분을 난죽화로 승화시켰다.



* 탄은(灘隱) 이정(李霆) 과 삼청첩(三淸帖)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은 세종대왕의 고손으로 태어난 왕실출신 문인이다. 그는 30대부터 묵죽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칼을 맞아 팔이 잘려나갈 뻔한 고초를 겪게 된다. 자칫 그림을 다시는 그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그러나 탄은은 강인한 의지로 이를 이겨내고, 후대에 길이 남을 필생의 역작을 기획한다. 자신의 건재함을 만방에 알리고, 국난을 맞아 군자의 기상이 담은 그림을 그려 사기(士氣)를 진작시키려는 의도였던 듯하다. 그는 칼에 맞선 붓의 힘을 믿었고, 문예로 전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전란 중임에도 최고가의 재료인 먹물을 들인 비단에 금으로 대나무와 매화, 난을 그렸다. 그리고 우국충절을 담은 자작시를 함께 엮어 시화첩(詩畵帖)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바로 ≪삼청첩≫이다. 

탄은의 뜻에 공감한 많은 지우(知友)들이 동참한다.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과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6)에게 서문(序文)과 글씨를 맡았고,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시를 지어 찬탄했다. 모두 당대 문예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 인물들이다. 《삼청첩》은 당시 문인묵객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유근(柳根,1549-1627), 이안눌(李安訥,1571-1637), 유몽인(柳夢寅, 1559-1623) 등과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앞 다투어 글을 보태니, ≪삼청첩≫의 성가는 더욱 높아져 갔다. 그야말로 ‘일대교유지사(一代交遊之士)’가 동참하여 만들어낸 ‘일세지보(一世之寶)’였던 것이다. 

이처럼 ≪삼청첩≫은 탄은 개인의 작품을 넘어 당대 최고의 성가를 지닌 시서화의 대가들이 예술적 성취가 한 자리에 모인 종합예술품이며, 조선중기 문예의 지향과 역량이 집약된 기념비적 작품이다. ≪삼청첩≫을 조선중기 문예의 정화로 부르는 까닭이다.  

≪삼청첩≫은 이후 선조의 부마인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1606-1672)에게 건네졌고,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때에 소실될 위기를 겪는다. 현재까지도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호란이 끝나고 홍주원은 선조의 또 다른 부마였던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1582-1657)의 도움으로 훼손된 일부 제발문(題跋文)들을 복원하였고, 이후 홍주원의 후손들에 의해 7대를 이어가며 가보로 전해진다. 

그러나 ≪삼청첩≫은 조선말기 외세침탈의 와중에서 일진함(日進艦) 함장으로 조선에 온 쯔보이코우소(坪井航三, 1843-1898)에게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다행히도 일제시기 심혈을 기울여 우리 문화재를 수호했던 간송이 이를 되찾아 왔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수장되어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삼청첩≫은 중요한 시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시대를 초월하여 자긍과 자부의 상징물로 오래도록 전해져 왔다.  

탄은 이정은 조선 묵죽화풍을 정립한 한국회화사상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는다. ≪삼청첩≫ 은 현전하는 탄은 작품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조선묵죽화풍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 묵죽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삼청첩≫의 가치와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삼청첩≫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침탈로 이어지는 조선 역사의 굴곡과 극복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삼청첩≫은 미술품이 미적가치와 더불어 사료적 가치를 얼마나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삼청첩≫을통해 우리 문화재의 본질을 재인식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주요작품 | < 탄은 이정 >《삼청첩(三淸帖)》등 , < 현재 심사정 > 매월만정 등, < 단원 김홍도 > 백매 등. 약 100점





고죽(枯竹: 마른 대나무) 이정(李霆, 1554-1626) 흑견금니 25.5×39.3cm 《삼청첩(三淸帖)》
탄은(灘隱) 이정(李霆)은 세종대왕의 고손으로 태어난 왕실출신 문인화가입니다. 30대부터 묵죽화로 명성을 떨쳤으나,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을 맞아 팔에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시련을 강인한 의지로 극복하고 필생의 역작을 남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청첩(三淸帖)》입니다. 《삼청첩》은 41세가 되던 1594년 12월 12일에 별서가 있던 충남 공주의 월선정(月先亭)에서 대나무 그림 12면, 대나무과 난이 어우러진 진 그림 1면, 매화 그림 4면, 난 그림 3면을 그린 뒤, 21수의 자작시를 덧붙여 꾸며낸 일종의 시화첩(詩畵帖)입니다. 

《삼청첩》의 그림들 중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마른 댓가지가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향하며 화면을 양분하는 대각선 구도에 아래에서 윗쪽으로 늘씬하게 뽑아낸 대 줄기가 상승감을 고조시킵니다. 앙상한 큰 줄기는 물론 작은 줄기들의 묘사도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습니다. 또한 수묵이 아닌 금니로 그려 효과는 반감되었지만, 마른 붓질로 드러낸 비백(飛白)은 고죽이 주는 소산한 느낌을 배가시킵니다. 다가올 겨울을 견뎌내기 위해 잎을 떨궈낸 마른 대나무를 지칭하는 고죽의 형상과 느낌이 실감나게 전해집니다
화면 왼쪽 상단에는 관서(款書)가 있어 이정이 41세가 되던 해인 1594년 12월에 충청도 공주에서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옆으로는 5방의 인장이 찍혀있는데, 그 내용은 ‘탄은(灘隱)’? ‘석양정정(石陽正霆)’ ?‘중섭(仲燮)’으로 모두 이정의 호(號)? 봉호(封號)? 자(字)를 새긴 것입니다. 나머지 2방의 인문은 ‘의속(醫俗)’과 ‘수분운격(水分雲隔)’입니다. ‘의속’은 속된 것을 고친다는 의미로 동파(東坡) 소식(蘇軾, 1037-1101)이 ?녹균헌(綠筠軒)?이란 글에서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위게 하고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 사람이 여위면 오히려 살찌울 수 있으나, 선비가 속되면 그 병은 고칠 수 없다.(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라는 내용을 축약했습니다. 물이 나누고 구름이 막는다는 의미인 ‘수분운격’은 두보의 시 ?취증설도봉(醉贈薛道封)?중 한 구절입니다. 자연을 벗 삼아 은일하며 지내는 자신의 생활모습을 집약한 내용입니다.




풍죽(風竹: 바람에 맞선 대) 이정(李霆, 1554-1626)  견본수묵 127.5×71.5cm 
한국회화사상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는 이정의 묵죽 중에서도 백미로 꼽힐만한 작품입니다. 비록 기년(記年)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정 묵죽화의 특장이 원숙하게 베풀어져 있어 만년기에 쳐낸 것으로 보입니다. 역대 제일의 묵죽화가가 그려낸 최고의 수작이니, 우리나라 최고의 묵죽화라 하여도 지나친 찬사가 아닐 것입니다. 

거친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대나무 네 그루가 휘몰아치는 강풍을 맞고 있습니다. 뒤쪽 세 그루 대는 이내 찢게 나갈 듯 요동치지만, 전면의 한 복판에 자리한 한 그루의 대나무는 댓잎만 나부낄 뿐 튼실한 줄기는 탄력있게 휘어지며 바람에 당당히 맞서고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입니다. 그림자처럼 옅은 먹으로 처리한 후면의 대나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거센 바람의 강도를 느끼게 하는 한편, 주인공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조연들입니다. 바위나 흙의 간결한 묘사도 다소 투박하고 서툴게 보일지 모르지만, 대나무에 시선을 모아 집중도를 흩트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화폭 전체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정중동(靜中動)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을 받을 만큼 엄정하고 강렬하여 숨이 멎을 듯합니다.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껴집니다.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풍죽 본래의 의미와 미감을 이만큼 잘 살려낸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정이 이 같은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요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천부의 자질과 부단한 수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왕손이자 조선의 선비로서 흐트러짐 없이 격변의 시대를 당당하게 걸어갔던 올곧은 삶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정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칼을 맞아 팔이 잘려 나갈 뻔한 시련을 겪었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풍죽>에서 흐르는 고고함과 강인함은 그저 붓끝의 기교로만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묵매(墨梅) 어몽룡(魚夢龍, 1566-1617) 견본수묵 20.3×13.5cm
어몽룡(魚夢龍)은 매화 그림의 대가로 포도의 황집중, 대나무의 이정과 더불어 조선중기 문인화 삼절(三絶)로 꼽힙니다. 늙은 둥치에서 하늘을 찌를 듯 힘차게 벋어 올라간 가지와 둥근 달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월매도>는 어몽룡의 대표작으로 조선중기 묵매화에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월매도>의 직립식 구도와는 달리 화면 좌측하단에서 우측 상단에 걸쳐 주간(主幹)을 배치한 대각선 구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습윤한 필치의 담묵 위주로 묘사된 매화가지와 적극적으로 표현된 꽃의 양태도 강인하고 청신한 가지를 통해 매화의 절개와 지조를 표출하고자 했던 <월매도>의 표현 양식과는 다소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담묵으로 정갈하게 묘사한 가지, 윤곽선이 없는 몰골법으로 묘사한 꽃의 형태, 농묵으로 간결하게 처리한 꽃술과 꽃받침 표현 등은 어몽룡 묵매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강직한 절조보다는 고아한 정취를 강조한 느낌입니다. 원대(元代) 매화니(梅花尼)의 시를 옮겨온 ‘종일 봄을 찾았으나 봄을 보지 못하고, 짚신 신고 고갯마루 구름만 밟고 다녔다. 돌아와 웃고 있자니 매화향기 풍겨오고, 봄은 가지 끝에 이미 가득 와 있네.(終日尋春不見春, 芒鞋踏破嶺頭雲. 歸來?撚梅花嗅, 春在枝頭已十分.)’ 라는 제시(題詩)에는 이런 매화가 더 잘 어울릴 듯합니다.


설죽(雪竹: 눈 맞은 대) 유덕장(柳德章, 1675~1756), 지본채색, 139.7×92.0cm
팔순을 일년 앞둔 묵죽 대가의 득의작입니다. 이 그림은 채색 설죽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대 그림에서 드문 경우입니다. 한겨울의 눈 쌓인 푸른 대나무는 추운 시기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의 생태를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초록 염료를 사용하여 착색 설죽을 탁월하게 그려냈습니다. 

독폭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화폭이 가로로 넓어졌기 때문에 구성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8폭 중 하나로 제작되던 설죽과는 달리 왼쪽에 두 그루의 대를 더 배치하였습니다. 아울러 2개의 큼직한 바위로 두 무리의 대나무를 받치게 하였고 바위 아래의 눈 덮인 땅에는 풀 한포기를 더 그려 넣어서 여백을 채우는 동시에 오른쪽 풀과 어울리게 하였습니다. 초록의 대도 먹으로만 그릴 때처럼 농담을 달리하여 뒤의 대와 앞의 대를 구분하였고 눈 쌓인 댓잎의 표현도 이전의 어느 설죽보다도 더 자연스럽습니다. 댓잎들도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원숙한 솜씨로 쳐내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생기가 흘러 달관의 경지가 느껴집니다. 

눈 쌓인 바위는 윤곽선만 엷은 먹선으로 긋고 바위 표면은 비워두어서 눈 덮인 바위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설죽이나 연죽과 함께 자주 그려지는 풀들의 잎도 부드럽게 휘면서 눈을 이고 있습니다. 눈 쌓인 대밭의 정경을 여유와 생기를 담아 그렸는데 평생을 대 그림에 바친 노대가가 모든 역량을 집약하여 조선 대 그림의 손꼽히는 절품(絶品)을 만들었습니다. 




매월만정(梅月滿庭: 매화와 달이 뜰에 가득하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지본수묵, 27.5×47.1cm

이<매월만정>은 조선중기 묵매화와 같이 올곧고 근엄하지도 않을 뿐더러 온축된 기세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엄청난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빠른 붓질로 기괴하게 꺾이고 뒤틀린 가지와 툭툭 던지듯 찍어낸 몰골(沒骨)의 꽃들이 있을 뿐입니다. 대기를 암시하는 오묘한 담묵의 번짐과 이지러진 달의 모양에서 촉촉하고 흥건한 정취와 감흥이 흠씬 묻어납니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던 강직한 지사(志士)의 모습을 닮은 조선중기의 매화도와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묵매화에 대한 미적 지향이 변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담하고 거친 필치로 묘사한 매화의 가지와 줄기는 조선 중기 묵매화에서 보았던 강인함이 남아있어 온아하고 평담한 의취를 중시했던 중국의 명나라 문인들이 즐겨 그리던 묵매화와는 다소 차이가 납니다. 명대 오파계 문인화풍을 추구하면서도 강경하고 명징한 조선적인 미감을 절충시킨 심사정 회화의 전반적인 특징을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석죽(石竹: 돌과 대)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지본수묵, 30.0×44.6cm

강세황이 묵죽에 쏟은 관심과 열정은 남달랐습니다. 강세황은 만년에 ‘노죽(露竹)’이라는 호를 즐겨 썼고, 현전하는 노년기 작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묵죽입니다. 그런 점에서 묵죽은 강세황의 만년기 회화 세계를 대표하는 분야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석죽>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통활한 공간감을 중시하는 여유로운 화면 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세황은 “매화와 대나무를 그리는 데는 비어있는 듯하고 시원한 느낌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할 만큼 여유롭고 상쾌한 구성을 중시했습니다. 담박하고 소략한 공간 구성은 이런 강세황의 지론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윗부분이 잘린 듯한 형태의 전면의 대나무도 다소 특이하게 보이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화면 밖으로 유도하며 풍부한 공간감을 연출하는 데 한 몫하고 있습니다.   

다소 엉성해 보일 정도로 여유로운 구성과는 달리, 대나무와 바위의 필치는 유려하면서도 엄정합니다. 우아한 정취를 중시하는 남종문인화풍의 토대 위에 조선 전통 화풍이 지니고 있는 굳센 미감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외적으로는 유연하지만 내적으로는 강경한 외유내강의 미감은 강세황 예술 세계의 핵심적 조형감각입니다. 이 <석죽>에서도 유감없이 잘 발휘되어 있습니다.
 


백매(白梅)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지본담채, 80.2×51.3cm

<백매>는 이런 김홍도 사군자 그림의 특징과 지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특유의 주춤거리는 듯 출렁이는 필선과 부드러운 선염으로 등걸과 마들가리를 그리고, 그 위에 수줍게 맺혀 있는 꽃봉오리를 소담하게 베풀어 놓고 있다. 통렬하고 강경한 기세를 담아냈던 조선 중기 묵매화풍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심사정이나 강세황으로 대별되는 조선후기 남종문인화풍의 고아하고 유연한 문기(文氣)와도 분명한 간극이 있다. 

김홍도는 매화를 통해 강인한 기세를 보여주고자 한 것도 아니었으며, 고아한 품격을 보여주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매화에서 올곧은 선비의 절조보다는 시인의 풍류를 찾고 싶었던 듯하다. 그러니 가슴속의 시정과 흥취를 감각의 흐름에 따라 붓 끝에 실어 담아내면 그뿐이었다.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 어렵게 받은 그림 값을 다 들여 매화음(梅花飮; 매화를 즐기며 마시는 술)을 즐겼다던 김홍도에게는 결연하고 기세등등한 매화보다는 이처럼 소탈하고 정감 있는 매화가 훨씬 마음에 끌렸을 것이다.

 
풍죽(風竹: 바람 맞은 대) 임희지(林熙之, 1765~?), 지본수묵, 108.0×53.6cm

수월헌(水月軒) 임희지(林熙之)는 역관(譯官) 출신으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여항화가(閭巷畵家) 중 한명입니다. 난죽을 잘했는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임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나무는 강세황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했고 난초는 강세황보다 뛰어났다” 조선후기 최고의 난죽 대가로 명성을 떨쳤던 강세황보다 임희지가 더 낫다는 평가입니다. 
 〈풍죽〉은 임희지의 개성이 한층 두드러진 작품입니다. 중앙하단에서 시작된 두 줄기의 대는 곧 쓰러질 듯이 누워있고, 잔가지와 댓잎들은 강풍에 흩어져버릴 듯 날리고 있습니다. 이정이나 유덕장의 풍죽이 바람을 견뎌내는 강고함을 강조하고 있다면, 이 〈풍죽〉은 세찬 바람의 기세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 곳곳에서 엿보이는 과장된 묘사에서 바람은 단지 화가의 표현 욕구를 한껏 분출시키기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거침없이 화흥(畵興)을 분출시키는 임희지의 작화태도는 분명 조선중기 이정의 묵죽화는 물론이거니와 바로 전대의 강세황의 묵죽화풍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던 당시 청대묵죽화풍의 영향에서 그 일차적인 원인을 찾아야 할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풍죽〉은 조선후기에서 말기로 이행하는 시기의 묵죽화풍 변화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청죽(晴竹: 맑은 날의 대) 신위(申緯, 1769〜1847), 지본수묵, 118.0×62.0cm

신위는 10세 무렵부터 시서화 삼절로 불릴 만큼 천부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입니다. 그래서 청년기인 정조대부터 이미 세간에 예명(藝名)이 오르내렸는데, 그중에서도 묵죽은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일컬어질 만큼 명성이 높았습니다. 신위의 초년시절 묵죽화 수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스승 강세황이었습니다. 14세의 연소한 나이에 70세의 강세황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신위는 강세황을 조선왕조 400년 동안 수묵 사생을 제대로 한 유일한 인물로 상찬하고, 죽석에 대해서만 배운 것이 한이라고 회고하고 있을 만큼 강세황을 존숭하였습니다. 이에 신위의 묵죽화에 강세황의 자취가 짙게 드리워진 작품이 적지 않은데, 예보(禮甫)라는 자(字)를 가진 인물을 위해 그려 준 묵죽도 그중 하나입니다. 

길고 가는 죽간을 V자 형태로 벌려 공간을 분할한 화면 구성, 피마준을 위주로 하고 몇 개의 태점으로 처리한 바위 형태 등에서 강세황 묵죽화와 유사성이 감지되며, 윤택한 필치로 엄정하게 묘사한 댓잎의 양태와 바위 묘사도 강세황 노년기 묵죽화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댓잎의 묘사는 강세황보다 더 한층 날카롭고 강인하며 기세가 충만합니다. 오히려 강세황보다는 이정, 유덕장 계열의 묵죽화풍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신위가 단지 스승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대 묵죽화풍의 장처를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이처럼 신위는 조선 묵죽화의 전개에서 심사정, 강세황에 의해 시도되던 남종문인화풍 묵죽화 양식의 완성도를 높였고 동시에 청대묵죽화풍을 새로이 수용하여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이는 조선후기 묵죽화풍의 종언이자, 조선 말기 묵죽화풍의 선구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신위를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평가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국향군자(國香君子: 국향이고 군자이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지본수묵, 22.9×27.0cm, 《난맹첩(蘭盟帖)》

“이는 국향이고 군자이다. (此國香也,  君子也. )”
국향 즉 나라를 대표할만한 향기라는 것은 난의 별호(別號)다. 군자라는 것도 역시 난초의 별칭이다. 그런데 난초 한 포기를 화면 한 가운데 단조롭게 그려 놓고 이런 제사를 붙여 놓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난의 본질만 단순하게 표현해 놓고 나서 이것이 ‘국향이나 군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난이다.’라고 간단명료하게 써 놓은 것이다. 참으로 대담한 발상의 화면 구성법이다.

중앙에서 솟아난 성긴 난초 잎새들 속에서 두 잎이 대각으로 교차하며 거침없이 좌우로 벋어나가서 화면을 압도하니 그 기백은 가히 고고한 군자의 기상과 같다 하겠다. 그 둘레에 꽃대를 솟구쳐 내고 꽃잎을 활짝 피워 내어 향기를 토해 내고 있는 꽃의 오연(傲然)한 자태는 국향의 모습 그대로이다. 제사(題辭) 뒤 끝에는 ‘정희(正喜)’라는 붉은 글씨의 작은 인장이 찍혀 있고 왼쪽 화면 끝 부분 중앙에는 ‘백정암(百鼎庵)’이라는 별호인이 찍혀 있다.

 


홍매(紅梅) 조희룡(趙熙龍, 1789~1866), 지본담채, 133.0×53.0cm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추사를 충실히 계승하여 난 그림에 일품의 경지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추사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벗어나는 중년 이후부터 자신의 세계를 구체화하기 시작하여 중년 이후 매화도와 묵죽화를 많이 그리게 됩니다. 감성을 절제하며 고아하고 담박한 문인적 품격을 일필로 담아내야 하는 난 그림보다는 비교적 형상성이 강한 매화나 대 그림이 상대적으로 조희룡이 중시했던 시각적인 감흥과 흥취를 구현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아래쪽에서 벋어 올라간 큰 줄기가 꺾이며 곁가지를 내고 다시 한번 꺾이며 곁가지와 방향을 나란히 하다가 또 한번 꺾어 방향을 바꾼 삼절의 기본 구도입니다. 주된 가지의 굴절로만 구성하는 단조로움을 피해 일부의 겹침과 중간 꺾임을 곁가지에서 다시 벋은 작은 꽃가지로 덮는 변화를 주었습니다. 굵고 가는 가지의 배치, 화면 중앙에 집중된 꽃무더기와 위아래의 공간적 여유, 의도된 가지 절단과 적절한 꽃의 배합 등이 고매의 은은한 품성과 분홍꽃의 자유로운 감흥을 동시에 살려 새로운 감성으로 살아난 작품입니다.

 
자황양국(紫黃兩菊: 보라색과 황색 두 국화) 김수철(金秀哲, 1800경~?), 지본담채, 33.0×45.0cm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은 조희룡, 허유와 더불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였던 추사의 그림 제자 중 한명입니다. 김수철의 화풍은 경물의 대담한 생략, 간일(簡逸)한 필치, 감각적인 채색 등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다른 예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파격적이며 이색적인 것이었습니다. 

국화와 괴석이 어우러진 모습을 그린 이 작품도 김수철의 회화 세계의 특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대체적인 윤곽만 윤묵(潤墨)의 매끈한 필치로 잡아낸 후, 담담하고 흥건한 붓질로 색을 올렸습니다. 조금 거친 듯하지만 활달하고 산뜻한 김수철 화훼화의 장처와 특성이 온전히 베풀어져 있습니다. 

경물의 포치 또한 엉성한 듯하지만, 전체적인 균형을 고려하여 잘 짜여져 있습니다. 만개한 노란 국화와 봉우리를 맺기 시작한 자주빛 국화를 괴석 좌우에 대비, 조화를 고려해 배치했습니다. “필의가 조금 거친 듯하나 매우 편안하다. 위치도 자못 좋다.”라고 했던 김수철에 대한 추사의 평가를 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전통적으로 절개와 지조의 표상인 사군자의 일원으로 숭상되어 오던 국화를 이렇듯 탐미적인 인식과 기법으로 접근한 것은 사군자에 대한 김수철의 인식이자 조선 말기 문예의식의 다원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심지란(同心之蘭: 마음을 같이 하는 난) 이하응(李昰應, 1820~1898), 지본수묵, 27.3×37.8cm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란 이름으로 더욱 익숙한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난초 그림이다. 대원군이라는 왕실 출신의 신분적 배경과 19세기 후반 격동의 시대에 펼쳤던 정치적 이력으로 인해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강했던 이하응은 타고난 예술가이기도 하다. 이하응의 예술적 재능은 사군자 그림에서 탁월한 빛을 발했는데,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로부터 난초 그림에서 만큼은 최고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묵란화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그림은 그러한 이하응의 난초 그림 가운데 30대 중반의 건실한 자기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하응의 난초 그림을 모아 놓은 《석파묵란첩(石坡墨蘭帖)》 안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화첩이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며 김정희로부터 그림과 글씨를 배우던 이하응의 30대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추사의 예술세계에 공감하던 석파의 예술 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실제로 화첩에 수록된 다수의 그림들이 스승 추사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오른편 화면을 가득 채운 훤칠한 키의 난초가 일제히 왼편으로 잎을 벋었다. 훌쩍 자란 세 줄기 잎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가늘면서도 긴 줄기를 드리우고 있다. 짙은 먹으로 그려진 긴 난초 잎과 맑고 옅은 먹으로 표현된 짧은 난초 잎과 꽃대는 농담의 차이를 통해 화면의 깊이감을 보여준다.

향기를 뿜어내는 꽃대들 역시 잎과 함께 왼편으로 기울어 마치 한 마음으로 함께 하는 듯하다. 그림에 적혀 있는 글 역시 같은 맥락이다. 

같은 마음의 말은 그 향기가 난과 같다.(同心之言, 其臭如蘭.)

『주역(周易)』의 13번째 괘인 ‘천하동인(天下同人)’에 나오는 글이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도 자를 수 있으며, 그처럼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그 향기로움이 난초와 같다고 한 것이다. 스승의 학문과 예술을 흠모하던 젊은 날 이하응의 기개와 의지가 엿보인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군자와 난초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풍우죽(風雨竹: 비바람 맞은 대)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지본수묵, 135.0×57cm

묵란화와 더불어 민영익의 예명(藝名)을 더욱 빛내주는 분야가 있습니다. 묵죽화입니다. 묵란화에서 쌓은 명성에 비해서는 다소 뒤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묵죽화에서도 민영익의 예술적인 재능은 여전히 빛났습니다. 민영익이 묵죽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상해에 망명한 30대중반부터인 듯합니다.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처지로 이국에서 여생을 보내야만 했던 자신의 처지와 심회를 묵죽화로 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군자 중에서도 불변의 기개와 절조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소재인 대나무의 의미와 상징이 새삼 절실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망명전 조선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집이 죽동(竹洞)에 있었으니,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묵죽화를 통해 풀어내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면 중단에 바위를 배치하고, 그 주변에 대나무를 그려 넣은 전형적인 죽석도 형식입니다. 바위는 갈필과 윤필, 담묵과 농묵을 적절히 섞어가며 입체감과 질량감을 살렸습니다. 그 상하로 줄기 몇 개를 담묵으로 그려 넣고, 짙은 먹으로 댓잎을 베풀어 놓았습니다. 댓잎의 필세가 워낙 강렬해 바위나 대줄기는 부수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묵죽화 특유의 꼿꼿함이나 장쾌함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댓잎만으로도 강한 호소력과 진한 감동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합니다. 댓잎은 한결 같이 지면을 향해 쏟아져 내립니다. 굳센 기세로 보건대, 시든 모습은 아닙니다. 비바람에 쓸린 풍우죽(風雨竹)입니다. 군자의 기백은 살아있으나, 모진 세파를 만나 시달리는 대나무의 모습을 통해 이국땅에서 망명객으로 살아가야하는 회한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묵죽(墨竹) 김진우(金振宇, 1883~1950), 지본수묵, 137.3×50.5cm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는 12세 어린나이에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문하에 들어가 항일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였으며 묵죽으로 항일의지를 표출한 당대 최고의 묵죽화가였습니다. 김진우는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국내로 들어오던 중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출옥 후에는 묵죽에 전념하여 서화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드높였고 이런 항일정신은 많은 민족지도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김진우의 묵죽은 일세를 울렸습니다. 이 그림은 김진우가 51세(1933년) 가을에 친 쌍폭의 대 가운데 하나입니다. 

김진우 묵죽은 대 마디 사이의 줄기는 자로 잰듯 반듯하고 성글은 댓잎 덕분에 전체 대 줄기가 한 눈에 잡혀 막힘이 없습니다. 대는 화면 가운데 밑에서부터 올라와 휘지 않고 곧게 끝까지 갑니다. 댓잎은 칼같이 날카롭고 대줄기는 창처럼 곧아 바람이 불면 쨍하고 울릴 것 같은데 이런 냉기 탱천함이 김진우 묵죽의 참된 모습입니다. 진정 묵죽으로 항일한 김진우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림입니다.



주최 | 간송미술문화재단, 서울디자인재단, SBS
주관 | 간송C&D
협찬 | 현대해상 
미디어후원 | 네이버


운영시간
10:00 ~ 19:00 - 평일, 일요일, 공휴일
10:00 ~ 21:00 - 수, 금요일
휴관일: 매주 월요일
매표, 발권 시간: 마감 1시간 전까지

도슨트 운영시간
11:30 / 13:30 / 15:30 / 17:30 (+수,금 19:30)

관람료
일반(성인): 8,000원
학생(25%): 6,000원
학생단체할인(50%): 4,000원

할인(25%)대상
ㄱ.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만 4세 ~ 만 18세 유소년 및 청소년)
ㄴ. 65세 이상 어르신 (신분증 지참)
ㄷ. 「장애인복지법」 4급 ~ 6급 장애인(본인)
장애인증명서 또는 복지카드 지참
ㄹ. 다둥이 행복카드 소지자 및 카드에 등재된 가족 포함
서울시 등록 다둥이행복카드(타지역 불가) 및 신분증 지참
ㅁ. 20인 이상 단체

할인(50%)대상
ㄱ.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20인 이상 단체
인솔자 단체 20명당 1명 포함
ㄴ. 문화의 날(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단 18시 이후 현장매표소 구매 시에만 해당

무료관람 대상
ㄱ. 만 4세 미만 미취학아동
ㄴ.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른 국가유공자
본인 및 동반 1인(유공자증 지참) 
ㄷ.「장애인복지법」 1급~3급 장애인 및 동반 1인
장애인 증명서 또는 복지카드 지참
ㄹ. 서울특별시 명예시민증을 수여받은 자(명예시민증 지참)
ㅁ. 기초생활 수급자 및 자녀(국민기초생활수급자 증명서 및 신분증 지참)

※ 할인 혜택을 받으시려면 위 증명서류를 지참하고 DDP 현장매표소를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찾아오시는 길
지하철 | 서울지하철 2,4,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버스(02-174, 동대문역사문화공원)
105, 144, 152, 261, 301, 420, 0212, 2015, 2233, 7212, 9403

주차 | ddp에서 2만원 이상 구입 시, 1시간 무료주차(금액 상관없이 최대 1시간)


기타 문의사항 | 1644-1328, 1544-1555, 070-7774-2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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