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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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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라는 타이틀은 본질을 응시하려는 영혼의 시선과 사물의 추상적 본질에 닿으려는 작가의 소망을 표현한 것,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곳에 더 오래 머물기에 표현 사용한 연잎. 꽃을 떨구어낸 연잎에서 쇠락한 자연이 아니라 시간의 궤적을 보여주는 전시




퇴락의 미학


최광진│미술평론가, 理美知연구소장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조
있는 듯 없는 듯한 형상
푸근하게 피어나는 물성
인위적이지 않은 소박함
기교 감춘 무심한 손길
절제, 후덕, 겸손, 격조…


송수련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인상들이다. 세련되고 자극적인 무엇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작품은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외형적으로 너무 차분하고 은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적인 코드가 장착된 사람에게는 세련되고 자극적 것 이상의 무엇이 그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은 지역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세련된 화려함보다도 소박한 절제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경향이 있다. 절제라는 것은 내용이 빈약하고 부족하여 드러낼 것이 없을 때 쓰는 말이 아니라, 충만함을 넘어선 개념이다. 즉 충만한 내용과 더불어 그것을 억제할 수 있는 자제력을 내포한 개념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표현들에는 네 가지 수준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부족한 내용을 감추기 위해 형식을 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낮은 차원의 수준으로 외형적으로 화려한 유혹이 있지만, 그 안에서 초라하고 초초한 인간의 위선을 만나게 된다. 둘째는 자신의 부족한 내용을 과장하지 않고 부족한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수준에서는 진솔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셋째는 내용의 충만을 충만한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수준에서는 인간의 위대한 의지와 천재성을 경험하게 된다. 표현의 네 번째 수준은 내용적으로 충만하나 절제된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텅 빈 충만’의 상태로 여기서 우리는 위대성을 넘어서는 도덕적 겸손과 인격, 그리고 우아한 격조를 만나게 된다.




서구의 미술은 세 번째 수준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에서처럼 그들의 작품을 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의 경탄과 인간의 위대한 의지에 직면한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중국이나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은 전통적으로 네 번째 수준을 예술의 지향점으로 삼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예술이 인위적인 기술로 그치지 않고 인격완성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고, 이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나아갈 길과 예술의 길이 같은 노선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술은 기술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격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송수련은 이러한 한국인 특유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작품에서 보이는 절제된 형식 역시 그러한 격을 드러내려는 고차원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렇다면 그 절제된 형식 이면에 들어있는 풍요로움은 무엇일까? 이번 전시회에서 그녀는 작품에 연잎을 등장시켰다. 커다란 연잎을 잘 말려 화면에 접착하고, 그 위에 한지를 붙여 고정시켰다. ‘붙여 고정시켰다’는 표현보다는 ‘붙여졌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를 정도로 그 밀착이 자연스럽다. 마치 오랜 시간의 풍화를 거친 화강암처럼 마른 연잎의 섬유질과 한지의 섬유질이 자연스럽게 얽혀져 있다. 사실 종이도 그 고향이 나무인지라 이들의 만남은 명절날 시골의 고향을 찾는 사람처럼 반가운 만남이다. 오랜만에 고향의 산천을 보게 되면 각박한 현실로 상처 난 마음이 위로되고 동심으로 돌아가듯이, 종이와 연잎의 만남은 어떤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헤어져 서로 다른 것처럼 인식되어 왔던 것이 본래는 하나였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환기시킨다.




연잎은 무엇이라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둥글고 큼지막한 형태에 조선시대 찌그러진 백자를 연상케 하는 적당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어 구수하고 후덕한 맛이 있다. 그것은 연못에서 진흙탕 물을 덮어 가리우고 청결하고 고귀한 연꽃을 피어나게 한다. 그 화려한 연꽃의 개화 이면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희생하여 받드는 연잎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잎의 특성에서 작가 송수련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그녀는 외모에서 풍기는 후덕한 인상처럼 진흙탕 같은 세속에 살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주장하고 드러내려하지 않는다. 어떤 갈등도 정화시킬 것 같은 어머니의 포용력과 너그러움, 그리고 따스하고 애틋한 시선은 바로 전통적인 한국 특유의 여성상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작가가 연잎을 소재로 다루게 된 것도 작가의 내적 심성이 연잎의 특성과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연꽃보다 연잎에 주목하듯이,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일상에서 소외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진 곳에 머무른다. 사람들은 보통 화려하게 핀 꽃이나 스무 살 전후의 꽃다운 청춘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 지점이 절정의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정점을 넘어선 것을 보면 슬픔을 느낀다. 그 절정의 상태에서 조차 곧 다가올 퇴락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러한 사고야말로 생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겠는가. 꽃이 떨어져 흙이 되고, 다시 새로운 꽃으로 피어나듯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자각한다면 생(生)과 사(死), 유(有)와 무(無) 같은 이분법적 도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아침을 잉태하듯이, 퇴락한 자연과 인간은 새로운 생명의 약동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락은 죽음과 끝이 아니라 생의 연장이자 새로운 시작이고, 이러한 사고를 통해 영원에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추구하는 ‘퇴락의 미학’이 아닌가 한다.




작가의 작업실에는 언제나 말라비틀어진 꽃이나 나뭇잎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그 중에서 운 좋은 놈들은 작가의 우연한 손길에 간택되어 작품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때로는 일상에서 버려진 깡통이 그녀의 회화로 분장해 필통이 되기도 하고, 부엌 한 구석에 놓여 있어야할 항아리가 작가의 분장을 통해 전시장에 진출하기도 한다. 또 너무 오래되어 버려진 허름한 의자나 책상도 작가의 간택에 의해 새로운 생을 부여받는다. 여기서 낡은 것과 새 것, 일상과 예술의 이분법적 구별은 무색해진다.

송수련의 작업은 출발은 바로 퇴락하고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발견에서 시작한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응시에서부터 출발하지만 사실주의 작가들처럼 대상의 외관을 포착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인상주의 작가들처럼 자연 대기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동양화의 오랜 전통처럼 자연에서 직접 생동하는 기운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라면 마른 잎보다는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을 대상을 삼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 송수련에게서 자연은 어떤 의미인가? 이러한 자연관은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작가의 작업노트에 적혀 있는 다음 구절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내 그림은 언제나 자연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하지만, 현존하는 자연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자연은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나의 것이지만, 동시에 내 존재의 집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많은 타인들,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포함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거친 자연은 나라는 한 개인 속에서 집단 무의식이라는 회로를 통하여 드물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통시대적 관찰의 직접물인 그 자연이 추상적이고 모호하긴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정서가 되어 나타난다.”
- 작가노트


이 말은 지금 자연이 자신에게 시각적인 존재 외에 어떤 정서를 환기시켜 준다는 것이고,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며 정서적 교감을 이루는 장소가 된다는 의미이다. 즉, 인간과 자연의 만남과 교류는 어떤 정서의 형성으로 나타나고, 자연 대상은 원래 자연이 주는 기운과 과거 다른 사람을 느꼈던 정서,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는 정서가 복합되어 만나는 장인 것이다. 그 만남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관념, 자아와 타인, 혹은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와해시키고 하나의 조화된 세계를 이루는 장소가 된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예술은 자연을 통해 만남의 장을 만들고, 그 장을 통해 형성된 정서를 포착하여 화면에 조형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인 셈이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시선이 아니라 내면의 시선, 즉 ‘내적시선’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다름 아닌 관조의 눈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작품은 시공을 초월한 소통의 장이 되고, 정체된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매체가 되어 우리의 사유를 흐르게 한다는 점에서 명상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명상의 장소로서의 예술은 잡다한 현실을 초월을 경험하게 하며, 그럼으로써 작가는 진실한 생의 순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꿈꾼다.

“마치 향기가 어떤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생의 순간’을 되살려 내듯이, 나는 내 이미지들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안에 파묻혀 있는 우주와 세계와 역사의 한 자락을 보게 만들고, 시간의 지층 속에서 생의 진실의 한 조각을 주워들 수 있게 하기를 꿈꾼다.”
- 작가노트


이것은 일상의 현존을 통한 현존의 초월을 이루고자 하는 작가 특유의 방식이고, 찰나에 대한 순간의 ‘경험’에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자 하는 불교적 태도이기도 하다. 이것은 서구의 모노크롬과는 전적으로 다른 태도이다. 모노크롬 회화는 그림에서 세계를 차단하여 색면 그 자체를 남기려 하였다. 반면에 송수련의 회화는 추상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조형작업이 아니라 일상에 대한 정서를 환기시키고, 어떤 메아리 같은 울림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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