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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 전:moving poject-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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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글로벌리즘적 특징을 'Moving Project|움직이다' 를 통해 비디오 작업과 다양한 재료를 접목한 평면회화 작업으로 총 30여점이 전시
경계 위의 사유:
실존의 영토를 찾아 나선 부유하는 욕망들

장동광│예술학, 독립큐레이터




“1) 삶이 기쁨의 결핍(manque-à-jouir, lack of enjoyment)인 까닭은 욕망의 진정한 대상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2) 삶이 즐김의 결핍(a lack of to be enjoyed)인 까닭은 대체된 대상과의 결합이 가져오는 오르가즘적인 충만함으로서의 쥬이상스(jouissance)는 구성적으로 분열된 주체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필수적인 항 중의 하나인 주체나 대상이 항상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p.296-





1. ‘움직임’에 관한 유목적 탐색
지난 해 권혁은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 레드윙의 앤델슨 센타 레지던스(Artist-in-residence Anderson Center in Minnesota)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빛나는 원’을 만들었고, 그것과 함께 외국여행을 떠났다. 권혁이 만든 원은 빛에 의해 가변적인 번쩍임을 발산하는 것으로, 일명 특수필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이 특수필름 (funky film) 스티커를 원판 위에 육면체 형태로 오려붙여 시각적으로 입체감이나는 원의 형태를 만들었다. 이 반짝이는 특수필름이 마치 자개나 CD-ROM 디스켓의 표면처럼 빛의 각도에 의해 변화무쌍한 일루전(Illusion)을 자아내는 것에 그는 주목했다. 사실 이 일루전의 문제는 이차원의 평면회화가 오랫동안 숙제처럼 껴안고 있던 삼차원적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와도 긴밀한 관련성을 맺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권혁은 이 가변적인 반짝임이 내재된 원판과 함께 주유(舟遊)했던 여행을 ‘움직이는 프로젝트(Moving Project)’라 이름붙였다. 그리고 그는 미네소타를 떠나 5개국 7개의 도시를 탐방했다. 미국의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와 뉴욕(New York), 오스트리아의 비엔나(Vienna)와 그라츠(Graz), 체코의 프라하(Praha), 이태리의 베니스(Venice)를 거쳐 서울에 당도했던 것이다. 그는 이 무빙 프로젝트를 단순히 원형의 발광체 오브제(object)를 들고 방문지의 현장성을 기록하는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종의 관객참여 형식이 개입된 퍼포먼스를 실험한 것이었다. 권혁이 요청한 이 퍼포먼스에 참여하게 된 관객들은 갑자기 일어난 이 예상할 수 없는 예술가의 우발적 행위에 즐거이 동참했다. 이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의 한 형태를 연상시키는 이 실험은 원형의 발광체 오브제(object)을 들고 서있는 익명의 관객들을 연속사진으로 남기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기록의 존재증명 만은 아니었다. 권혁은 이 작업을 통해 그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던 ‘움직이는 것’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탐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권혁이 의도했던 움직임의 문제는 그가 유목적으로 떠돌면서 서로 다른 나라, 문화, 도시환경, 사람들과 호흡하고 그것의 기록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장소특정성(site-specific)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개별적인 이미지마다 어느 하나 동일하지 않은 원형의 발광오브제의 변화무쌍한 표정처럼 끝없는 유랑의 표상으로서, 변화의 흐름에 관한 예술적 포착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퍼포먼스를 행위(act)라고 하는 물리적 반응을 기록하는 연속사진이나 영상으로 담는 것에 국한하지 않았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텍스트를 통해서도 관객들의 다양한 반응들을 수집했고, 그것을 작품 속에 담아내고자 하였다. 그는 ‘유혹(temptation)’이라는 질문을 담긴 설문지를 다양한 국적, 인종의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스스로의 생각을 적게 했다. 그리고서 그는 이 유혹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글귀들을 작품 속에 담았으며, 그래픽적 요소를 도입하여 픽토그램(pictogram)화된 사람 혹은 동물들의 도상들과 함께 이 텍스트들을 결부시켰다. 유혹이라는 문구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지만 대체로 ‘우리에게 금지된 것 혹은 이룰 수 없는 현실적 욕망’을 해방된 상상력으로 피력한 것은 사실상 억압된 구조 속에 놓여있는 우리의 현실세계의 또 다른 반영에 다름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 유토피아(Utopia)적 상상과 꿈의 편린들은 이번 권혁의 작품들 속에서 조형적 의미소로 변이되면서 새로운 변화적 국면을 노정하는 ‘사건의 발단’으로 떠오르고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 가로지름, 감춤과 드러냄, 징후 프로젝트, 그리고 움직임...
이 지점에서 1997년 미국 크랜브룩 미술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이후, 권혁의 작품궤적을 살펴봄으로써 이번 전시의 큰 틀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권혁의 작품의 본령이 섬유미술이라는 지평에서 출발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적어도 형식적인 측면에서 그의 작품들은 섬유미술의 방법론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닐에 재봉틀을 통한 스티칭(stitching) 기법을 새롭게 창출했던 그는 캔버스 천에 박음질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흰색 노방(老紡) 천을 캔버스에 그려진 화면을 감싸 속이 비치게 함으로써 이중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여기서 특히 노방천은 섬유라는 일차적인 재료적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의 환영적 경계이자 이미지의 그물망으로써 작용하고 있다. 사실 노방천은 생사로 얇게 편직으로 짠 직물로서, 한자말 그대로 한다면 노인이 명주실을 뽑아 만든 비단으로 의상의 안감이나 속지에 많이 쓰이는 천이다. 전래적으로는 천연섬유인 실크로 만들어 졌지만, 최근에는 합성섬유로 만들어져 의상뿐 아니라 인테리어 등에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 직물이다. 안이 살포시 비치는 이 노방은 한지와 같이 안과 밖의 환경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교류시키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한지가 바깥의 환경을 고스란히 안으로 스며들게 함으로써 외계(外界)와의 대화를 가능케 한다는 측면에서 자연친화적이고 한국적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적 재료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한지처럼 노방 역시 전통적으로 여름철에 필요한 자연친화적인 소재였다. 한지가 건축 속에서 한국적 정서를 반영해 왔다면, 노방은 인체를 대상으로 한국적 미의 한 전형을 표출했다고 할 수 있다. 노방은 주로 여름철 의상의 소재로 쓰여져 몸과 옷 사이에서 공기의 순환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신비스런 안의 자태를 보일 듯 말듯 비추게 하는 매혹적인 직물이었던 것이다. 노방은 이런 측면에서 직설적인 노출이나 외부와의 완전한 절연이 아닌 미망(未忘)을 간직한 은유의 창이었던 것이며, 욕망의 실체 너머를 들여다보고 싶도록 유인하는 미혹(迷惑)의 경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권혁이 캔버스에 일차적으로 그려진 이미지를 안이 비치는 노방 천으로 한 겹 덮음으로써 구획화 내지 이면(裏面)화시킨 태도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가 언급했던 것처럼 욕망의 진정한 대상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로서 ‘기쁨의 결핍’과 일정부분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권혁이 스티칭 기법이나 노방천과 같은 섬유미술의 매체 사용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그의 조형개념을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유효한 방법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 드러나 있는 이러한 형식적인 측면보다는 그간의 개인전을 통해 발현된 조형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혁은 전통적인 섬유예술을 지평을 넘어서 현대미술의 영토 속으로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후 그녀의 개인전은 ‘가로지름(Intersection), 덕원갤러리(1998)’ ‘감춤과 드러냄(Conceal & Reveal), 사간갤러리(2002), ‘징후 프로젝트(Symptom Project), 엄갤러리(2003)’, ‘실(Thread), 킹스우드로어 갤러리(Kingswoodlower Gallery, Michigan, USA, 2004)’ 등 개념적인 주제를 동반하고 펼쳐졌다. 대체로 비닐에 스티칭 기법으로 사람의 손이나 얼굴, 사물의 형태, 동물의 형상 등을 도상학적으로 표현하거나 기하학적 색면에 영어로 된 텍스트들을 병치시킴으로써 개념적 연상을 자극하는 평면작품들이었다. 사각형의 틀을 유지하는 전형적인 평면작품들도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가변적인 설치나 전시장 전체를 대상으로 현장 작업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권혁이 표명해 온 예술적 개념의 주요한 기표들은 영어로 된 텍스트들에 기거해 있었는데, 예를 들면 ‘MOVE’, ‘GO’ 등과 같은 문자들이다. 이 문자들이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임은 물론이지만, 이 문자들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듯하게 배열한다거나 문자가 없는 이미지의 형상화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의 문제는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2004년 헤이리아트밸리 진아트벽면에 설치되었던 대형설치작품 “Thinking of Fantasy"의 작품에서 유동하는 색면체의 형상 혹은 모호한 생명체의 움직임에 천착한 작품들이었다. 이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이야기했던 ‘고통의 파동’이나 ‘고른 판(plan de consistance)에 패인 주름’ 내지는 유기체적인 방식의 조직화에 대립하기 위한 ‘기관없는 신체(corps sans organs)’를 떠올리게 한다. 욕망하는 분열된 주체는 이상을 갈구하지만 그것은 늘 불가능함 속에 존재한다. 권혁에게 있어서 이 주체를 상실한 움직이는 형상들은 환상을 향한,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망의 그림자로 투영된다. 그래서 유기체로 부터 독립하여 탈영토화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무한한 재생의 가능성과 의미생성의 기제들을 결합시키려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하나의 기관없는 신체를 위해 우리에 대해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어떻게 지층화되어 있는지를 보라고 권고한다. 권혁은 이러한 권고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사회적 구성체 속으로 떠났다. 이번에 선보여질 권혁의 ‘무빙 프로젝트’는 결국 우리 안에 존재하는 욕망의 흐름들, 그 개별화된 기계들의 집합적 지층을 하나의 장소에, 하나의 판으로 결속시키고 있는 예술적 사유의 땅인 셈이다.




3. 혼성의 영토를 꿈꾸는 경계위의 예술
이번 권혁의 개인전은 크게 세 가지 다른 형식들을 복합적으로 교차시키고 있다. 첫번째 유형은 무빙 프로젝트로 전개한 유목적 여행 중에 원형의 발광체 오브제를 들고 선 익명의 퍼포먼스 참여자들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사진과 영상이미지들이다. 앞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는 이러한 유형의 퍼포먼스 작품들이 기관없는 신체를 위한 ‘장소성’의 탐색이라면, 두 번째 유형은 픽토그램화된 사람과 동물들의 형상들과 형광색 등 복잡한 색상과 기학학적 도형을 병치시킨 그래픽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회화작품들이다. 마치 거대한 건물 속이나 도시 속에 떠돌고 있는 사람이나 동물들은 어떤 경계나 세상의 지면 속에 갇혀있지 않다. 일정한 방향성도 없으며, 단일한 평면성으로 조율된 화면은 일차적으로 캔버스에 아크릴 칼라로 그리고 그 위에 노방 천을 입혀 시각적 일루전을 부각시킨 것으로 ‘사회와 집단’에 대한 사유를 피력한 것이라 하겠다. 이 사회와 집단에 대한 기관 없는 신체들은 사람이나 동물들의 형상이 모자이크로 도형화된 형태 속에 갇혀있거나 때로는 그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변주되고 있다. 이 복잡하게 얽힌 도상적 이미지들은 어떤 의미생성의 기표들이라기 보다는 끝없이 유동하는 움직임의 연속적 흐름으로, 파편화된 유기체의 절편(切片)으로 부유하고 있다. 따라서 일정한 규칙을 벗어나 카오스(chaos)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유충(幼蟲)들의 몸체처럼 우리의 시각을 혼동시킨다. 이러한 차원에서, 권혁이 무엇인가 표현한다는 예술행위는 다만 자신이 이 화면 속의 유충과 같은 도형과 사람, 동물들과 함께 부유하는 것으로 족하다. 욕망이나 출구조차 이미 다른 세상의 것이 되고 있으며, 언제 유충 밖으로 껍질을 벗고 날아오를 지 알 수 없는 무한의 세계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 대단히 화려한 색채와는 다르게 염세적인 호흡을 느끼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과 같은 불교적 화두가 새삼스럽게 파고든다. 이 화면 속에 떠도는 색의 무상함과 그 무상함이 다시 욕망의 색으로 끝없이 윤회하는 듯한 화면구성은 진행과 역행의 시간적 간섭까지도 자연스럽게 밀어 올린다.




결국 권혁의 의도한 움직임이라고 하는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진술 속에 합류되면서 존재론적 질문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 번째 유형은 길을 떠나는 사람의 형상이나 공중에 붕 뜬 상태의 사람의 형상을 스티칭 기법으로 캔버스에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대체로 단일한 색조의 바탕 위에 박음질된 공중에 떠있는 사람의 형상이나 여행자의 모습들은 뒷모습이거나 옆모습이다. 그리고 이들의 형상은 각기 바탕 색면의 변주 외에는 배경이나 원근법적 구도 등이 배제되어 있다. 무중력의 공간 속에 놓여있는 듯한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오히려 무한한 영토를 향한 끝없는 유랑의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길 떠나는 이들의 무거운 짐과 얼굴없는 표정에서 현실 저편의 피안의 세계를 찾아, 억압과 욕망의 구조로부터 벗어나려는 또 다른 욕망의 무게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세 번째 유형은 앞의 유형들과는 다르게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사유를 보다 단순하고 분명한 어조로 표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몽상가의 아침처럼, 권혁의 길 떠난 사람이나 공중에 떠 있는 사람의 형상에 담긴 움직임의 문제는 너무나 시린 빛깔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 현상적으로는 화면 속에 정지되어 있지만, 의미론적으로는 움직임이 내재되어 있는 화면 속에서 권혁이 탐색하고 있는 움직임의 문제는 이처럼 서로 다른 유형의 작품들이 혼성적으로 조합된 가운데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일관성이 없는 듯한 혼성적인 작품경향 역시 권혁의 조형의식이 포스트모던의 미학에 기초하여 지극히 다층적이고 불확정적이라는 사실을 읽게 해주는 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다층적인 형식탐구를 관통하고 있는 그의 일관된 움직임에 관한 철학적 사유들 속에서 우리는 고정적인 관념의 지평을 넘어서고자 새로운 경계선상에서 끝없이 동요하고 있는 한 예술가의 눈빛을 목격하게 된다. 적어도 권혁이 자신의 조형적 탐색을 모더니즘의 유기체적 구조에서 독립시켜 나가면서 섬유미술, 회화, 설치, 영상등과 같은 매체의 자유로운 접합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 나가고 있음은 그의 미래적 전도를 내다보게 하는 분명한 지표가 아닐까. 욕망하는 것들의 존재론적 성찰을 지속해 나가고 있는 그의 유목적 여행에서 나는 경계위의 예술가가 연주하는 새로운 조형적 음률을 듣고 있다.(*)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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