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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최대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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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것이 최대한의 의미를 얻는 방식 




말은 침묵의 시간을 통해 뜻을 얻고, 유한한 삶은 죽음을 통해 영속의 세계로 진입하며, 그려진 것들은 그려지지 않은 것들과의 접점에서 비로소 의미의 터를 잡는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것 같은 최소한의 작품이, 작은 점, 가는 선, 비어 있는 평면으로, 세계의 비밀에 맞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최대한의 의미를 얻는 방식일 것이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최소한의 표면(오윤석), 비어있는 전시실을 더욱 비어 있게 하는 몇 개의 현수선들(정승운), 너무 작아서 안보이거나 너무 커서 볼 수 없는 것들의 흔적(이강욱)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이 최대한의 의미를 지향하는 서로 다른 모습들이다. 



정승운은 캔버스를 떠나 조각적 입체 구축이나 설치 개념의 작업을 주로 하는 작가이지만, 근본적으로 캔버스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가 자신의 작업의 목표를 공간 속에서 기능하는 ‘벽화’처럼 만들고 싶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단적인 예이다. 그가 나무 조형물을 주로 하는 입체 작업들을 제작하는 가운데, 공간에 줄을 매다는 작업 유형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는 캔버스의 최소화된 형태이다. 일견 아무것도 아닌 줄로 보이는 작은 면적 위에 마치 캔버스로 풍경을 그리듯이 세필을 이용하여 다채로운 색상의 조화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작품은 형식적으로 최소한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기존의 캔버스 작업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 펼쳐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억눌린 회화 지향성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입체 작품들에서도 회화의 기본적 속성이라고 볼 수 있는 윤곽선을 크게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데 간혹 채색을 부여할 때 먹이나 경면주사 등의 사물성이 두드러지는 색을 사용한다거나, 회화에서 사용하는 원근의 법칙을 어색하게 뒤집어 입체에 적용하는 등의 억지스러움을 감수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회화의 어떤 측면을 지속적으로 경계하는 태도인 듯이 보인다. 그가 꺼리는 것은 회화 그 자체라기보다는 회화가 가지고 있는 특정한 속성들, 아마도 파토스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주워 담을 수 없는 행위의 우연적 결과가 고착되어 만들어지는 작품 속에서, 그는 그러한 우연성을 통제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불규칙한 대상을 다룰 때도 규칙을 부여하고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수열(數列)의 법칙을 적용하는 등의 방식은 그가 우연성을 거부하는 방식들이다. 따라서 그는 회화의 어떤 측면을 제거하고 그 나머지에서 회화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정승운의 줄 작업은 그의 작품 전반에서 보이는 억눌린 회화성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그것은 관객에게 마치 아스팔트의 벌어진 틈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 같은 감칠맛을 선사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그의 줄 작업의 속성 가운데, 최소한의 형식에 가둔 최대한의 회화성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윤석은 최근 깊은 색채감이 두드러지는 미니멀한 화면을 만들어내는데 이 작품들은, 멀리서는 단색화(monochrome)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시선의 각도를 달리 하면 화면 안에 숨어있는 형상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단순한 추상이 아님을 알게 된다. 화면에 자신의 의식/무의식과 관련된 어떤 형상을 끄집어내어 그린 후 경전을 필사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빼곡히 화면을 메워 추상 화면이 결과적으로 초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단색 화면 안에 숨겨진 형상들은, 역사적 기원을 가지는 인물상이든 약재로 쓰이는 약초들이든 자신과 타인의 삶에 대한 성찰의 도구로 사용되는 이미지들이다. 동시대미술이 제시하는 문법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집단무의식과 연관된 형상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방식으로 그는 추상적 화면을 선택했고, 따라서 그의 빈 화면은 그저 비어 있지 않고 꿈틀거리는 서사로 가득하다. 


어떤 이미지는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다. 오윤석이 빈 화면에 맞서 처음 그려내는 이미지들은 시간의 누적으로 인해 힘을 얻게 된 것들이며, 그가 얽매여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엄습하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후 그것을 지워나가는, 혹은 감추어나가는 그의 방식이 흥미로운 지점은, 의식 이전의 세계와 현실 세계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 내용이, 작품의 형식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작들에 오윤석이 부여한 제목은 <hidden memories(감추어진 기억들)>이다. 그의 작품에서 감추어진, 그러나 감추는 과정이 공개된 기억들은, 현상의 이면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또 다른 질서에 관한 것이다. 이는 오윤석 개인의 스토리이기도, 한국인의 유전자 정보에 새겨진 이미지의 역사에 관한 것이기도,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무의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시간의 더깨를 입어 서사가 가득 찬 이미지들을 담은 단색 화면들은, 최대한의 내용을 담은 채 최소한의 형식으로 보여지는 것들이다. 



이강욱의 작품은 첫 눈에는 자동기술적 드로잉을 기본으로 하는 추상 작품인 것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눈을 크게 뜨게 하는 겹겹의 세부가 펼쳐진다. 몇 개의 선이나 얼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추상 화면으로 보이던 것들이 감상의 거리를 좁힐수록 작은 단위로, 자세히 보면 볼수록 더 작은 단위로 식별되며, 손 가는대로 아무렇게나 그려진 것 같았던 화면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무섭게 정교한 구성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기실 이강욱의 모호한 형태의 이면에는 사진의 형태로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들, 예컨대 동식물의 세포 이미지나 우주 공간의 이미지 등이 깔려 있다. 세포나 우주처럼, 세계에는 인간의 육안으로는 너무 작아서 안 보이거나 너무 커서 볼 수 없는 이미지들이 존재하한다. 대체로 그러한 이미지들은 왜 그러한 모양으로 존재하는지, 너무 작은 것과 너무 큰 것들이 왜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는지,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논리적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매우 구체적이지만 불가해한 이미지들, 그러나 사실적인 근거와 바탕을 가진 이러한 이미지들은 겹겹이 쌓아 올리는 행위를 통해 최초의 구체성이 베일에 가려진 모호한 실체로 드러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 모호한 화면으로 다가가는 과정은 다시 구체적인 지점으로 환원되는데, 그것은 화면의 저변에 깔린 최초의 구체성과는 다른 질서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전혀 다른 물적인 구체성, 이를테면 빛을 난반사하는 구슬, 그보다 더 작은 투명한 입자들, 세필로 만들어낸 색색의 점들은 화면 전체를 놀랍도록 반짝이게 만든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어떤 회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엄청난 장식성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것이다. 장식적 감각의 높이는 대개 정신적 깊이를 수반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기 쉽기 때문에, 대부분의 추상 화가들이 장식성을 전면에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매우 장식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은 금기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강욱의 반짝이는 화면은 오히려 손해를 볼 여지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장식적인 요소로 보이는 이러한 형식적인 특성은 작품 속에서 지향하는 내용과 정밀하게 부합됨으로써 위험부담을 떨어내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의 신비한 교통은, 화면 안에 작게 찍은 점 하나, 반짝이는 입자 하나에서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의 작품에서는 손바닥만한 작품의 의미와 거의 환경처럼 보이는 거대한 작품의 의미가 다르지 않다. 관객은 그의 손바닥만한 작품에서 거대한 우주를 보기도 하고, 압도적으로 거대한 작품 속에서 세계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무엇인가를 연상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강욱의 작품을 바라보는 것은 세계의 근본, 나를 이루는 가장 작은 그 무엇과 나를 둘러싼 가장 큰 그 무엇에 대한 사유를 열어놓는 일이다. 이 세 작가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최소한으로 응축된 것처럼 보이는, 혹은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의미와 구체성으로 가득 차 있다.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남아있는 것들, 미스테리처럼 보이지만 인과가 명확한 것들, 우연히 흩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규칙적으로 배열된 것들 속에서, 최소한의 대상으로 환원된 최대한의 의미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윤희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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