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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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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시 개요


▪ 전 시 명 : 고산금 개인전 <Typography + Transliteration>

▪ 작 가 명 : 고산금

▪ 책임기획 : 김재원 <닥터박갤러리 큐레이터>

▪ 전시기간 : 2011. 3. 26 (토) – 2011. 4. 24 (일) / 오프닝 3. 26(토) pm5

▪ 전시장소 : 닥터박갤러리 제1전시장(2층)




너에게 가는 길, 나는 읽고 쓴다 : 살, 글, 물, 알

                                                            양효실 <미학박사> 

말은 사물을 죽인다. 사물이 죽은 곳에서 말이 태어난다. 사물이 죽어야 말이 있다. 말은 죽은 사물을 대신해 자기가 사물인 척 한다. 말의 위장(camouflage)에 속은 자들, 말에서 사물의 부패, 악취를 맡지 못하는 자들, 아니 맡지 않으려는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하기에 말의 지배에 굴종한다. 말은 자기가 가리키는 세상이 있다고 우긴다. 말은 바깥을 가리키지 않는다. 말은 오직 자기를 비춘다. 말은 그냥 말이다. 말은 사물도 너도 세상도 아니다. 말의 세계는 육(肉)은 이미 항상 죽은 황량한 폐허, 음산한 폐가이다. 이런 말을 ‘위해’ 우리는 거짓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위해 말을 한다고, 아니 말이 진실하다고 ‘배운다’. 말이 말을 비추는 세상(?!), 말의 집, 집 아닌 집은 차이, 나눔, 분별을 훈육함으로써 집의 사람들을 보호한다. 말은 결핍, 틈, 나눔이 없는 세상을 분할하고 우열을 정하고 경계를 만들고 소유권을 정하고 싸우게 한다. 누구의 것도 아닌, 모두를 위한 세상이 지워지고 이제 진실, 정의, 선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가리키는 거짓, 부정의, 악이 창조된다. 세상의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말의 지옥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면 그것은 말이 나와 적, 우리와 그들,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나누고 증오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살지 못한다. 오직 ‘말’을 위해, 말의 집을 위해, 말의 증오를 위해 삶을 허비한다. 그 사실을 안 니체는 그러므로 위버멘쉬(Übermensch)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미 항상 삶이 거짓이라면,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면, 그 거짓 위에서 진실을 찾는 ‘헛된’ 노력 대신 춤을 추라고, 한바탕 놀라고 니체는 권유한다. 거짓말, 농담, 은유, 웃음, 축제! 그의 오버‘맨’(over'man'), ‘넘어가는 남자’는 그렇게 산다. 사물이 죽은 세상, 말뿐인 세상에서 말의 지배에 휘둘리는 대신 말을 갖고 놀기. 그건 하나의 길이다. 무엇보다 ‘개인’이 되는 길.


다른 길 

사랑의 길 

너에게 가는 길 

울면서 가는 길 

눈물이 뚝뚝 듣는 길 

동백꽃, 진달래, 진주가 밟히는 길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길

오도 가도 못하는 길

해뜨고해지고달뜨고달지고별총총눈멀고더듬더듬기어가는길.


나는 너에게 가야 한다. 나는 이미 항상 너이지만 나는 ‘나’고 너는 ‘너’이기에 우리는 만나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말의 세상, 지옥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일어난다. 나는 너에게 말하고, 나는 너에게 쓰고, 너는 나를 읽고, 너는 나에게 말하고, 너는 나에게 쓰고, 나는 너를 읽는다. 다른 자리에서 일어나는 교환. 시간과 공간의 이접(離接, disjunction)만 확인하는 교환. 일치에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긋난다. 어긋남의 비극을 위해, 비극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읽고 쓰는 일이다. 말의 세상, 아비규환의 지옥. 읽고 쓰면서, 나는 기어이 너를 만지고 너를 핥고 네 안으로 들어간다. 읽고 쓰는 일은 육(肉)의 노동이고 육에 이르려는 고행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육 없는 글, 죽은 글, 삶 없는 글, 사랑 없는 글 사이에서 문학은 육화(肉化)를 욕망하는 장소(site)로, 지도에는 등장하지 않은 길에서 겨우 글꼴을 갖추고 살아간다. 말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퇴행의 길. 불가능한 길. 문학은 그래서 통곡의 장소이다.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너에게 이를 수 없으므로 문학은 쓰고, 쓰면서 운다. 읽는 자는 우는 자이다. 데리다의 말을 따르면, “눈은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울기 위한 것이다”. 말을 배운 눈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몸(눈 없는 몸, 눈 아닌 눈)이 울면서 쓴다. 우는 눈이 없었다면 말은 슬픔과 고통을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주 한 알을 놓고 눈물, 고통, 관계를 물끄러미 생각한다. 안으로 침입한 밖을 죽이지도 내버리지도 못하고, 끌어안고 살면서, 이제 내면(interiority)을 가진 오롯한 내가 될 수 없는 채, 너를 달래면서, 온 몸인 혀로 너를 구슬리면서 진액을 발라대면서 동그랗게 다른 장소를 용인하면서 함께 살아가기. 평화로운지, 살벌한지, 고통스러운지, 꾸역꾸역인지 진주(heterotopia)를 겪는 조개는 말 없다. 오직 인간을 위해 그것은 은유가 된다(은유가 없었다면, 삶은 얼마나 궁핍하고 초라했을까). 타자를 품은 조개, 타자를 낳고 타자를 먹이고 타자를 키우면서 조개는 자기(self)이다. 하나의 조개는 하나의 조개이지만, 조개 안에는 다른 것이 있다. 너는 나를 먹으면서 그러나 나를 살리면서 그렇게 둘이 하나의 조개이다. 이 자기는 자기인가? 우는 나는 하나인가? 네 ‘눈’에는 내가 하나로 보이는가? 우는 자는 그러므로 타인을 우는 자이다. 내 안에서 네가 운다. 내 안에 네가 있다는 것이 내 의지에도 불구하고 드러날 때, 그때는 내가 울 시간이다. 이미 내 안에 네가 있는데 나는 네게 갈 수도 닿을 수도 없다. 말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는 ‘기적’을 행한다. 네가 아파서, 내 안에서 네가 나를 먹어서, 내 안에 네 자리가 너무 커서 나는 운다. 눈물샘은 네가 또아리를 틀고 앉은 우물, 네가 타액으로 흐르는 강이다. 지옥 속의 지옥. 말의 지옥 속에 몸의 지옥. 울어도 울어도 마르지 않는, 네가 안 죽어서 내가 자꾸 두레박을 던지는 물의 지옥. 그런데 진주는 ‘아 름 답 다’. 진짜이건 가짜이건 진주는 아름답다. 은유의 매혹. 여성적인 것의 유혹. 슬픔과 고통의 서사를 감추고, 진주는 아름답다. 귀부인의 진주건 창녀의 진주건, 진주는 말 되어질 수 없는 슬픔, 들려질 수 없는 끔찍한 사랑의 이야기를 감춘 채 〔……〕 그러므로 아름답다. 진주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나’를 더 많이 학대하고, 삼키고, 소진시켰음의 반증이다. 진주가 아름답거든 제발 내/네가 참 많이 아팠구나, 라고 써주시길, 노래해주시길. 


고산금은 끊임없이 읽는 자이다. 고산금보다 더 많이 읽고 보는 작가야 많을 것이지만, 고산금은 자신이 읽는 사람, 읽는 여자임을 우선, 가시적으로, 중요하게 노출시킨다. ‘작가’로서의 고산금의 아이덴티티는 읽는 자에서 출발한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읽는다. 활자 중독. 신문, 법전, 대중가요, 시, 소설, 전통 산수화. 말의 세상, 인식의 세상이 정해 놓은 범주, 경계를 자유로이 횡단하면서, 각 영역의 차이, 심리적 무게, 현실적 중요성, 우선성을 무시하는 고산금에게 모든 글자는 글자이기에 같다.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신문, 언어의 경제성의 정점을 보여주는 법전, 언어의 희열을 드러내는 문학, 언어의 신파를 보존하는 대중가요는 교환가능한, 무차별적 글자로 환원된다. 말의 세상에서 말이 갖는 모든 역할(말에 저항하는 테러리스트 말까지 포함해서)이 소환된다. 

글자는 고산금의 글자인 진주로 번역, 전이되기 직전의 소재에 불과하다. 고산금은 자신이 읽은 글자를 다시 읽는 두 번째 읽기에서 글자를 센다. 정확한 읽기, 셈하는 읽기. 고산금의 읽기는 시각적 차이의 읽기로 바뀐다. 글자는 전달해야 할 내용을 버리고 대신에 한 줄, 한 페이지에 몇 개의 글자가 있었느냐에 대한 정확한 셈으로 전치된다. 내용이 사라진 글자, 의미의 차원에서 형태의 차원으로 옮겨진 글자는 시각성(visuality)으로서만 존재한다. 말이 의미를 발생시킬 때 숨어버리는 글자들의 차이, 간격, 공백이 진주의 배열의 리듬에 의해 드러난다. 이제 내용이 제거된 말은 있음과 없음, 행과 행간, 비움과 채움,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놀이의 무대로 이동한다. 유백색의 화폭에서 리듬이 등장한다. 고산금이 읽는 것은 그녀의 ‘눈’에 모든 글자는 이미 보이는 노래, 들리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글이 있었음을 진주의 수가 대신한다. 화면에 놓인 진주의 수만큼 글자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해서 진주가 글자를 먹었다. 아니 진주가 품었다. 고산금의 글자를 읽는 순간 우리는 고산금의 내부로 들어온 것이다. 고산금은 글자를 먹고 대신에 그 자리에 진주를 토해 박는다. 따라서 고산금은 글자를 읽는 자가 아니라 글자를 먹는 자이다. 작가로서의 그녀의 양분, 그녀의 에너지, 그녀의 이미 내부인 외부. 그녀는 삶을 산다는 세간의 소박한 믿음을 밀어내고, 말의 세상으로, 지옥으로 제 스스로 들어갔다. 말의 세상에 갇힌 고산금은 냉정하고 초연한 길, 혹은 해학과 냉소의 길 - 개인주의 예술가의 길 - 을 가는 대신 아프고 서러운 길을 택했다. 

문학은 아프다. 시는 아프다. 지금 나오는 노래, 그때 들었던 노래는 아프다. 최선을 다할수록 멀어지는 관계, 최선을 다할수록 나를 잃는 실패담은 그렇다. 신문기사는 아프지 않다. 법전은 아프지 않다. 거기엔 마음, 감정, 상황이 없다. 그러나 고산금은 모든 글자를 아프게 만든다. 모든 글자가 고산금을 아프게 한다. 고산금은 모든 글자 앞에서 운다. 모든 글자를 운다. 배수아, 김승옥, 김애란, 황순원, 앙드레 지드란 이름은 문학에 대한 고산금의 개인적 ‘취향’을 드러낸다. 나와 다를 수 있다. 당신이 고산금이 좋아하는 작가를 이미 좋아한다면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금방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평도 기사 앞에서, 남북대화를 촉구하는 기사 앞에서, 병역법이 적힌 소법전 앞에서 마음이 아픈(moving) 그녀는 어떻게 할까.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진, 나인 너를 증오하라고 가르치는 이 모국에서, 사랑의 파토스로 불면 중인 청년에게 싸우고 증오하고 죽이는 기술을 가르치는 조국에서, 나인 너의 공격에 수 십 년 살아온 터전에서 난민처럼 쫒겨난 연평도 주민들을 떠올리며 당신은 고산금처럼 신문을 펼쳐 놓고 법전을 놓고 그 차갑고 얼어붙은 글자 앞에서 울었는가? 울 수 있었는가? 내 안의 진주, 강, 우물을 보았는가? 말의 기록이 아닌 육(肉)의 기록으로서의 고산금의 글쓰기(écriture)는 그렇게 차갑고 날카롭고 심장을 식히는 언어를 데우고 녹여서 흐르게 한다. 그게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허수경)의 세상에서 자꾸 눈물이 나온다고,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모르겠다고 통곡하는 여성들의 사랑법이다. 


개인이 되어 내면으로 망명하는 대신 저자 거리를 쏘다니며 남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곡하는 여자들’. 난 사랑밖엔 모른다고 노래하는 여자들. 내가 될 수 없어서 너에게 이르는 길에서 유랑하는 집시들. 어머니들. 연인들. 살의 존재들. 자궁의 낙인들. 진주귀걸이를 한 여자들. 폐허를 가리키는 난민들. 사랑의 말을 기억하고 병균처럼 퍼뜨리는 타자들. 


다시.

고산금의 진주 한 알, 한 알이 품은 말을 들으려면 가만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당신은 그녀의 진주가 숨긴 말들을 찾겠다고 그녀가 읽은 원문을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녀가 한땀 한땀 박은 진주의 목소리, 겨우 목소리, 목소리 아닌 목소리, 육의 목소리(肉聲)을 듣겠다. 사랑의 울림, 이미 내 안에 있는 진주, 고산금은 토해낸 진주, 고통, 사랑, 슬픔. 그래서 너를 떠올리겠다. 그리고 다시 울겠다. 너무 멀리 있는 너, 아직 내 안에 있는 너, 말이 죽어야만 만날 너, 영원히 거기 있는 너, 그러므로 삶을 사랑으로 요구하는 너를 위해, 그러므로 나를 위해. 


P.S

진주의 노래 말고 너를 비추는 쇠구슬이 박힌 장면들에 대해서는 아직 말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것에 대한 말은 멀리서 여즉 오고 있다. 이번에 말 되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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