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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정 회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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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ny, 130x162cm, oil on canvas, 2013 

 






peony, 130x162cm, oil on canvas, 2013

 

짓과 주름  

 

꽃은 회화의 역사에서 수없이 그려졌던 대상이다. 정물화로서 혹은 인물화의 배경이나 소품으로서 예외 없을 정도로 등장하는 것이 꽃이었다. 동양 쪽에서는 화조도(花鳥圖)라는 이름으로 독립된 장르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편적이며 - 심하게 표현하자면 - 범상한 대상을 그리는 화가의 생각은 도대체 무엇일까? 꽃이 지닌 아름다움을 그저 재현하는 것으로도 미술의 역할은 충족된 것일 수 있을까? 사실성 속에 또 다른 의미의 지평을 숨기고 있는지 혹은 작가가 취한 회화의 형식이 - 장르를 포함해서 - 현대의 수없이 다양하고 전위적인 미술현상에 대한 대응전략으로서 기능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그 전략의 매뉴얼을 형성하고 있는지 이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자.

 

 

주제-

아름다운 대상을 그리는 것만으로 미술이 아름답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진부하다. 사물에 대한 끊임없는 재해석이야말로 미술의 역사였다면, 꽃도 매 시기마다 그리고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다르게 표현되고 해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멀리 중세 성화에서 백합이 성모의 순결과 무고를 의미하는 상징으로 그려졌다면, 네덜란드의 바로크 회화에서 꽃은 바니타스(vanitas)의 기호로써 죽음을 알레고리 하였다. 현대회화에서도 꽃은 줄곧 그려졌다. 우리가 아는 현대작가 중에서 꽃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이다. 오키프의 꽃은 강렬하게 그 생명력과 성적 욕망을 표출한다. 그리고 꽃의 잎과 술은 직접적으로 생식기를 생각하게 할 정도로 연상의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표현력은 물론 강한 색채와 표현주의의 거친 형식에 의존한 것이다. 꽃이라는 자체적인 표현에 인간의 욕망을 덧씌움으로써 꽃은 자연의 생식기에서 인간의 욕망의 대변자로 나타났다.

 

현대미술의 첨병에 위치한 마크 퀸(Marc Quinn)의 꽃그림에서도 꽃은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오키프 식의 에로티시즘과는 달리 퀸의 욕망은 그것의 소비, 그것도 상업적 소비를 드러낸다. , 사랑, 죽음 등 극한의 영역을 소비의 대상으로 삼은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은유와 더불어 그림과 사진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해체시켜 놓았다. 퀸의 꽃은 원색적이며 야하다. 이러한 존재적 특징은 바로 생존과 번식의 원초적인 욕망을 대변하며, 현대사회는 이러한 욕망을 소비하고자 한다는 것을 작가와 감상자는 잘 안다.

 

한수정의 꽃은 유화로 그려진다. 그것도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린다. 하지만 꽃을 그린 정물화쯤을 기대했다면, 이 생각의 지점에서부터는 그림의 구성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한수정의 꽃 그림은 매우 확대된 모습, 즉 마치 접사로 포착된 마이크로 풍경으로 여겨진다. 가까이 그려진 꽃들은 거의 정밀묘사에 가까운 상태를 이룰 것이라 기대하지만, 의외로 정밀한 묘사는 사실성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사실성은 핍진성(verism)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지향점은 오히려 초현실적인 차원 어디쯤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여기서 사실과 작가의 주관적 감성이 길항을 일으키는 지점이다.

 

꽃을 그리는 데에 있어서 작가는 간혹 색의 채도를 높여서 원색적인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점차 꽃의 색깔은 자연색에서 작가의 심리를 타서 조율된 상태를 보여준다. 부드럽고 유혹적인 그리고 달콤한 색채의 꽃 그림은 아니다. 색의 감정은 차갑거나 무겁다. 그래서인지 식물의 생식기가 가진 성적 감흥은 오히려 감퇴되는 상황에 이르며, 오키프 류의 맛이나 표현을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로티시즘은 원초적이며 감각적인 색이 아니라 꽃들의 몸짓과 주름에서 도드라진다.

 

몸짓

꽃은 자연의 몸짓이다. 꽃은 씨앗을 만들기 위한 자연의 몸부림이다. 몸의 깊은 내부로부터 힘은 봉우리를 뿜어낸다. 이 힘이 바로 생명이다. 몸부림이 처절할수록 꽃은 아름답다. 요즈음에 우리는 모든 식물이 자아내는 소리 없는 몸부림을 본다. 하나씩 혹은 떼로 피어나는 꽃들은 저마다의 깊은 함성으로 몸을 열어 색과 냄새를 흘린다. 이것에 홀린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벌들도 농후한 벌림 속에서 정신이 없다. 이 정신없는 사이에 꽃은 슬그머니 자신의 씨를 벌의 몸에 묻힌다. 그리고 조만간 산화한다. 꽃의 죽음이 씨앗의 삶으로 보상되는 이 처절히 슬픈 현상 속에서 봄날은 간다.

 

한수정은 바로 이 시기 꽃의 몸짓을 그린다. 가까이 그려진 꽃의 열린 몸을 바라보는 관객은 그래서 벌과 같은 입장에 처한다. 멀리서 아름다웠던 꽃은 생명의 초조함으로 날선 얼굴로 관객을 대한다. 화사한 몸짓은 수많은 주름에 의해 구성된다. 봉우리로부터 연한 꽃잎은 자라나면서 외부와 내부의 힘이 충돌하여 주름을 만든다. 한수정의 붓질은 이 주름을 따라 움직이며, 생명의 미시적 운동을 재현한다. 이 미시적 세계 속에 삶과 죽음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조화와 통섭이 흔적으로 남는다.

 

주름

자연은 생명의 성장운동과 외부로부터의 힘에 의한 치열한 갈등과 영향으로 그 형상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이야말로 자연을 드러내는 특징이다. 특징이란 상징의 이론적 정리를 넘어서는 독자적인 고유성이라 할 수 있다. 그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형상성이 주름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Deleuze)17, 18세기 자연철학의 위대함은 바로 이 주름을 발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화하는 곡률, 즉 주름은 변곡(變谷)의 순수한 표현으로서 세계 그 자체이며 무한하다. 계몽주의적 자연철학이 데카르트의 기하학적 세계를 유기적인 형태로 분해했을 무렵에 미술은 바로크에 그로테스크(grotesque)18세기에 로카이유(rocaille)를 만들어내어 새로운 조형의식과 형식을 창조하였다. 장식도 아니며 그림도 아닌 이 형식 속에서 계몽의 시지각은 자연의 속성을 찾았다. 빛의 파동이나 물결의 출렁임뿐만 아니라, 모든 세포 단위로 미분화된 세계는 이러한 주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자연은 한 번도 반복하지 않을 수많은 다양성과 개체적 특성으로 생성, 전개되며, 그 모습을 이룬다.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유기체적 세계관은 바로크 시대를 거친 이후에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으며, 여기서 한수정과도 결합한다.

 

한수정의 꽃 묘사는 단순한 형과 색의 등가적 재현이 아니다. 물론 확대된 크기에서부터 등가성은 이미 지양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우선적으로 평면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었던 현대회화의 도그마를 벗어나려는 행위로 보인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구성은 그림을 세우거나 누이거나 차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올-오버(all-over)하지만, 무엇보다 평면을 와해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주름으로 형성되는 꽃의 형상은 이로써 뻣뻣한 평면을 끊임없는 파동의 장소로 활성화된다. 어느새 데카르트의 기하하적 고정적 세계는 유기체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공간의 겹 속에서 생명을 요동치게 만든다. 이러한 변신을 통해 회화는 생명활동의 기호로 치환된다. 이렇게 한수정의 꽃그림은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얻을 수 있다.

 

끝으로 김춘수의 시 은 필자의 생각을 사뭇 촌스럽지만 진지하고 감성적으로 정리해 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 시를 역전시키면 한수정의 꽃그림은 보다 깊은 의미가 될 수 있겠다.

 

김정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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