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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미술관 개관기념전: 권진규와 여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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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미술관 개관기념전 <권진규와 여인>

▪ 제 목 : 권진규미술관 개관기념전 <권진규와 여인>
▪ 기 간 : 2015년 12월 5일(토) – 2016년 5월 31일(화)
▪ 장 소 : 권진규미술관 (강원도 춘천시 동면 금옥길 228)



2015년 12월 5일 호반의 도시 춘천에 『권진규미술관』이 개관한다. 춘천시 옥산가 내 설립되며 초대관장은 권경숙(권진규의 여동생) 권진규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다. 박수근, 이중섭과 더불어 한국근대미술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천재 조각가 권진규는 1922년 함흥에서 태어나 춘천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졸업하였다. 석조, 테라코타, 건칠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지인과 주변의 인물들을 모델로 수많은 초상과 자소상을 제작하였으며 한국미술사뿐 아니라 일본의 화단에서도 칭송 받는 걸작들을 남겼다.

『권진규미술관』 개관전의 주제는 <권진규와 여인> 이다. 구조미와 영원성을 함께 담아낸 테라코타 인물상은 그가 가까이 알고 교류하던 지인을 모델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원의 얼굴을 비롯하여 혜정, 상경, 선자 등의 작품은 개인의 초상이라기보다 인간 근원의 원형을 탐구해간 치열한 작가정신의 기록에 가깝다. 권진규가 일생에 걸쳐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워했던 연인이자 동료였던 도모의 얼굴을 담아낸 작품을 보면 그가 일본에서 수학했던 시절 유독 치중한 석조, 그 신라 석공의 혼이 담긴 전통의 맥과 조형의 본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권진규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교와 공동으로 권진규 작품 자료집 (카탈로그 레조네 2016년) 을 발간하며 권진규 작품의 진품인증서를 발급하는 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다.

1965년 서울신문회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조각 초대전을 여는 것을 필두로 1972년 52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가 남긴 유작들은 대중의 뜨거운 관심과 폭넓은 사랑을 받아 왔다. 2015년 12월 권진규가 학창시절을 보낸 춘천에 깃든 『권진규미술관』에서 그 불후의 얼굴들과 다시 만나보기를 기대한다.




권진규와 모델, 그리고 작품

박형국 (무사시노 미술대학 교수)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다." 조각가 권진규(1922~1973)와 그의 작품들을 고찰할 때 흔히 상기되고 많이 인용되는 작가 자신의 말이다. 

1949년 권진규는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학과에 입학, 부르델의 사실적이며 강건한 구축성을 중시한 시미즈 다카시(清水多嘉示)의 제자가 되어 8년간 연찬을 쌓았다. 시미즈의 엄격한 ‘자연의 구조’, 즉 "조각의 본질은 대자연으로 이어지는 구조의 미를 요점으로 해야 하고, 그 구조(조립)이야말로 내용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기준이 된다."라는 가르침은 권진규의 작품 제작의 지주가 되었으며, 또한 자신을 깊이 탐구하여, "탈바꿈해야 한다."는 내적 요청에 순응한 제작을 행하여, 석조, 테라코타, 테라코타부조, 건칠, 목조 등 당시 조각의 주류가 아니었던 재료와 기법에 열정적으로 도전하여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권진규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특히 여성의 흉상과 두상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의 모델은 어떤 여성들이었을까. 


최초의 여성 모델은 첫 사랑의 여인이었다. 권진규는 1951년 같은 아틀리에에서 실기 수업을 받으며 알게 된 서양화과 2학년 오기노 도모에게 모델을 의뢰해 작품을 제작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둘의 교제가 시작된다. 권진규에 있어서 도모는 평생의 연인이었으며, 그 후로도 밝고 활동적인 도모를 모델로 한 작품을 몇 개 제작하였다. 귀국 후 한국에서 권진규의 첫 여성 모델은 영희이다. 영희는 1970년까지 가사를 도우며 권진규를 돌보고 작품 제작을 돕는다. 


영희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는 《영희》•《땋은 머리》•《휴식》•《비구니》등이 있으며, 특히 《비구니》에서는, 8년간 함께 생활해온 영희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 내포되어 있음을 느낀다. 자신의 《자소상》뿐만 아니라 젊고 예쁜 영희의 머리칼마저도 깎아서(물론 작품에서만) 비구와 비구니로 변신시킨 것은 이성을 초월한 친밀함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자소상》과 《비구니》는 권진규의 뜻에 의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어 지금도 같이 전시되고 있다. 


또한 권진규가 수업을 한 미대, 그리고 친분이 깊었던 유준상이 소개한 예대의 여대생들이 60년대 후반 이후의 대표작인 여성 흉상과 두상의 모델들이었다. 《지원의 얼굴》•《애자》•《현옥》•《혜정》•《순아》등 대부분의 작품명이 모델의 이름 그대로이며, 제작된 지 4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작품에서 모델의 특징을 쉽게 확인할 수 있어 리얼리즘 조각으로 평가되고 있다. 얼굴의 골격, 얼굴에 감도는 생기 등 모델의 이상적인 조형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카프나 머리 모양, 복장 등은 사실적인 허위이며 권진규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면 권진규에 있어서 모델이란 어떠한 존재이었던 것일까. 과묵한 권진규가 남긴 말은 매우 짧지만, 그것을 참고로 추정해 본다. 


먼저, "모델의 내적 세계가 투영되려면 인간적으로 모르는 외부 모델을 쓸 수 없으며, 모델 + 작가 = 작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말하였다. 왜 주요 작품의 모델이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여대생인지, 그 답은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은가한다. 바로 내면적인 정신성까지도 조형화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진규의 생각은 인물의 외형 모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의 인격과 정신까지 옮겨야 한다는 동양의 초상 조형에 있어서의 기본 미학인 ‘전신사조 (傳神寫照)’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또한, "虛榮과 宗敎로 粉飾한 모델, 그 모델의 面皮를 나풀 나풀 벗기면서 진흙을 발라야 한다. 두툼한 입술에서 欲情을 도려내고 淨化水로 뱀같은 눈언저리를 닦아내야겠다. 모가지의 길이가 몇 치쯤 아쉽다. 송곳으로 찔러 보아도 피가 솟아나올 것 같지 않다."라고도 말하였으니, 여기서도 모델의 정신을 정화시켜서 작품에 불어 넣으려고 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권진규는 "내 살을 깎는다."라고 말하며 점토를 깎고, "내 피를 붓는다."라고 말하며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작품을 ‘아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작품은 자신의 아이이며, 모델은 작품의 어머니이었던 것인가. 여기에서 ‘모델 + 작가 = 작품’이라는 등식이 지닌 의미를 추측할 수 있겠다. 1971년 개인전 당시 포스터에 그는 자신의 얼굴 사진 뒤로 자신의 아이(작품)들을 일렬로 세우는 디자인을 채용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권진규의 생각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권진규는 부르델과 시미즈 다카시 등을 통해 배운 서양 근대 조각에 ‘전신사조’와 같은 동양 미학을 융합 • 조화시켜서, 한국적 리얼리즘을 정립시키려고 진력하였으며, 조형작품에 모델의 정신을 불어넣어 새로운 생명체로 정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권진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 ‘내적인 리얼리즘의 확립’을 향한 최후의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남겼다. 리얼리즘을 기조로 하면서도 고고한 정신성을 추구한 권진규의 작품들은 "내가 만든 아이(작품)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남긴 그의 말대로、유족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마음의 지주로서 소중히 전해져 왔다. 오늘 연고지인 춘천에서 권진규미술관이 개관하게 된 데에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또 감사드린다. 이를 계기로 권진규와 그의 작품들이 더욱 소중하게 오래도록 지켜지고 많은 후학들의 좋은 모델이 될 것을 기대한다.



권진규, 고대왕국의 수도 춘천시절

최열(미술평론가)

권진규의 춘천시절은 1938년 4월부터 1943년 3월까지니까 만5년이다. 5년제 춘천공립중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그러니까 17살부터 22살까지였으므로 권진규가 성인으로 진입하는 바로 그 시절이다. 청춘을 키워나가던 그 시절, 그게 바로 권진규의 춘천시절이다.


오래 전 권진규의 생애와 예술에 탐닉하여 그에 관한 책을 쓰던 때, 권진규의 춘천시절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내가 권진규를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춘천을 좋아하는 마음 탓이었겠지만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박수근(朴壽根 1914-1965)과 조각가 권진규(權鎭圭 1922-1973)가 바로 그곳에서 청춘을 성장시키지 않았던가. 게다가 뒷날 거장으로 자라난 두 청춘의 춘천시절은 기간마저 겹치기까지 한다.


단 한번 뿐인 청춘, 그 성장시절을 49살의 권진규는 춘천고등학교 동우회지 <<예맥(濊貊)>>에 “포부와 호걸을 꿈꾸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탐내던 인간 형성기”라고 고백했다. 그랬다. 권진규는 바로 이 춘천에서 미래의 포부를 갖추었고 한 인간으로 성장할 것을 꿈꾸었으며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욕망을 불태웠다. 춘천은 그러니까 인간 권진규를 성형시켜 냈던 게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거꾸로 그가 졸업하고서 떠난 뒤 72년이 흐른 2015년 춘천은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지어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춘천이 그를 호명한 것이다.


춘천에서 권진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권진규가 두 해나 늑막염으로 고통을 겪은 끝에 유학을 온 낯선 도시였으므로 과묵하면서 온순한 성격의 외유내강형(外柔內剛型)이 아니었을까 짐작했었다. 내가 쓴 <<권진규>>라는 책에서 춘천시절의 권진규를 “금강역사(金剛力士)와 같이 화려한 역동감이 아니라 약사여래(藥師如來)와 같이 고요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라고 묘사했던 것이다.


4학년 때인 1941년 학적부에는 ‘성격이 온순하고 움직임이 소심하여 용기가 없는 반면, 지조가 견고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계속 노력해 나가는데다가 상식이 풍부하고 말투가 명석하며 특히 끈질기고 탄탄한 성질을 갖추었다’고 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3학년 때는 총대표, 4학년 때는 반장, 5학년 때는 기숙사 대표를 맡았을만큼 지도력이 탁월했다. 나아가 내내 성적이 우수했고 졸업반인 5학년 때는 1, 2등을 독점했다. 그 결과 졸업식에서 우등상과 강원도지사상을 수상했다. 한마디로 춘천이 기대하는 인재를 배출한 것이었다.


나는 권진규의 작품세계가 품어내는 우아한 비극성 때문에 그 사람됨됨을 언제나 과묵하거나 음울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누이동생 권경숙의 증언에 따르면 권진규는 함흥에서 자라나던 소년시절 “짖궂은 개구쟁이”였다. 마찬가지로 춘천에서의 청춘시절에도 여전히 누이동생을 보고서 아주 “신이 나서 떠드는” 지극히 “명랑하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학적부에 따르면 권진규의 취미는 그 성격에 걸맞게도 ‘등산과 독서’였다. 더 자세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춘천에서 머지 않은 청평산이며 용화산이었을 것인데 이곳에 오른 그는 호연지기를 키워나갔을 것이다.


권진규는 20세기 조각사상 가장 뛰어난 거장이다.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을 비조로 하는 근대조각사는 1940년 김복진 요절 뒤 적막강산으로 바뀌었고 그 계보를 잇는 인재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열망은 1959년 38살의 권진규가 귀국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미 일본 미술계에서 중견으로 성장한 권진규가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세계는 전후 황폐한 조각계의 환희였다. 그리고 이후 1973년 5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꼬박 14년 동안 그가 쏟아낸 숱한 걸작들은 조각사 아니 미술사의 축복이었다.


권진규가 이룩한 업적은 수천년 한국미술사의 흐름을 일변시켰다는 표현조차도 부족 할 만큼이다. 인간의 심연을 이토록 심오하게 형상화한 조각가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그가 연출하는 적멸공간에 빠져들면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을 흡인력 이야말로 은하의 전설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모를 일이다. 그 기운의 기원이 어느 곳인지는. 하지만 그 언제던가 춘천 호반에 피어오르던 물안개 속 헤메던 추억을 떠올리면 바로 그 깊이마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권진규가 훔쳐갔을 고대왕국 맥국(貊國)의 수도 ‘춘천의 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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