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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화파의 대가, 관산월關山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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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시립월전미술관과 중국 심천시립관산월미술관과의 공동기획 전시로 ‘영남화파’의 대표적 작가인 관산월(關山月, 1912-2000)의 작품을 선보인다. 현대중국의 시련과 모순을 뚫고 분명한 시대정신과 창작의 혁신을 바탕으로 그가 산 시대의 현실을 작품에 반영했던 관산월의 사생, 화조, 산수화 등 40여점이 전시된다.
사생(寫生)과 전통혁신의 도정(道程)- 관산월(關山月)의 회화세계




류철하 | 이천시립월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영남화파의 대가, 관산월」전은 2007년 10월 이천시립월전미술관과 심천관산월미술관과의 우호합작의향에 따라 양국의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자 마련된 공동기획 전시로 중국 심천의 대표적인 화가인 관산월(關山月, 1912-2000)의 작품을 선보인다. 관산월은 현대중국의 시련과 모순을 뚫고 분명한 시대정신과 창작의 혁신을 바탕으로 그가 산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회화작품을 보여 주었다. 관산월은 현대중국의 단절과 연속이라는 역사적인 전개속에서 “민주”와 “과학”이라는 시대요청과 예술사회적 실천과 내용의 동시병행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볼 수 있는 주요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결코 전통을 버리지 않았지만 좌시할 수 없는 현실속에서 과감히 전통을 혁신했던, 그러나 다시 전통의 요소를 적용하여 중국회화의 형식언어를 창출하고자 했던 관산월의 굽힘없는 실천은 동아시아의 모순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에게 또 다른 준거를 제공할 것이다.





중국회화가 처한 시대상황 그리고 영남화파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정치, 사회적으로 위기에 직면했고 그것은 중국인들의 사상적 기반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서양의 과학기술를 수용하는 한편 유신변법운동을 통하여 제도개혁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에 회화 역시 예외일 수 없었는데 문화방면에서도 점차 새로운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20세기 초 중국은 서양의 미술사조와 미술교육제도의 도입 및 유학생의 귀국에 따라 사생에 대한 해석과 용법에 새로운 영향을 미쳤다. 중국미술계는 동서양 미술의 융합을 특징으로 하는 신미술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사생(寫生)"이라는 개념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사생"은 실경을 마주하고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오로지 가리키게 되었으며, 화가들의 조형능력을 제고시켜 자연을 마주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관산월이 속한 중국 영남지역은 근대 중국에서 가장 먼저 개항한 도시인 광주를 포괄하고 있으며 해외로 나가 경제활동을 하는 화교들이 많이 있었고 서양 문명과 해외문화를 비교적 빨리 받아들였으며 자본계급의 민주혁명사상이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이러한 민주혁명사상을 접하면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영남지역 화가들은 서양화법을 독창적으로 융합시켜 중국화를 혁신하고자 도모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고검보(高劍父), 고기봉(高奇峰), 진수인(陣樹人) 등이다. 이들은 손문의 자산계급 민주혁명사상의 영향을 직접 받았으며 신문화운동인 5.4애국운동의 세례를 거쳤고 예술혁명의 구호를 외치며 신중국화 운동을 주창하였다. 이들은 일본유학시절에 배운 서양화의 조형법칙 운용을 도모하였으며, 서양회화와 일본회화 속의 과학적 사실(事實)의 법칙과 물상을 색채로 표현하는 장점을 흡수하고 차용하여 중국회화를 개혁하는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하였다. 관산월 역시 고검보의 춘수화원에서 이러한 영남화파의 혁신사상을 학습했으며 미술교육사상을 전승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적 지침과 스승 고검보에 대한 인격적 감화가 그의 예술행로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관산월의 예술여정
관산월의 원래 이름은 택패(澤霈), 자는 자운(子雲)이며 1912년 광동성 양강(陽江)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영향으로 그림을 좋아했으나 곤궁한 살림으로 배울 수 없었다. 관산월은 시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중 중산대학에서 고검보(高劍父)의 강의를 도강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춘수화원(春水畵院)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는데 스승의 예술관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항전 초기인 1938년 홍콩과 마카오에서 항전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전람회는 홍콩과 마카오 문화계의 폭넓은 관심을 끌며 성공을 거두었다. 관산월은 1943년부인 이소평(李秋璜)과 함께 돈황(敦煌)으로 가서,돈황 막고굴(莫高窟) 천불동(千佛洞)의 고대벽화에 대해 임모연구(临摹研究) 하였다. 항일전쟁 승리 후 관산월은 광주로 돌아왔고 다음해 광주예전 교장으로 임명되어 미술교육자로서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관산월은 인민정부의 주역으로 개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농촌, 공장, 건설현장, 해안 둑쌓기 공사를 둘러보았으며 새 시대의 생활을 반영하는 대량의 사생 작품을 그렸다. 1959년 부포석(傅抱石)과 합작하여 인민대회당(人民大会堂) 본관(正厅)에 대형국화《강산이 이렇게 아름답구나江山如此多娇》를 창작하였는데 웅장한 기상과 아름다움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그도 다른 지식인들처럼 ‘취노구<臭老九,아홉번째로 냄새나는 놈-, 문화대혁명기간 지식인을 일컬은 말>’로 칭해져 공개비판을 당하고 우붕(牛朋)에 하방(下放)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탐색하였고 수 십리의 길을 걸어 사생하였다. 1970년대 이후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관산월 화집』,『관산월 동북 사생집』을 출간 하였다.

관산월은 특히 중국 산수화의 새로운 형식을 성취했고, 인물화 ․ 화조화 등에도 우수한 작품들이 많다. 관산월은 언제나 “예술의 진실은 대중의 평가에 있다”(고검보 나의 현대 회화관)는 자세를 고수 하였다. 관산월은 세속의 풍경을 화려한 색채로 다양하게 그렸으며 80세가 되어서도 붓을 멈추지 않았다.




관산월 회화의 풍격과 의미
관산월의 예술세계는 그가 살아온 중국현대사의 지난한 과정만큼이나 다양한 현실의 모순을 통과하면서 생활을 속에서 시대인식을 분명히 하였고 전통회화에 대한 학습과 연구를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조형원리를 확립하였다. 관산월은 끊임없이 새로움과 변화를 수용하는 가운데 넓은 시야와 웅건하고 분방한 풍격을 가진 중국화를 제시함으로써 중국인의 마음에 깊은 정신적 공감을 남겼다. 관산월의 회화는 현실속에서 고금의 법도를 펼치고 남북강산을 종횡으로 주유하여 만리행의 사생을 통해 중국화의 영혼을 깊고 풍부하게 하였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
Woljeon Museum of Art Icheon

※ 화요일_일요일: 오전 10시-오후6시
* 마감시간 30분전까지 입장가능
* 매주 월요일 휴관

467-020 경기도 이천시 엑스포길 48(설봉공원 內)
tel. 031.637.0033/0032 fax. 031.637.0177
www.iwolje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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