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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전 2016 크리에이티브 리포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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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 명  2016 Cre8tive Report
전시장소 OCI미술관 1, 2, 3층 전시실
전시기간 2016. 1. 8. (금) ~ 2016. 2. 25. (목)
참여작가 강상우, 권인경, 박경종, 반주영, 범진용, 윤성필, 조현익, 최수진
전시부문 평면, 입체설치, 미디어 포함 30여 점


 전시 개요

○ OCI미술관은 2015년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8명의 그룹전시인 <Cre8tive Report>展을 오는 1월 8일부터 2월 25일까지 49일 동안 개최

- 지난 2011년부터 인천광역시 학익동 소재 창작스튜디오 운영

- 창작 공간이 절실한 작가 대상으로 2015년 3월, 공개모집 선정

- 5기 선정 작가 8명:
  강상우, 윤성필(이상 회화, 입체설치), 권인경, 범진용, 최수진
  (이상 회화), 박경종(미디어), 반주영, 조현익(이상 회화/설치)

- 2015년 10월 3일(토)부터 5일(월)까지 3일간 오픈스튜디오(Open Studio)를 개최한 바 있음

- 이번 전시는 최근 1년 간 활동한 여덟 입주 작가의 보고전

-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신작 위주의 30여점 선보여

○ 참여 작가 여덟 명과 함께하는 Artist Talk 프로그램

- 1월16일(토) 15:00, 2월13일(토) 15:00 두 차례에 걸쳐 진행

○ 12월 9일부터 15일까지 2016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모집

- 자세한 정보는 OCI미술관 홈페이지(www.ocimuseum.org) 또는 02-734-0440~1 참조





땅+땀=딱!




김영기 (OCI미술관 큐레이터)


 생산의 3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제품 산업은 아니지만 예술창작 또한 인문학적 성과의 생산이란 큰 틀을 고려하면 이들과 내외유별 할 수 없다. 열 번 바람난들 디딜 곳이 있어야 춤을 춘다. 이글대는 창작열도 드높은 예술적 영감도 터가 있어야 태우든 피우든 할 노릇이다. 이에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는 단순 공간 제공 차원을 탈피, 창작열로 데워진 공기와, 예술혼이 스민 촉촉한 흙이 되어 여덟 입주 작가들의 꽃모를 흥겨이 보듬어 왔다. 흙은 정직하여 요행이 없다는데 올해로 다섯 번째 풍작을 맞으니 한 손을 다 채운 기분에 괜한 뿌듯함도 번진다. 뿌듯함은 할부 이자와 같아서 나눌수록 커진다. ‘2016 OCI Cre8tive Report’를 통해 원 없이 나누는 기회가 될 것이다.


 소는 풀을, 인간은 과거를 되새김질한다. 자수성가한 억만장자가 조강지처와 꽁보리밥을 씹던 시절을 그때처럼 곱씹는 것처럼. 강상우는 과거를 달여 진액을 한 사발 들이키고 그 반응을 살핀다. 무중력 공간의 물체를 손으로 밀면 영원히 반대 방향으로 멀어져갈 것이다. 자라며 받은 심리적 관성 또한 여전히 지금의 사고 방향에 영향을 준다. 수정란의 주름이, 어린 싹의 떡잎이 앞으로의 자람과 생김을 가르는 만큼 그에게 유의미한 과거란 주로 유년이다. 또한 과거는 결코 온전히 저장되는 법이 없다. 고기는 맛으로 기억되고 그건 아마 육즙 맛일 터. 육즙이 아무리 고소한들 고기 자체는 아닌 것처럼, 진액은 과거 자체일 수 없고 이미 가공 변질 이미지화된 일종의 인상 혹은 단서나 흔적에 불과하다. 그래서 보기만 해도 뿌듯한 세 아름드리 로봇 상자에, 글씨체의 조악함과, 로봇 디자인의 과도한 미려함과, 어린 시절의 이상향을 대표하던 동네 구멍가게의 그 찬란한 이름과, 아직도 뇌리 구석에서 새겨진 옛 주소의 늠름함을 뒤섞어 토핑했다. 과거를 세트장처럼 소환하기보단 뇌리에 남은 향과 맛을 지금 다시 음미하는 셈이다. 추억의 향과 맛에 잠기면 마음에 군침이 돌기 마련. 향수든, 상실감이든, 애달픔이든 혹은 새삼스런 공포든 그런 감정적 연결 반응을 겨냥한다. 한없이 멋들어진 포장속의 턱없이 조악했던 그 조립 로봇. 어릴 때도 그랬지만 지금 보니 더욱 아리게 다가오는 감당 불가의 그 간극, 이제는 ‘표리부동(表裏不同), 현실은 시궁창’으로 새삼스레 와 닿을지 모를 일이다.


 공간은 사람을 닮고 사람은 공간을 닮는다. 같은 평수 아파트가 수십 동인들, 똑같이 꾸며진 딸아이 작은방은 한 쌍도 없을 것이다. 권인경은 체험과 사고와 자라 온 이야기가 주변 도시 공간에 확산, 용해되어 자신을 닮아 가는 광경을 보여준다.

 현실 공간과 심리적 공간은 결코 분리 단절된 것이 아니다. 물리적 공간을 가감 없이 인지하는 건 의식이 존재하는 이상 불가능하며 어김없이 주관은 덧씌워진다. 내가 평생 갇혀 사는 1인칭 시점은 나 한 자리뿐이다. 각자의 세상 속에 살며 약간의 접점을 통해 서로 교신할 따름이다. 머릿수만큼의 세상이 마구 겹치고 얽혀 병존하는 것이 세상인 셈. 그래서 한 동네는 모두에게 저마다 다른 동네이다. 그리고 산수와 도시 파편이 병존하는 괴이한 이 동네는 권인경의 동네이다.

 공간의 밀도는 균일하지 않다. 숨바꼭질 하면 늘 숨던 계단 아래, 엄마를 기다리던 나무 벤치가 더 촘촘하다. 조밀한 지점 또한 저마다 모두 다르다. 낡은 초인종 속에 할머니와 살던 집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숲 속에 방이 있고, 창문 너머로 도시가 펼쳐진다. 서로 이질적인 시간과 방향의 풍경들을 푸른 캔버스에 콜라주 한다. 콜라주의 불연속성과 채색의 연속성을 버무려 반죽한 캔버스. 인맥과 연줄로 특별 소집된 공간들은 연쇄, 얽힘, 뒤섞임을 주고받으며 정수 차원, 고정된 차원을 넘어 출렁인다. 그 차원 중에는 그의 이야기로 가득 찬 이 공간이 바깥세상과 통할 수 있게 작은 환기구를 열어 소통을 갈망하는 지점도 있다.


 모든 것은 시공간을 거쳐 존재한다. 물질 뿐만 아니라 기억, 가치, 생각도 마찬가지다. 시공간은 존재의 선행요건이 아니라 ‘존재하다’를 다른 말로 풀어낸 것에 불과하니까. 박경종은 ‘시공간 나그네’의 방랑을 ‘움직이는 회화’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풀어낸다. 굳이 애니메이션이라 칭하지 않은 것은 최종 형식이 영상에 준할 뿐, 시간성을 강조한 회화 확장의 한 형태, 회화의 가능성에 대한 도전적 실험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영상 하면 첨단과 디지털을 생각하기 쉽지만, 물감이나 실물 오브제 등 질료 그대로의 색채와 형상과 감성을 십분 활용할뿐더러 떨어진 방울에서 꽃이 피고 꽃잎이 흩날리는 벌판으로 다시 이어진다. 시간과 공간, 구상과 추상, 색과 형, 응시와 피사, 인격과 인격, 장면과 장면이 경계를 잊고 융합한다. 표현과 내용 전개 모두 말 그대로 아날로그(analog-단절 없는) 덩어리, 최신 버전 회화의 정수라 하겠다.

 꼭 ‘인물’이 주인공일 필요는 없다. 주로 캐스팅하는 주인공은 어떤 ‘시선’이나 ‘입장’, 혹은 ‘볼 기회’같은 것들이다. 그걸 은유할 괴이한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하고, 아예 1인칭 시선이 자유로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시선은 난폭한 인격이 되기도, 솔직담백한 고민을 담은 자아 배역을 맡기도 한다. 벽을 뚫고 시간도 자유롭게 타넘으며 세태와 가치관을 탐사한다. 그런 자유로운 영혼인 덕에 포장된 도로가 아니어도, 언어의 그물로 뜨지 못하는 기이한 이야기나 심정이나 부조리도 거침없이 비집고 속을 탐험할 수 있다. 말로 설명하려 들면 기이하고 엉뚱하여 도무지 풀리지 않건만 그 틀을 벗어나면 얼마나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지, 회화라는 자유이용권의 위력을 현란하게 증명한다.


 트레일러가 곧 스포일러라면 무슨 낙으로 영화를 볼까? 나무 한 점 띄지 않는 끝 모를 평지에 하염없이 뻗은 도로를 영영 달리는 자전거가 무슨 재미일까? 반주영은 으레 불안과 위태로 굴곡지기 마련인 우리 삶이, 같은 이유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탐구한다. ‘生’은 싹이 트는 모양을 본뜬 상형자로, 특히 첫 획으로 찍은 떡잎은 좌우 대칭의 안정에 파문을 던지지만 동시에 변화와 생동, 미지에 대한 설렘과 무궁한 가능성을 응축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액자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가능성의 바람이 불 때 마다 하늘하늘 나풀댄다. 트레팔지나 트레이싱지는 알쏭달쏭 반투명해 알 듯 말 듯 오묘한 생의 불확실성으로 희미하게 얼룩져 있다. 유약하고 섬세한 표면에 드문드문 별처럼 박힌 칼집 사이로 언뜻 설렘의 빛이 엿보인다. 흩뿌린 점들은 각기 지나침과 모자람의 경계에서 외줄을 타듯 아슬아슬한 선을 잇대어 관계를 유지하고, 에너지를 주고받아 서로의 흠과 티를 보듬는다. 작은 비늘 형태는 촘촘히 어깨를 잇닿아 피라미드처럼 연거푸 서로를 쌓고, 관계는 마치 생물처럼 쑥쑥 자란다. 그렇게 관계와 가능성은 거듭 이어져 거대한 장(場-field)으로 확장되고 어떤 힘으로 가득 찬 세상을 짜 나간다. 표면적으로 개체들을 붙이고 이어 관계를 꾸리는 것은 모눈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이나 한 가닥 실의 물리적 마찰력이지만 그 실체는 사람 사이를 따끈하게 엮어 주는 원리적, 심리적 마찰력이다.


 범진용은 사생을 한다. 寫生이란 말 그대로 生을 그리는 일인데, 生은 이미 짚은 대로 풀이나 나무 따위가 싹트는 모양을 딴 상형자다. 그래서 사생은 본 대로 그리는 일이다. 다만 그는 겉껍질 대신, 휘몰아치는 정신을 거름 삼아 뇌리에 풀처럼 돋아나는 꿈결을 사생한다. 응축된 심리적 에너지를 투사할 곳을 찾다, 산책로에 징그러이 뒤얽힌 잡초 속에 이글대는 불꽃같은 생명력, 푸른 기운을 사생한다. 그래서 마음의 박동을 따라 그림 표면이 흐르고 넘실거린다. 때론 졸졸, 때론 줄줄, 가끔은 철철. 마치 현실 레이어와 꿈 레이어 여러 장을 겹쳐 놓고 일부는 켜고 일부를 끈 것 마냥, 푸새로 범벅인 풍경과, 그 풍경에서 꿰뚫어 잡아내는 생동과, 꿈에서 마주했던 노래하는 이들이 언뜻언뜻 한데 어우러진다. 꿈이든 잡초든 터만 다를 뿐 의지와 통제를 넘어 그저 돋아나는 것. 꿈과 현실은 캔버스란 경계에 맞닿자마자, 마치 우유와 녹즙이 한데 섞여 확산하며 서로를 침범하듯, 망설임 없이 몸을 뒤섞는다. 힘(심리적 에너지든, 풀의 생명력이든)이 가닥가닥 할퀸 골을 따라 아지랑이 결처럼 흐르며 마주 확산하는 순간을 포착한 모양새다. 경계를 오가는, 오롯이 꿈도 현실도 아닌, 그래서 그 어디에도 없는, 그야말로 ‘부유(floating, 적(籍) 없이 떠돎)’란 말이 딱 맞춤옷인, 그런 작업이라 하겠다.


 “그래도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남겼는지 진위 논란이 있지만, 최소한 속으론 지구가 돈 횟수 이상 되뇌었음은 확실하다. 돈 사람 취급을 받긴 했지만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회자하니 어쨌든 돈 보람이 있다. 윤성필은 보이지 않는 것의 순환으로 우주는 가득 차 있고 사실 그 순환 자체가 바로 우주임을 입체조형으로 드러낸다. 금속 고리의 점층 및 중첩, 원뿔 혹은 원반 위를 돌며 쌓여가는 궤적 등 그의 작업을 꿰는 키워드가 순환이다. 전자의 운동에서부터 전자기장의 순환과 대류를 통한 열 교환, 천체의 공전, 거기에 기와 혈액 등 인체의 순환계, 번식과 생사의 반복, 인과와 업보 등 생물학, 인문학적 순환에 이르기까지 순환은 상호 작용과 존재의 기본 형식이다. 엔트로피가 무한으로 발산하고 에너지 절대 평형에 도달해 ‘Big Freeze’를 맞으면 더 이상 무언가 존재한다 할 수 없다. 아무런 순환도 상호 작용도 일어나지 않으니 변화도 없고 점유도 없으며 따라서 시공간 개념도 무의미하고 그에 따른 ‘존재’라는 인지 역시 사라지니까. 결국 순환은 존재의 다른 말이나 마찬가지다. 물리적 작용 능력을 의미하는 ‘Energy’가 작품 제목에 들어앉은 것도, 공간을 휘감아 날름 삼키며 강렬한 물성을 발산하는 육중한 금속 고리들도 입을 모아 존재라는 주제를 어필한다. 시곗바늘이 용쓰며 한 바퀴를 돌면 설핏 제자리로 보이지만 늘 다르다. 그 사이의 모든 일들이 축적, 함축, 반복되며 보이지 않는 순환 속에 자리한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겉모습 속에 보이지 않는 많은 사연이 꼬리를 물며 겹쳐 지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모든 마누라는 결혼 전엔 여신이고 모든 음식점은 먹기 전엔 맛집이다. 속됨이 더없는 친밀감에서 비롯한다면 성스러움은 끝없는 거리감을 전제한다. 산 것 보다 죽은 것, 곁에 있는 것보다 머나먼 것, 유한보다 무한, 집히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성역에 가깝다. 그 성역은 금기, 질서, 규범이란 색색의 분필로 테두리를 짓곤 한다. 조현익은 그 경계를 새로 긋는 실험에 골몰한다. 경건하다 정해 놓은 것은 나에게도 소중해야 하는가? 내게 소중한 것이 진정 경건한 것 아닐까? 성과 속의 경계는 흐려지다가 와해되고 심지어 술래 바꾸듯 다시금 정의된다.

 박제 동물의 생생함이 짙을수록 섬뜩함도 더한다. 가죽만 박제되는 것이 아니다. 본디 멸종된 것, 사라진 것을 곁에 속박하는 것이 박제다. 마주하고 있지만 막대한 시공을 사이에 두고 보는 셈이다. 그래서 환희에 찬 여성을 철판에 박제한다. 그리는 정도를 넘어 아로새겨 가두고, 성스럽게 다가온 그 순간을 거머쥔 채, 영원토록 간직한다. 볼트를 박아 잠그고 우레탄과 같은 투명 수지를 흩뿌려 덮기까지 한다. 유명 관광지 상점에 가득 진열되었을 예수 뚜껑 볼펜과 비닐 백은 그의 사원(私院) 제단 한 칸에 정식으로 입주하고 어둑한 촛불을 쬐어 비로소 성스러움을 발한다. 무거운 속(俗)은 이미 성(聖)과 다름없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무겁게 다가온 소중한 모든 것을 간직하기가, 욕망을 충족하기가 불가능하다면 박제해 곁에 두는 차선이 있다. 철판에 아로새기고 잠그고 덮고 사원에 모시는, 그만의 박제 레시피로 성속의 경계를 요리한다.


 심전도계는 심장(心腸)의 진동을 보여주지만 마음(心)의 진동을 보여주는 데는 최수진만 한 심전도계도 없다. 체험과 기억에 젖은 사진 하나에서 발원한 작업은 캔버스 안에 세트를 낳고, 그만의 캐릭터가 출연하고, 각색한 상황이 펼쳐지고, 심리와 감각과 연상의 진동에 기대어 바르고 문질러 몽글몽글 이지러지며 어느새 마음의 파형으로 흠씬 들어찬다.

 그의 캔버스는 반듯하지만 울퉁불퉁하다. 공간좌표는 모눈처럼 가지런하지 않고 몽글몽글하며 울퉁불퉁하여, 그림 속 그림으로 쑥 들어갔다가, 캔버스를 뚫을 듯 감상자 코앞까지 불쑥 솟곤 한다. 메모지에 ‘울퉁불퉁’이라 쓴다 하자. 그림 속에도 그 메모지 그대로 등장시킬 수 있다. 어느 날은 메모지만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언젠가 메모를 하려는데 집히는 게 없어 둘러보던 차 문득 캔버스에 그려놓은 메모지가 눈에 띄어 거기다 ‘울퉁불퉁’이라고 메모를 하면 어떨까? 화면 곳곳엔 그처럼 차원과 층위를 기체처럼 기탄없이 오가는 요소들이 산다. 이를테면 주황색 열매와 주황색 숨결과 그냥 ‘주황색’이 사이좋게 출연한다. 그 지점은 물질과 비물질, 그 밖의 부유물이 상봉하는 접점이다. 색상과 표현은 거침없고 섬세하다. 묵직한 암색부터 당돌한 원색에 형광색까지. 터치도 묘사도 쭉쭉 툭툭. 그처럼 자유자재로 뿌리는 변화구건만 스트라이크 존을 교묘하게 늘 지킨다. 사방팔방 아주 빨리 진동하면서도 일정한 부피만 들어차는 기체 분자처럼.


 핑계 없는 무덤, 곡절 없는 도막이 있겠느냐만 올 한해는 유난히 이런저런 일정과 사연이 작가들을 괴롭혔다. 그럼에도 서로 밀고 끌고 험한 돌밭 고르며 땀범벅으로 여기까지 온 그들에 경의를 표한다. 갖은 작업 만발할 옥토가 머지않았으니, 돌아보고 그리워할 여유가 생길 즈음이면 방울방울 맺힌 땀이 식어 비로소 시원할 것이다. 작가와 작업 모두 이미 훌쩍 커버린 증거이니 달고 흥겹기 그지없을 일이다.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서 하얗게 불살랐던 시간도 한 방울 서려 있다면 더없는 영광이겠다. 앞으로도 작가와의 상호 작용과 적극적인 지원을 거듭하여 두 방울 세 방울 더욱 이바지할 것이다.



권인경_Heart land 2014_2014_collage and colored Korean ink painting on Hanji_158×127cm



반주영_Life_2004-14_tracing paper, thread,acrylic_230×240cm




범진용_Beyond the Lights_2015_91×117cm_oil on canvas




조현익_사원_2014_mixed media on brass plate, wooden panel, collected objects_275×300×300㎝



강상우_초월의-거울_enamel-on-air-dry-stone-clay_41×51.5×2



최수진_밤의-연못_2013_oil-on-canvas_130×130cm



박경종_바람-조각들_2014_acrylic-on-canvas_73×53cm



윤성필_Energy-19_2014_Steel,-Bolts,-Nuts_65×40×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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