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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 돈황벽화전:영원한 사막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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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벽화의 창조적 계승 혹은 徐勇의 작업


敦煌, 돈황이라. 돈황, 얼마나 환상적인 발음이었던가. 竹의 장막이라던 시절, 즉 중국이라는 국호 대신에 중공이라고 불렀던 시절, 나는 빛 바랜 책갈피에서 돈황이란 말을 접하고 설레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던 추억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쟁투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갈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그러니까 더욱더 그리움의 대상으로 떠올라 안타깝게 하던 곳이었다. 돈황은 敦煌學이란 용어를 낳게 했듯이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이룩한 세계적인 보배이다. 그곳은 고대 동서문화 교류의 현장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권이었다. 실크로드의 화려한 꽃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 나는 중국대륙을 여행할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그것도 3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일정동안 백두산으로부터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의 나그네 길을 이룩해 낼 수 있었다. 이 중국여행은 나의 인생행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실크로드와의 만남이었다. 또한 실크로드 한 복판에 돈황이 있었다. 1988년 9월, 나는 돈황에서 눈물을 흘렸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돈황을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다니!!!

돈황과의 인연은 곧 본격적인 열애관계(?)로 발전되었다. 나는 수시로 현지에 달려가 애정을 확인하곤 했다. 그것은 한 여름이건, 한 겨울이건, 계절을 탓하지 않았다. 아니, 어느 해인가는, 신년의 태양을 돈황에서 맞이한 적도 있다. 그러면서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보다 본격적으로 돈황의 품에 안길 수 없는 처지가 안쓰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하여 나는 우리의 후학이 이곳 돈황에서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기회가 하루라도 빨리 오기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해인가. 늘 하던 연례행사처럼 나는 실크로드기행단을 인솔하고 돈황에 갔다. 거기서 나는 뜻밖의 미술학도를 만나고 들뜬 기분을 가졌던 바 있다. 돈황학의 현장에서 젊음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커다란 축복이지 않을 수 없다. 축복을 만끽하고 있던 미술학도는 바로 서용이었다. 그는 활기찬 어조로 돈황의 생활에 대하여, 자신의 연구에 대하여, 아니 돈황학의 현황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모국어로 듣는 돈황에 대한 이야기는 출발부터 동지적 관계로 묶이게 했다.





서용은 학부에서 彩墨의 전통회화를 연구하고 이어 북경으로 달려가 중앙미술학원의 벽화과에서 석사를 마치었다. 이어 그는 현장에서 돈황벽화와 본격적으로 대면하면서 연구에 매진했다. 그것의 결과는 蘭州大學에서 돈황학 박사학위로 이어졌다. 참으로 고군분투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하기야 문무겸비라는 것이 말과 같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이제 학문적 배경은 창작생활로 이어져 본격적인 작품으로 연결되고 있다. 돈황과 벽화라는 그의 독특한 연구성과는 그의 창작에 남다른 기대를 걸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후예이면서도 오늘날 미술계에서 벽화에 대한 소홀함은 그의 활약을 더욱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다.

돈황의 꽃은 막고굴 석굴이며, 그곳은 彩塑와 벽화로 가득 채워진 사막의 미술관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기련산맥과 고비사막 그리고 타크라마칸 사막의 사이 즉 삼위산맥 언저리의 명사산이 있는 곳, 거기 하천을 따라 이루어진 절벽에 굴을 뚫고 석굴사원을 이룩하였다. 바로 돈황의 막고굴 석굴이다. 이는 4세기 중반 처음으로 뚫기 시작하여 元代 14세기까지 시대를 달리하면서 꾸준히 경영되었다. 1천년간 조성된 작품, 그것은 연대기상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현재 확인된 석굴의 숫자는 492개로, 千佛洞이라는 말과 무관하지 않다. 각각의 석굴에는 塑像 2천여 구, 그리고 사방을 가득 메운 벽화, 벽화의 총면적만 해도 4, 500평방미터로 길이로 치면 45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실로 엄청난 규모에 감읍할 따름이다. 어떻게 사막 한가운데에 이렇듯 엄청난 규모의 조형물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이들 석굴의 전성시대는 역시 당나라 시대로 현존 석굴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다. 하기야 당나라 당시 돈황의 인구는 2만 명 가량, 그 가운데 스님만도 1천명 정도였다니 인구 스무 명에 한 명이 승려였던 셈이다. 이렇듯 돈황 불교의 흥성은 곧 막고굴 조성에도 반영되어 화려한 석굴사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돈황 벽화의 찬란함도 고난의 세월을 맞기도 했다. 오랜 동안의 폐허는 20세기초 그 존재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臧經洞의 유물은 세상을 흥분하게 한 바 있다. 신라승 慧超의 [往五天竺國傳]도 장경동에서 나온 귀중한 인도여행기가 아니었던가. 돈황은 우리에게 있어 결코 강 건너의 등불만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고대의 코리안들이 돈황 현지를 방문했을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실크로드의 유산은 이 점을 입증시키고 있다.


서용이 돈황에서 오랜 세월동안 연찬한 것도 결코 예사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화가에게 있어 돈황은 매우 훌륭한 스승이었을 것이다. 대만의 張大千이 일찍이 돈황에서 벽화를 모사하면서 필력을 기르지 않았던가. 한동안 동양의 피카소라고 칭송을 받으며 작가활동을 했던 장대천의 기초에 돈황 벽화가 있음을 숨길 수 없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傳移模寫를 중시여기는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돈황 벽화의 모사는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돈황에서 서용의 벽화 모사작업도 적지 않은 성과를 안겨주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의 창작품 속에 돈황 벽화의 율조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서용의 근작은 돈황 벽화를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조형의지를 가미시킨 작업이다. 사방연속문양처럼 일정한 크기의 化佛을 화면 가득히 배치하고, 중앙에 별도의 불화를 넣어 핵심을 이룬 작품은 정공법의 산물이다. 돈황 벽화 가운데 천장 그림으로 가장 아름답다는 제390굴의 경우가 생각나는 형식의 그림을 말한다. 그의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든가, <樹下說法 千佛圖>같은 작품이 이 경우에 속한다. 이들 작품은 아마 忍苦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功力을 요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변상도 계통이라든가, 불화의 한 부분을 응용한 것 혹은 돈황 벽화의 한 부분을 응용한 것 등 다양한 작업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용의 작품은 돈황 벽화를 기본으로 하여 ‘창조적 계승’의 창작 의지를 읽게 하지만 무엇보다 불화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는 특징을 주목하게 한다. 전통적 방식을 존중하면서 부분적으로 현대적 감각을 부여했다. 이는 단순히 모사의 수준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의 진입을 의미한다. 아마 돈황 벽화가 지니고 있는 원색의 화려함 대신에 중후한 색채로 바꾼 것도 그러한 의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서용 작품에서 불화의 현대화 혹은 벽화의 현대화 작업의 가능성을 점쳐 본다. 두 부분 모두 중요하다. 이는 우리 화단의 약한 고리로서 새로운 돌파구를 요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돈황에서 7년 이상을 연구한 서용에게 거는 기대가 적지 않음은 바로 위와 같은 문제점에서 비롯된다. 다만 이 자리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돈황 벽화 역시 불화라는 점이다. 벽화의 기법연구로 돈황을 주목했을지라도 내용은 불교적 세계관의 조형적 표현이라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기법만 가지고 작품을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형식은 충실한 내용을 담보할 때, 더욱 빛나는 법이다. 기법이나 형식에서 이제 내용까지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자세를 점치게 한다. 돈황의 위대함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본다. 각각의 시대마다 그 시대에 걸맞는 시대정신을 창출했다는 점, 나는 이 점을 주목하고 있다.

돈황은 이제 우리들의 곁에 있는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윤범모│미술평론가









첫 번째는 돈황벽화의 객관적 표현이다.

한국이 그렇듯이 중국 역시 젊은 미술학도들이나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문화가치를 인식 못하고 서양문화의 한 귀퉁이라도 닮아가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많이 접하게 된다. 예술 활동에 있어서 다양성은 인정되어야하고 폭넓은 경험과 자유로운 가치기준은 계발啓發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치관이 결여된 한시대의 유행만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추종은 결국 정체성正體性을 상실한 공허한 예술만을 양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나는 돈황에 와서 그림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마음속에 두었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내 속에 채워왔던 것들은 비우기 위해 그리고 그동안 몸속에 길들여졌던 버릇들을 버리기 위해 모사작업부터 시작했다. 임모작업에 적지 않은 시간을 바치면서 천여 년의 시간을 훌쩍 넘어 천 여 년 전의 화공들과 직접적인 교감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용필 법을 알려 주었으며 착색 법을 알려 주었다, 아주 자상하게 먹선墨線은 이렇게 그어라 색은 이렇게 칠하고 선염渲染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돈황벽화는 나의 가장 큰 스승이고 자상한 선배였다. 임모작업을 하며 현대의 문명은 과거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예술은 왜 그에 못 미치는가. 나 자신이 비정상적으로 양육되어 심각한 장애를 격고 있는 장애인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둘째는 돈황벽화의 주관적 표현이다.

돈황을 포함하는 중국의 서북지역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된 곳이고 척박한 곳이다. 그 척박한 만큼 이곳엔 힘이 있고 남성적인 강한 기운이 있다. 난 이 땅이 주는 그 기운을 사랑한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우주의 기운을 모아 가로 그어놓은 일필의 먹선을 대한 듯 통쾌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낀다. 그곳엔 공백空白이 아닌 한 폭의 수묵화에서 볼 수 있는 여백餘白의 함축된 미가 있었고 비움의 미학이 있었다. 그 기운은 내 정신의 식량이 되었다. 임모작업과 병행해서 나는 돈황벽화를 재해석해서 창작으로 연결해보려고 시도 했는데. 돈황벽화의 찬란함과 동시에 돈황의 땅이 주는 기운을 어떻게 내 그림에 담아 낼 것인가 하는 게 일괄된 화두였다. 그러나 추상적인 느낌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담아낸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走進敦煌‘보다’走出敦煌‘은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다.

총체적으로 이번 전시에는 7년의 시간동안 내가 바라본 객관적인 돈황의 인상과 주관적인 돈황의 인상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즉 임모성이 강한 작품과 창조성이 강한 작품이 동시에 보여지는데 임모성이 강한 작품의 경우 돈황의 벽화를 차용하되 다시 재구성하여 변형을 주는 방법과 하나의 화폭에 임모와 창작을 같이 섞는 작업을 시도 했다. 또한 창작성이 강한 작품의 경우 임모작업을 선행한 후 그것을 부분적으로 갈아내어 약간의 흔적만을 남기고 그 위에 창작을 진행했는데 전통의 기초위에 현대인의 감수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난 화가다.

지금은 인문계열의 역사학과에서 돈황학 박사공부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화가고, 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좋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것이다. 내가 돈황에 온 것은 그 궁명사산 절벽에 문득 금빛이 번듯이는 걸 보고 마치 천불이 있는 것 같아 이곳 돈황에 석굴을 개굴을 했다고 했는데 나는 매일 착각속에서 번득이는 금빛이 아닌 영원히 존재하는 예술을 본다. 다른 사람들이 서방을 향해서, 현대를 향해서 치달으며 그곳에서 가치를 읽으려 노력하고 있을 때 난 오히려 뒤로 돌아서서 동양의, 그리고 천오백 년 전 과거의 벽화 한 조각에서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고 흥분한다.

오랜 시간 돈황의 벽화가 찬란함을 지키고 있듯이 나는 처음 돈황벽화를 대할 때의 충격과 감동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으며 어쩌면 그것이 나를 이렇듯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에서도 버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인지도 모를 일이다.


벽화는 영원히 살아 숨쉬는 예술이다.

- 작가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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