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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조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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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성과 타자의 대화

‘내가 과연 나일까’. 불혹(不惑)의 나이지만, 작가란 끝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갖게되는 의혹(疑惑)이다. 그 동안 인간과 휴머니즘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온 김석이 이번 전시에서 기존 주제의 연속성 상에서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전시장에는 자신을 나타내는 여러 상들이 등장한다. 브론즈 전신상, 플라스틱 두상, 사진, 공문서 형식들, 온갖 허접 쓰레기가 담겨있는 상, 심지어는 X-ray 사진까지. 이를 통해 자신의 본질이 영혼인지, 몸인지, 상징적 기표인지 등등을 묻고 있지만, 그저 가능한 자신의 모습들을 종류별로 나열한 것을 넘어선다. 그의 작품은 정교한 자소상의 개체적 형태도 주목할만하지만, 설치라는 작업을 통해 항목과 항목이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메시지가 드러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동안 많은 개인전을 통해 인간 형상을 바탕으로 실험적 설치를 해왔던 김석은 이번 전시에서 보다 정제된 인간 형상조각을 설치와 결합시켰다. 꼬박 3개월이 걸렸다는 2미터 높이의 정밀 브론즈 작품이나 플라스틱 덩어리를 거의 ‘지문이 닳도록’ 갈아만든 두상은 노동과 솜씨라는 기본적인 과정에 충실하면서, 의문에 붙여진 나를 작업에 몰두하는 자신으로 전치시킨다. 동시에 어느 휴머니스트의 은밀한 눈물에서처럼 전시 자체를 자신을 채찍질하는 매개로 삼는다. 이 작품은 자신의 모습을 정형화된 고대 로마시대의 조각상처럼 새기고, 산에서 구해온 회초리 나무가 전기장치에 의해 움직이면서 조상을 채찍질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눈에서는 푸른색 눈물이 나오는 이것은 작가가 고백대로 고해성사 같은 작품이다.




작품 내가 과연 나일까는 투명 플라스틱 액에 산업쓰레기, 폐기물, 쓰던 잡다한 물건들을 넣은 자소상과 2미터 높이의 정밀 주조 브론즈를 마주보게 했다. 그 사이에는 자신의 전신 뼈가 드러난 X-ray 필름들을 연결시켜 아크릴 사이에 넣어 걸어서, 마치 거울상처럼 서로를 가리키며 바라보고 있다. 폴리코트로 만들어진 상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있어 키치적인 양상을 띈다. 상대적으로 고대 조각의 포즈를 닮은 정제된 형식의 브론즈 상은 원본같이 보여진다. 진짜와 가짜가 사진이라는 거울을 사이에 두고 대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이 전시는 자기 동일성에 대한 오랜 철학적 주제를 들추어낸다. 동일률의 통상적인 형식은 A=A이라는 것이다. 동일률에 의하면 나는 나인 것이다.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동일성은 ‘존재에 내재하는 근본특성’이라고 표상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동일성과 차이’에서 동일함 속에는 함께의 관계, 하나의 매개, 연합, 종합, 즉 통일성을 지향하는 하나됨이 놓여있다고 강조한다. 이 때문에 동일성은 사유의 역사를 관통하여 줄곧 통일성의 성격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동일성의 통일성이야말로 존재 속에서 근본 특성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 동일성은 그저 단 하나만을 단단히 고수하는 어떤 것, 즉 단순히 똑같기만 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동일성을 추상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김석이 던지는 ‘내가 과연 나일까’라는 질문은 단지 내가 무엇인가라는 협소한 질문에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나를 통해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통로라는 생각의 발로이다. 사실 추상적인 동일성은 공통의 언어나 보편성을 앞세우며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시키는 폭력을 행한다. 그러나 동일자는 타자와 다른 것으로 설정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어떤 것이 진실로 그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또한 그 자신과 다른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요컨대 동일성은 차이에 의해 유지된다. 김석의 작품에서 동일성, 즉 정체성identity은 여러 가지 모습을 띄고 나타나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각인하고 있다. 그것은 주체의 유동성을 표현함과 동시에, 결국은 달성되지 않을 전체성과 자아됨selfhood의 환상을 나타낸다.

자아상에 대한 동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입장은 주체가 언어에 의하여 언어 속에서 구성된다는 라캉의 명제이다. 김석의 작품 중 나의 본질은 전시장 모서리를 막은 유리판으로, 그 옆에 초상사진이 있는 작품인데, 유리에는 이름, 주민번호, 주소, 등 자신을 상징하는 언어들, 기표 등이 음각 되어 있다. 그것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상징계의 언어로 성문화된 자신의 모습이다. 동일성은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 즉 타자를 통해서 규정된다. 여기에서 타자란 주체가 아닌 모든 사람만이 아니라, 주체가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사물에도 해당되는 궁극적인 기표이다. 라캉에게 타자의 발견은 말하는 능력과 나와 너를 구별하는 능력의 획득이다. 이 두 능력의 획득은 사회적 정체성의 획득과 동등하며, 그것과 병행하여 일어난다. 삶의 최초의 순간 바로 그때부터 충동은 타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발현되는 것이다. (조셉 칠더즈 편 [현대 문화사전] 참조)




김석의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거울이 존재한다. 가령 ‘내가 과연 나일까’에서 플라스틱과 브론즈 사이에 존재하는 X-ray사진이 그렇고, 마찬가지로 3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진 작품은 최초의 자아상을 그리는 라캉의 거울단계를 연상시킨다. 사진작품은 X-ray사진과 피부를 가진 실제의 모습을 담은 사진, 그리고 플라스틱 두상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가지 이미지는 모두 거울상이라 할만한 것으로서, 동등한 비중으로 처리되어 있다. 뼛속까지 투사된 모습이든, 현상적인 모습이든, 껍데기의 모습이든, 그것들은 거울상이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교란된 허상들처럼 보인다. 김석의 작품은 정체성을 묻는 동시대 다른 작가들이 하는 방식, 가령 여러 가지 역할연기나 분장의 방식이 아니라, 최대한 자신을 닮은 상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동일성 속의 미세한 차이들을 유지하고 있다.




라캉에 의하면 자아는 거울상과 동일시함으로서 생겨난 구조이다. 자아가 바로 거울상이 만들어내는 상상적인 형성물, 즉 착각의 자리이기 때문에 자아의 힘을 증가시키는 것은 결국 주체의 소외를 증가시킨다. 자아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소외는 편집증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거울상을 보여주는 김석의 작품은 자아의 고착성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얼굴들을 재확인하는 것에 머문다면 동일성의 논리에 한정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아상에 대한 많은 변형들을 결합과 연결이라는 철학적인 방식으로 배열한다. 이 배열을 통해서 비로소 메시지가 만들어진다. 전시장의 다양한 분신들은 자신의 존재를 외치면서도 존재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동일성의 본질이 요구하는 것이 도약이라고 말한다. 동일성의 본질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사유, 이러한 진입은 어떤 하나의 도약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시간을, 즉 사유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유의 시간은 오늘날 도처에서 우리의 사유를 저해하는 계산적 시간과는 다른 것이다. 가령 김석의 작품에서 X-ray 사진으로 나타나는 계산 가능성의 인간은 본질이 결여되어 있는 표상양식으로 나타난다. 그 푸르스름한 이성의 빛은 객체에 대한 주체로 전락하고 말았던 이성적 동물이라는 통상적인 표상개념에 머문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동일성의 양식이 된 과학의 거울은 모든 것을 자신의 규범으로 환원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적인 방식조차도 어떤 관계맺음을 통하여 생기를 획득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사유와 함께 동일성으로 들어가며, 이 동일성의 본질은 ‘함께 속하게 함’, 즉 생기로부터 유래한다.

또한 얼굴을 맞대고서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김석의 작품은 근대의 자아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시각중심주의를 벗어나 듣는 것을 중시한다. 여기에서 세계는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들려지는 것’ (자크 아탈리) 이다. 소리를 주제로 한 작품이 바로 나의 소리이다. 그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정교한 작가의 두상이 스피커들이 들어있는 투명 큐브들로 둘러싸여 있다. 스피커에서는 일상적인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삶의 소리를 채록한 것으로,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특별한 중심이 없이 풀어놓는다.






정화열은 자신의 책 ‘몸의 정치’의 동일성과 차이를 논한 한 장에서 바흐친을 인용하며, 존재한다는 것은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고 의사를 소통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로 볼 때 이질적이고 다성적인 언어, 담론, 의미, 음성 즉 이종(異種)언어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동일성을 결국 차이를 불러들이는데, 차이의 논리는 그것이 타인의 타자다움을 뚜렷히 다르게 한다는 점에서 대화적이다. 자신의 진정한 동일성은 타인의 근본적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아와 타자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대화적 양식을 통해 타자를 부정하고 흡수하는 경직된 동일성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다.

이선영│미술평론가





서울올림픽 미술관 개관기념전 정지와 움직임의 행사 일환


작가와의 만남

제목 : 인간형상을 통한 작업의 전개
시간 : 14:00~16:00
일정 : 2004년 11월 5일(금)
장소 : 서울올림픽 미술관 세미나실
서울 송파구 방이동88번지 서울올림픽미술관 Tel. 02) 410-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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