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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 그 이름으로부터의 회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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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서문

연희동 아트 컴퍼니 긱에서는 6월 8일부터 6월 22일까지 절제된 숭고미를 주제로 한 장성완, 허진의 두 작가의 2인전을 개최한다. 장성완작가는 역동성과 숭고함을 기저로 깔고 원초적인 생명력을 강조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대표작인 상어시리즈는 하나의 생명체가 지닌 고유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유선형의 몸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터질 듯 충만되어 있고, 단단한 지느러미는 시원의 물결을 거침없이 밀어내고 있다. 작가는 쇠를 하나하나 용접해서 붙이고 그걸 그라인더로 갈아내고 다시 사포로 일일이 밀어내는 일련의 과정을 치밀하게 진행한다. 허진의작가의 작품은 기독교적 엄숙미와 숭고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화폭 속의 인물들은 움직임이 거의 없는 가운데 특유의 아우라를 내뿜고있다.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조적이면서도 설득력있는 무언의 이율배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장성완작가





숭고한 힘과 열린 텍스트
손님이 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사건이다. 손님이란 뜻밖의 사람일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소식일 수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야기는 손님으로부터 시작된다. 헌데 그 손님이 바다를 끌고 왔다. 그것도 물빛 귀상어 일곱 마리를 데리고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장성완의 작품이 사건적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이 느닷없는 방문으로부터 자신의 조형적 서사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일들에는 모종의 불편함과 기묘한 흥분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불편함이란 낯선 손님이나 뜻밖의 소식 때문에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수고로움 탓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편안하고 익숙한 내 일상의 공기를 은밀하게, 때로는 마구 흔들어댄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 뒤에는 우리들의 오랜 고정관념이나 일종의 클리셰 혹은 습관적 인식이 허물어지거나 교란되는 데 대한 기묘한 흥분과 은근한 즐거움도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A Visit’를 처음 대하면서 들었던 느낌도 바로 이 낯선 손님을 대하는 기묘한 흥분과 은근한 즐거움이었다.
사실 모든 훌륭한 예술은 낯설고 새로운 것이다. ‘뜻밖의 손님’ 다시 말해 어떤 ‘사건’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관례적인 인식 체계 또는 기존의 상징 체계를 균열시킬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한 균열이 의미 있는 것은 인간이 만든 기존의 체계나 시스템이 불완전하다는 데서 기인한다. 예술은 그 불완전함을 폭로한다. 끊임없이 까발리고 들추어낸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달뜨게 만들고 반성시킨다.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장성완의 작품은 놀랍고도 성찰적이다. 그의 작품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서울 한복판에서 상어를 마주치리라고는 절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형예술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글을 써달라는 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것도 그의 작품이 풍기는 아우라가 범상치 않아서였다.
‘A Visit’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동성과 숭고함이다. 일곱 마리의 상어는 하나의 생명체가 지닌 고유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유선형의 몸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터질 듯 충만되어 있고, 단단한 지느러미는 시원의 물결을 거침없이 밀어내고 있다. 게다가 그런 원시적 힘들이 군집을 이루어 다가올 때는 말할 수 없이 거대한 숭고의 감정이 가슴 밑바닥부터 치밀어 오른다. 일곱 마리의 상어는 저마다의 개별 생명체인 동시에 거대한 바다 전체를 거느리는 온생명의 세계를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숭고의 감정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알다시피 숭고란 크기와 힘의 문제이다. 개별 생명체에 초점을 맞출 때 인간 정신의 크기는 꼭 그 정도로밖에 대응하지 못하지만, 온생명으로서 거대한 바다와 마주치기 위해서는 우리 정신 역시 그와 같은 크기로 원대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성완의 작품은 닫힌 세계로서의 ‘작품’을 넘어 열린 ‘텍스트’로 다가온다. 이 점은 단순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일곱 마리의 귀상어는 그 자체로 제각각의 작품이면서 전체로서는 자유롭게 변형 가능한 열린 텍스트로 읽힌다. 상어들이 줄지어 다가올 때는 어떤 무시무시한 힘과 두려움을, 둥글게 모여 있을 때는 유유자적한 평화로 읽힐 수 있다. 잘은 모르지만 이와 같은 특징은 동업자(?)에게도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갈 것이라 짐작된다. 감상자 역시 잘 빚어진 작품을 완상하는 수동적 관조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 위치를 바꾸어보면서 자유롭게 의미를 생성하는 능동적 참여자가 될 수 있다.
현대 예술이 예술 그 자체를 철학함으로써 스스로 파국을 맞았다는 종말론이 우세하다. 하지만 장성완을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들은 정말 사치스럽고 쓸데없는 염려처럼 느껴진다. 쇠를 하나하나 용접해서 붙이고 그걸 그라인더로 갈아내고 다시 사포로 일일이 밀어내는 일련의 과정을 드문드문 지켜보면서 그와 같은 수공업적 사유가 귀하게 대접 받는 날이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막상 완성된 작품을 마주 대하고 보니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찬란해서 참으로 기쁘다. 차가운 금속성 아래 뜨겁게 달궈진 열정이 오래 오래 타오르기를 바란다.
- 김점용 시인 -


허진의작가





몸을 통한 종교적 엄숙주의와 절제미의 발현
허진의는 “몸”을 그린다.
역사적으로 여러 종교와 이러한 종교가 스며든 사회의 세계관에 의하면 몸은 영혼을 위한 지상의 집이라고 한다. 미술비평가인 토머스 매케빌리 (Thomas Mcevilley)는 “페이디아스에서 미켈란젤로, 로댕에 이르는 전통적인 서구의 인체조각은 육체 안에 단긴 영혼, 혹은 영혼이 담긴 육체를 표현하려 애썼다… 영혼은 인간 성정의 근원적인 진리였고, 조각가는 이 정수를 묘사(궁극적으로는 육화)하려고 했다” 라고 썼다. 허진의가 그린 인간의 몸에는 종교적인 엄숙함 마저 깔려있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 보듯이 중세시대에는 자신의 몸을 죄악의 근원으로 보아 사도들이 고의적으로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고 그것을 견디어냄으로써 원죄에서 벗어나고 신에게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작가의 캔버스 안의 몸은 모두 깡말라 있어서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가분수의 비례는 예부터 물질적,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형이상학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고의 발현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육체는 금식을 통해 말라 비틀어져 皮(피)와 骨(골)이 접해진 상태이지만 그것의 영혼들은 조각처럼 가다듬어져 지극히 순수하고 맑게 보인다. 작품 “임산부”를 보자. 머리를 짧게 한 여인의 모습은 절제된 욕구와 찬란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여인은 명상(meditation)을 통해 깡마른 자신 속에 품은 생명의 잉태를 느끼고 그 소중함을 영혼으로 받아들이고, 말라버린 자신의 몸을 헌신하고 있다. 작가는 이 정제된 순간을 포착했다. “몸”을 소재로 한 작가들은 많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작품을 페미니즘이나 인종차별, 성 정체성 등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콜리어 쇼어, 바바라 크루거, 매튜 바니 등의 거장의 메시지와는 달리 아직 젊디 젊은 이 푸르른 작가에게 있어 인체는 일종의 “신성한 생명력”이다. 또한 작가는 “the gaze”, 즉, 응시라는 개념을 작품에서 융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자 한다. 화면에서 주인공들은 어딘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그 시선의 종착역은 관자의 오감이다. 원래 “응시”는 권력관계를 상징한다. 미셸 푸코나 존 버거의 응시이론에 의하면 본다는 것은 수직적 관계를 상정한다. 즉, 보는 사람은 위에 위치한 힘있는 사람, 이에 반해 보여지는 사람은 아래에 있는 사람의 심리가 된다는 말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관자에게 은밀하고 발칙하게도 자신의 생각을 캔버스 속 인물의 “시선”을 통해 다소 권력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욕망의 덩어리들만이 굴러다니는 “planet earth”에서 작가의 화폭 속 소년과 여인들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명령하고자 한다. 기원전 로마시대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현재 우리들의 모습도 그들과 크게 다른 것이 있을까… 일면 제사장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작품, “멀리서 온 소년”은 티벳에서 사는 소년을 그린 것이라 한다. 이 소년의 모습이 생택쥐베리의 “어린 왕자”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나뿐만 일까

-아트디렉터 김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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