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전시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전시상세정보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왈종전:꿈과 일상의 중도

  • 상세정보
  • 전시평론
  • 평점·리뷰
  • 관련행사
  • 전시뷰어

갤러리 현대는 2005년 3월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을 맞이하여 이왈종展을 마련합니다. 1945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하여, 1983년 미술기자상과 1991년 한국미술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이왈종은 1990년 대학교수직을 사퇴하고 현재까지 제주도에 머물며 오직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작가 이왈종은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혼연일체되어 한국적인 서정성을 표현합니다. 정감어린 해학과 따뜻한 색감은 제주의 색이며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일상의 풍경입니다. 서울에서 <생활 속에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오던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생활의 中道>란 주제로 전환하였으며, 이후 90년대 초부터 그의 작업은 제주에서의 <서귀포 생활의 中道>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업에서 보여지는 中道 란 평등을 추구하는 개념으로 인간과 물고기, 새, 꽃 등의 동물 또는 미물이 인간과 같은 생명선상에 놓여 모두가 세상의 근본이며 만물의 중심이 되는 동등한 개념입니다. 이왈종은 中道를 통하여 풍요로운 제주의 자연 속에서 주체나 객체가 없고 크고 작은 분별도 없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삶의 균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소재 또한 전통적 관념의 동양화에서 표현하는 이상화된 풍경에서 벗어나 TV, 골프채 등이 등장하는 일상의 삶입니다. 그 평범함 속에서 이상과 꿈이 화합된 독특한 세계를 이왈종의 화사하고 건강한 色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번 갤러리 현대의 이왈종展에서는 제주자연의 원생적인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은 작가의 작업세계를 <서귀포 생활의 중도>와 <색즉시공 色卽是空 공즉시색 空卽是色>이라는 두 개의 주제로 보여줍니다. 대작에서 소품까지, 회화에서 부조와 입체물, 그리고 부조판화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선보입니다. 특히 종이부조와 입체물들은 선묘의 미학을 한국화 조형의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함으로써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통념상의 장르를 뛰어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한 작품들에서 더욱 풍요롭고 완숙의 경지에 이른 이왈종의 작업세계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이왈종 꿈과 일상의 중도


1.
환경은 예술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환경은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의지에 의해 선택되기도 한다. 예술가들 가운데는 애초에 주어진 환경에 순치(馴致)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예술의 변화를 환경의 선택으로 인해 추구하려는 경우가 있다. 이왈종은 이 후자에 속하는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이왈종이 대학교수직을 사퇴하고 제주도로 떠난 것은 상식을 일탈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생활의 안정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위치의 교수직을 내팽개치고 홀홀 단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제주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또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다른 생활의 방편을 갖지 않고 오로지 작업에만 전념한다는 전업작가로서의 결행은 자신의 전체를 던지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한다면 올인작전에 비유됨직 하다. 그것도 단순한 도박이 아니라 자신의 생애를 건 올인이란 점에서 그 강도는 더욱 핍진(乏盡)함을 들어낸다.




이왈종이 제주행을 결심하게 된 시점인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미술작품이 교환가치를 지니는 품목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한국화는 일반의 선호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인기품목에서 밀려 난지 오래였다. 이 같은 상황을 떠올려보면 이왈종이 전업작가로서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는 것은 상식을 넘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만용으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남에게는 만용이나 객기로 비칠 수 있지만 막상 작가자신은 생애를 건 도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제주행은 유유자적한 삶을 실현하려는 것도, 풍류에 심신을 몰입하는 과거 예술가들의 도피적 방편도 아니었다. 자신을 변혁시키려는 치열한 의식의 결단이었고 창작에 자신의 전체를 던지는 진정한 용기의 구현이었다. 제주시대의 이왈종의 작품은 이 같은 전제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왈종의 제주생활 이후의 작품은 제주라는 환경과 결부되지 않고는 이야기 될 수 없다. 예술과 환경의 친연관계가 이토록 극명하게 나타나는 예도 흔치 않다. 제주의 삶이 이왈종의 세계를 풍요롭게 가꾸어준 만큼 이왈종의 작품은 제주의 원생적 풍광을 아름답게 구현해내었다.
이왈종의 서울시대 작품의 기조는 80년대 한국화단에 풍미하고 있었던 실경산수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의 실경산수는 단순한 실사(實寫)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형적인 체를 거친 구성된 산수라는 점에서 이채로움을 지닌 것이었다. 제주시대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풍부한 구성의 인자는 서울시대의 실경산수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서울시대의 작품이 <생활의 중도>란 명제로 일관하고 있듯이 제주시대에도 여전히 <서귀포생활의 중도>로 연면되고 있다. 중도란 일종의 중용의 정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삶의 균형을 모색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작업이란 다름아닌 자신의 삶의 기록이고 삶의 지침이며 일상을 향한 대화이기도 한 것이다. 단순한 일상의 현장을 묘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반영된 삶의 흔적들을 되새김질하는 고백의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종의 자전(自傳)의 서술로서 말이다. 자전(自傳)은 가식된 것이 아닌, 자신을 전체로서 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최근 작품에서 유독 눈에 띄는 골프의 장면도 골프에 심취되어있는 일상의 단면을 고백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왈종의 작품이 자신의 일기 또는 독백과 같은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것들이 결코 정직한 기술에 의해 구현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일상과 환상, 생활과 꿈이 서로 결속되지 않는다면 내용이란 평범한 서술에 머물 뿐이다. 일상이 환상과 직조되고 생활이 꿈의 경지로 삼투되면서 일상이자 동시에 환상, 생활의 단면이자 동시에 생활 저 너머의 꿈의 세계 그 어디에도 경사되지 않는 균형감각을 이루고 있다.
제주는 육지에서는 맛볼 수 없는 환경의 풍요로움과 자연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왈종의 화면에 등장하는 화사하고 무르익어가는 색채의 건강성은 밝고 따스한 제주의 풍광에서 기인된 것이다. 제주의 자연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풍요로운 색채의 향연은 진작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2.
이왈종의 세계가 갖는 내면은 주제에 있어서 일관성과 방법의 다양성에서 점검된다. <생활의 중도>란 주제의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방법상에서의 변혁과 시도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다. 특히 최근 3년 사이의 작품군에서 만나는 방법상의 다양성은 비유할 수 없는 것이라 할만 하다. 평면에서 부조를 거쳐 입체물에 이르고 있다는 것은 조형의 전체적인 영역에 걸친 것이라 할만 하다. 평면에서 입체물에 이른다는 것은 통념상의 장르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평면과 입체가 서로 나누인 별개가 아니라 평면의 연장에서 부조가 등장하고 그것의 발전적 문맥 속에 입체가 놓이고 있다. 그러니까 단순한 여러 장르의 섭렵이 아니라 조형의 발전적 문맥의 필연에 의한 것이다.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자신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는 것은 매재(媒材)에 대한 제약을 스스로 극복해감을 말해준다. 그만큼 장인적(匠人的) 정신의 구현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넘나들고 있는 영역을 보고 있으면 한 사람이 시도해나가기엔 너무 벅차 보인다. 특히 나무판을 파나가는 목각의 작업이나 도판(陶板)을 만들어 가는 작업은 단순한 평면작업에선 상상할 수 없는 시간과 노동량이 요청된다. 이만한 작업의 양을 실현해가기 위해선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치열한 장인적(匠人的) 숙련이 수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해 보인다. 평면회화 역시 손의 작업이다. 그러나 목각이나 도판(陶板)은 입체성을 전제로 하는 것만큼 손의 작동이 더욱 요청될 뿐 아니라 구성에 있어서도 치밀성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 밖에 없다. 평면회화를 제외한 부조나 입체물이 하나같이 이처럼 밀도 높은 구성과 완성도를 전제로 한 것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대체로 최근작들은 평면보다 부조와 입체물이 단연 많은 분포이다. 어쩌면 하나의 전기로 읽을 수 있는 변화의 양상이다. 작가자신도 평면에서의 지루함에 비해 부조나 입체가 훨씬 작업하는 재미에 빠진다고 고백하고 있다. 방법의 다양성은 매재(媒材)의 진폭을 그만큼 넓힌 것이 되고 있다. 방법이 다양해진다는 것은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3년간의 작업목록을 일별(一瞥)하면 장지를 바탕으로 한 평면회화에서 도판(陶板), 목각화, 목각에서 수반되는 목판화, 그리고 같은 평면이긴 하지만 이채로운 순금판회화와 화첩이 있고 입체물로는 향로의 기능을 지닌 오브제와 순수한 입체작품으로 분류된다.
평면의 내용이나 입체물의 내용은 일관된 관심의 띠 속에 놓인다. 방법의 다양성에 비해 내용은 그만큼 함축적이다. 평면작업도 장지를 여러 겹 발라올려 다분히 입체감을 띠고 있다. 그것의 발전이 목각이나 도판(陶板)으로 이동되었음을 직감한다. 평면에서의 물성(物性)의 강화가 부조와 입체로 진행된 것이다.





3.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은 <서귀포생활의 중도>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두 개의 주제로 분류된다. 전자가 일기와 같은 생활의 단면을 기술한 것이라면 후자는 다분히 종교적인 관념을 지닌 것이다. 전자가 차안의 세계를 모티브로 한 것인 반면 후자는 피안의 관념을 구현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주 서귀포의 생활이란 육지의 그것과는 다른 더없이 단조로운 것일 수 있다. 더욱이 창작에만 전념하고 있는 작가의 경우 창작의 생활이란 판에 박은 것 같은 것이다. 그런 만큼 화면에는 내용상에서의 별다른 기복(起伏)을 찾을 수 없다.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 집과 뜰과 그 너머로 전개되는 바다가 주 모티브로 떠오를 뿐이다. 안이 다 들어나 보이는 집안은 때로 남정네가 뒹굴고 있거나 때로 남녀가 어우러져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일상의 풍경으로만 비치지 않는 것은 수선이나 도라지 같은 땅바닥에 피어있는 작은 식물들이 집채보다 더욱 크게 그려진다던가 갑자기 하늘로 물고기가 날아오른다던가 하는 의외의 설정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으레 마당가엔 사슴이 기웃거리는 모습이 걷잡힌다. 이 같은 설정은 다분히 초현실적이다. 현실에서는 가당치 않는 정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정경이 초현실로 함몰되지 않는 것은 예컨대 안방에 놓여있는 TV나 집 모서리에 기대여 있는 골프채 같은 지극히 문명적인 오브제가 첨가되면서이다. 초극적인 정경과 가장 현실적인 문명의 잔해가 어우러져 초현실도 현실도 아닌 중간항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원래 동양화에선 산수 속에 일체의 세속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이상경(理想境)에 도달하기 위한 장치로서 말이다. 그런데 이왈종의 화면에선 이런 금기가 완전히 깨어지고 있다. 꽃이 만발한 속에 사슴이 기웃거리는 장면쯤이면 일종의 도원(桃源)의 경지로 볼만 한 데 엉뚱하게도 TV나 전화기나 골프채를 등장시킴으로써 이상적 풍경으로서의 기대를 단숨에 지워버린다. 순후한 자연과 문명이 한 자리에 만남으로서 일어나는 위화감, 그 위화감에서 파생하는 잔잔한 충격은 화면에 신선한 시각적 충일을 동반시킨다. 이 역설의 화해야말로 느슨하게 빠질 수 있는 화면의 체온을 단연 조여주는 긴장감이다. 화면에 흩어져있는 대상들이 때로 성좌와 같이 빛을 발하는 것도 어쩌면 이 역설이 만드는 화해의 장치에 기인됨이라 할 수 있다.
제주는 아열대 특유의 기후조건에 어울리는 식물군들로 에워싸여 있다. 길모퉁이에 피어있는 수선화나 뒷담결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유도화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정경이다. 여기에다 동백, 매화, 모란, 엉컹귀, 도라지, 국화와 또 다른 이름 모를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이 화사한 식물들이 품어내는 향기와 색채가 현실이면서 부단히 피안의 풍경으로 함몰되게 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왈종의 화면에서 만나는 자연과 더불어란 화두는 단순한 자연 속에 묻혀 자연을 노래하는 범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자연을 일체화시키는 범신적(汎神的) 관념에 의한 것이다. 범신적(汎神的) 경지란 인간과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자연이 주체와 객체, 중심과 주변이란 상대적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위상(位相)을 점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사람이나 동물이 또는 산이나 바다가 그 속에 사는 일체의 생물들과 어떤 위계도 갖지 않는 동등한 관계 위에 설정된다. 이 같은 위계의 일탈은 원근과 대소의 관계까지를 지운다. 혼연의 일체로 함몰되는 장치이다. 이 초현실적 발상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초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것은 현실과의 적절한 간극(間隙) 유지에 의해 지탱된다. TV나 골프채는 꿈으로만 빠질 수 있는 미망에 대한 적절한 제어장치이다.




4.
목각과 도판(陶板)은 부조의 형식이다. 평면에서 양각으로 돌출되면서 일정한 바탕을 지닌다는 점에선 완전한 입체물과는 차별된다. 평면회화가 숙명적으로 추상적 관념을 지닐 수 밖에 없는 작업인 반면, 부조는 관념과 현실, 막연함과 구체성의 중간지대에 놓인다. 평면의 추상성과 입체의 구체성을 적절히 함축한다고 할까. 주어진 판이란 제약의 면에선 평면회화의 바탕조성과 일체 될 수 밖에 없으나 양각으로 돌출된다는 점에서 부단히 평면의 한계를 일탈하려는 의지를 지닌다. 그만큼 단순한 평면에서 엿볼 수 없는 구성의 밀도를 획득할 수 있다. 이왈종의 일련의 목각이나 도판(陶板)에서 보이는 강도 높은 구성의 밀도는 실로 이에 말미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목각의 주 모티브는 화조이다. 여기에 때때로 평면의 연장으로서 일상의 풍경적 단면이 첨가된다. 내용적인 면에서나 방법의 면에서 목각은 결코 낯설지 않게 보인다. 그것은 우리들이 흔히 보아왔던 절간의 문창살이나 민간사회의 소박한 목기류에 연면되고 있기 때문이다. 투박하지만 정감이 가는 목가구의 기술이 이왈종의 목각기술에 그대로 겹쳐온다. 그래서 소박한 옛 민화를 대하는 것 같은 반가움을 동반한다. 목각은 단순한 부조로서 남아나기도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다시 찍어냄으로서 목판화가 태어난다. 독립된 영역으로서의 목판화이면서 동시에 목각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다.
<서귀포의 생활의 중도>가 주로 평면에서 부조에 걸쳐 있는 반면<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시리즈는 더욱 화사한 색채와 입체적인 구성이 중심이 된다. 도판(陶板)이나 입체조형물은 테라코타상태에서 황장토를 입혀 다시 구어냄으로서 완성된다. 도조(陶彫)작업 가운데서 이채로운 것은 향로이다. 마치 토템같이 생긴 원추형으로 속에 향을 피우고 윗 부분에 뚫린 몇 개의 구멍을 통해 향기가 스며나오게 하였다. 그 형태나 여기에 가해진 각가지 환상적인 모티브나 향은 단순한 일상적 기물이 아니라 제의(祭儀)용임을 암시한다.
이왈종의 작품은 때로 묵상의 종교적 관념에 빠지게도 하지만 가장 세속적인 모티브를 여기에 첨가시킴으로써 성속을 가로지르는 기이한 정경을 일구어 놓는다. 근엄한 종교적 기물 속에 에로틱한 남녀의 성희장면을 새겨 넣는 충격적 장치가 그것이다. 어쩌면 이 역시 중도로서의 균형감각인지 모른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면서 성도 속도 아닌 중간항으로서의 균형 말이다.
그가 지금껏 다루어온 작품 가운데 성희장면은 가장 빈번히 등장되었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이 수치스럽지 않고 건강하게 비친 것은 해학적인 장치를 통한 삶의 진정성에 기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왈종의 성희장면이 수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건강한 표백임으로해서 잔잔한 웃음을 머금케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포르노의 경지를 저만치 벗어나 있다. 이 건강한 성희장면은 이번 작품 가운데 특별히 화첩형식으로 꾸며지고 있다. 화첩이란 그림으로 이루어진 책자형식으로 공공의 장소에 걸리는 유형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본다는 은밀한 내면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반 공개적인 형식이다. 떳떳하게 내거는 것이 아니라 은밀히 펼쳐보는 그림이란 점에서 에로티시즘의 금기적 사항을 암시하고 있다.
또 하나 새로운 형식으로 순금판 양각화를 들 수 있다. 엷은 순금판에 양각의 선획으로 이미지를 아로새겼다. 과거엔 금박이나 금동판 같은 형식의 조형물들이 제작되었다. 종교적 목적이나 세속적인 위엄을 구현하려는 목적에서 빚어졌다. 이왈종의 순금판 회화가 이런 목적의식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매재(媒材)의 실험이란 넓은 시각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5.
이왈종의 세계는 제주시대를 맞으면서 더욱 풍요로운 내면과 완숙의 경지를 아울러 보여주는 듯 하다. 환경이 예술가에게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다시금 실감시킨다. 제주가 지닌 천연의 자연과 원생적인 감정이 단순한 현실적 정경으로서의 제주가 아니라 원형으로의 회귀의식을 불러일으켰다는데 이왈종 예술의 진정한 면모가 있다. 그의 화면은 제주의 자연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지만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원형으로서의 자연, 원생적인 삶의 영역으로서의 초대이다. 어느덧 작품을 보고 있는 사람들도 현실과 꿈이 서로 교직되는 독특한 환상의 여울에 자신도 모르게 함몰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할 것이다.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평론가)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6시 (월요일 휴관)
입장료 : 무료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