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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젠느 앗제(Eugene Atget)사진전 : 앗제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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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젠느 앗제(Eugene Atget 1856~1927) 의 사진과 생애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사진은 정직하다는 점이다.
피에르 마크 오를랑(Pierre Mac Orlan), 1930

당시에는 알려지지도 않고 올바로 평가받지도 못했지만,
삶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조용히 작업하던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그의 생애 후반부터 강한 집중력과 성숙된 안목으로 사진을 만들어 갔다.
그의 이름은 으젠느 앗제였으며, 세상에 수많은 사진을 남겨 놓았다.
그는 사진의 본질적인 의미를 정열적이고 집요하게 찾으려고 애썼다.
배러니스 애보트(Berenice Abbott), 1951

앗제의 작업은 오늘날 사진의 구약성경이다
주명덕, 1984




전설적인 사진가이자 현대사진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으젠느 앗제의 사진 작업과 그의 생애가 어떤 미학적, 역사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들이다. 첫 번째는 앗제의 사후 처음 출판된 사진집 Atget Photographe de Paris의 서문에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던 오를랑이 말한 앗제 사진의 핵심적 미학이다. 두 번째는 미국 근대사진의 대가이며, 너무도 유명한 사진가 다이안 애버스(Diane Arbus)의 사진 스승이기도 했던 베러니스 애보트(Berenice Abbott)가 미국사진에 뿌리 깊게 내재한 픽토리얼리즘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여기에 앗제를 견주어 자신의 사진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글 ‘It has to Walk Alone(1951)’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나라 사진의 대가인 주명덕이 사람들과 사진을 논할 때 항상 말하는 언명이다.

물론 우리는 애보트의 경우 그녀가 파리에서 생활할 때 만 레이(Man Ray)의 조수를 지내면서 앗제와 개인적인 교분을 갖기도 했고 또 앗제를 미국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도 앗제의 작업 스타일에 경도되어 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이들의 이러한 평가는 실제 앗제가 사진사에 남긴 위대한 족적과 수많은 사진들의 가치에 비하면 결코 과장됨이 없는, 오히려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칭찬에 불과하다.




앗제의 사진과 그의 여러 작업이 역사적으로 엄청나게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유를 알려면 그가 주로 작업을 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럽과 미국의 사진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작업의 양과 집념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의 사진은 오히려 단순하고 평범한 기록으로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평이한 사진으로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앗제의 작업은 오늘날 평이하고 사진의 주류로 보이는 형태의 작업을 가능하게 한 정신적, 미학적 혁명을 성취하고 있다. 그가 활동했던 당시에 있어 사진의 주된 경향은 인간을 의도적으로 장식하고 포장해서 그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자연스러운 귀족의 모습으로 만들거나 도식적인 명함판을 양산하는 초상사진의 영역, 그리고 사진에 여러 가지 조작을 가해 피그멘트의 효과를 내면서도 사물의 인식체계는 여전히 17,8세기 낭만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예술 지향적 사진의 영역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런 경향을 완전히 거부하고 현대사진의 이정표를 세운 앗제의 사진이 갖는 혁명적 성과는 곧 드러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의 역사에서 앗제는 두 가지 부분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중 하나는 다분히 미국을 중심으로 생겨나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견해이며 비교적 최근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앗제가 오늘날 사진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현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척자이며 이전의 역사에서는 다분히 무시되어 왔던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사진사의 전면에 복원시킨 위대한 선각자라는 평가이다. 이런 시각은 앗제가 남긴 수천 장의 사진이 19세기 말 대도시로의 급격한 변화과정 속에 있었던 프랑스 파리(Paris)와 그 근교인 일드프랑스(Ile-de-France)지방의 세부적인 모습을 백과사전적으로 그리고 정밀한 지도를 그리듯이 담담히 기록하고 있고, 또 이러한 기록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수반하는 인간의 소외-사실 그의 사진에는 사람의 모습이 얼마 없지만-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의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들 즉 베러니스 애보트,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다이안 애버스(Diane Arbus) 등은 실제 앗제의 사진에서 자기 작업의 원형을 발견했고, 이를 토대로 작업의 형식을 만들어 가기도 할 만큼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특히 미국사진의 가장 위대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추앙받는 워커 에반스의 경우는 죽기 직전 ‘나는 작업 스타일에 있어서 내 자신이 앗제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그의 사진을 자주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게 남아있는 불안의 잔재이며, 앗제 사진의 위대한 장점과 그의 스타일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앗제가 사진의 방법론으로 고수한 ‘직설적 사진(straight photography)’의 엄격함 그리고 일정한 지역을 사진의 대상으로 하면서 추구해나간 인간의 삶의 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오늘날에도 긍정되는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형으로 그의 선구적 위치를 실감하게 한다.





앗제와 그의 사진에 대한 평가 중 또 다른 부분은 주로 유럽 특히 프랑스의 예술가들과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한 동안은 앗제에 관한 주도적 해석으로 자리 잡아 왔던 것으로서, 그의 사진작업이 1920년대부터 상당기간 세계 예술계를 지배한 주도적 흐름이었던 초현실주의의 선구이며 사진의 초현실적 성격을 잘 드러냈다는 해석이다. 원래 앗제가 초현실주의자들과 비평가들에게 알려진 것은 그의 이웃에 살던 정렬적인 초현실주의 사진가이자 화가였던 만 레이(Man Ray)에 의해서였다. 만 레이는 앗제의 작업을 자신의 동료들에게 알렸고, 1926년에는 당시 초현실주의 그룹의 기관지였던 '혁명에 봉사하는 초현실주의'에 앗제의 사진 4장을 수록하게 함으로써 그의 사진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물론 앗제 자신은 스스로 초현실주의자이거나 예술가로 불리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관지에 사진이 실릴 때도 ‘내 이름을 거론하지 말아 달라. 내 사진은 단순한 기록일 뿐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가 초현실주의의 이념적, 도덕적 지형에 별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진이 알려진 후 초현실주의자들이었던 로베르 드노, 줄리앙 레비, 장 콕토 등은 앗제의 작업을 그들의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수행된 초현실주의의 원조로 평가했으며, 그들의 지도자였던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조차도 앗제의 작업을 선구적 시인 랭보(Rimbaud)의 작업등과 더불어 초현실주의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완성된 초현실성의 구현이었으며, 앗제를 고전적 초현실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긍정하고 그의 독창적인 시각에 경의를 표했었다. 그리고 1927년 앗제가 사망한 이후부터 약 10여년에 걸쳐 그의 사진은 유럽에서 있었던 사진을 고급 예술의 차원으로 위치시킨 여러 개의 중요한 사진 전람회에 선보였으며, 현대 예술에서 사진이 나아갈 지향점을 밝힌 선구적 작업으로 남게 되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 따르면 앗제의 사진은 사진이 발명된 이후 초기사진을 지배하고 있었던 '질식할 듯한 분위기'-사진의 특성을 무시하면서 사진에 무엇인가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려는- 를 일거에 소독한 모더니즘이라는, 그 이후 생길, 긴 대열의 전위대라고 할 수 있었다.




앗제는 1856년 포도주의 주산지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지방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학교를 마친 후에 그는 잠시 선원으로 일했었으며, 1880년대에는 그의 고향에 있는 극장에서 배우로 일하다가 1890년대에 파리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는 파리에서 신체적 조건 때문에 연극배우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시각예술로 직업을 바꾸어 여러 번의 갈등 끝에 사진가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진가로 입문한 그는 당시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던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 작업실을 열고, 직업으로 화가들과 건축가, 출판사 등에 제공하기 위한 자료용, 밑그림용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는 자신의 목적인 변해가는 파리와 그 근교의 모든 문화적, 환경적 사진기록을 진행하고, 동시에 화가와 그 외 예술가들에게 그 사진을 팔아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작업실 문에는 손으로 쓴 간판이 있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예술가들을 위한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만 레이가 앗제를 만난 것도 바로 그의 작업실에 만 레이가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과 주변의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그 후 1927년 사망할 때까지 일생동안 오직 파리와 그 근교의 완벽한 사진기록에만 매달렸다. 당시 유행한 예술사진과 살롱에 출품하는 유혹에 한 번도 빠져들지 않았고, 당시 유행에 크게 뒤떨어지는 오래된 장비를 사용하면서도 순수한 시각으로 대상을 찍어 나갔다. 그의 사진적 접근방식은 직설적이었고, 어떤 특별한 효과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대상들을 기록해서 오늘날 사진사의 가장 위대한 성과 중의 하나인 6000여점 이상의 사진을 남겨 놓았다. 미술사가인 장 뤽 다발(Jean Luc Daval)은 그의 책 '사진예술의 역사'에서 앗제의 사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다음과 같은 위대한 초현실주의자 데 키리코(de Cirico)의 말을 인용해서 평가했다. ‘중요한 점은 지금까지 예술에 포함되어 있던 친숙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즉 모든 주제, 사고 그리고 상징적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는 항상 18X24 cm 크기의 유리 플레이트로 작업을 했고, 광각 렌즈를 사용했으며 카메라의 앞부분이 위로 올라가게끔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중 일부는 사진의 윗부분이 렌즈의 이미지 밖으로 벗어나 있는 것도 있고, 또 그의 사진 대부분이 사진의 광학적 축 즉 원근법의 소실점이 화면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바로 다른 사진가들의 작업과 다른 앗제 사진만의 독특한 힘을 만드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건물이나 길의 수직선은 항상 수직으로 뻗어 있다. 이는 앗제가 자신의 표현 의도를 위해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앗제가 남긴 사진의 상당수는 그의 죽음 직후 배러니스 애보트에 의해 수집되어 미국으로 건너갔고 현재 뉴욕의 근대미술박물관(MOMA)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유리 플레이트와 일부 빈터지(Vintage) 인화는 프랑스국립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의 사진은 전 세계 개인 소장가들이 소장하고 있다. 이번 6월 서울 인사동의 김영섭사진화랑에서 열리는 <으젠느 앗제 사진전>은 앗제의 위대한 작업 중 60점을 직접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전시되는 작품은 주로 앗제의 초기 작업 즉 1890년대 파리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들로써 앗제가 직접 만든 빈터지 프린트 일곱 점, 베러니스 애보트가 프린트한 오리지널 사진 한 점,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전문 프린터로서 유명한 피에르 가스망(Pierre Gassmann)이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의 의뢰를 받아 인화한 오리지널 사진 49점 그리고 보급판 프린트 3점 등이다. 김영섭사진화랑 개관 1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행사는 한국에서 열리는 최초의 본격적인 앗제 전시회로서 한국사진의 발전을 위해 힘써온 화랑의 노력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박주석│명지대학교 교수, 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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