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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성 회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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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태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세계를 표현하고 싶어서 추상 미술에 몸담았다. 세계의 본질을 그리려 갖가지 실험을 거듭했다“-윤명로

봄날의 햇살은 묘한 여운을 지닌다. 그저 따사로운 온기만을전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속에 서려있는 지난, 겨울의 한기 또한 담고 있었기에, 아니 힘겹기만 한 계절의 변화를 머금고 있는 것이기에 그 여운 또한 짧지만 길고 진했는지 모르겠다. 이 화사하기만 한 봄 날, 작가의 그림 앞에 마주한 당혹감을 차라리이 계절의 묘한 여운 탓이라 미루는 것은 그저 괜한 너스레였을까.

작가의 그림은 아니 작가가 빚어낸 추상은 이 계절만큼이나 알 수 없는 의뭉스러움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미혹(迷惑)하게 한다. 어떤 머뭇거림으로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의모든 그림은 이처럼 우리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저 들판의 풀 한포기를 담아낸 그림조차도말이다. 작가가 보려 하는 것과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사이의 일정한 시차(視差) 때문일 것이다. 보이는 것으로 가득 찬 세상이겠지만 우리들각각은 사실 조금은 다른 방식과 감각으로 그 보이는 것들과 마주하고 있고, 이를 형상으로 전하는 그림의경우엔 그리기라는 또 다른 변수가 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직성 작가의 경우 이러한 시차의 폭이 더깊을 수밖에 없을 듯한데, 세상사의 명징한 것들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추상의 길을 걷고 있는 만큼그 머뭇거림의 정도는 이 봄날 쌀쌀맞게 부는 바람처럼 더 나부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사실, 추상은 우리 앞에 놓인 가시성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것이 아니라, 어떤 변형의 과정을 통해 이를 추출, 개념화시키려는과정에서 발생한 미술이다. 우리 앞에 마주한 저 생생한 세계, 곧가시적이라 믿었던, 하지만 좀처럼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세계를 다시 괄호치고, 작가에 의한 가시성으로 거듭나게 하는 미술인 것이다. 모든 보이는것에는 보이지 않는 갖가지 맥락들이 얽혀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추상에서 문제가 되는 것도 이처럼 비가시성으로얼기설기 짜여있는 세계를 다시 보려는, 그 변형 과정 자체일 것이다.이 쉽지만은 않은 과정에는 세상과 마주하는 작가 개인의 사유나 감각화 된 경험, 태도 또한응축될 수 있기 때문에 추상은 복잡한 세계의 축약이나 단순화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그 반대의 길일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작가와 세상 속에 자리하는 역설과 모순, 긴장감이 함께 자리할수도 있는 것이다. 그저 대상을 단순화시킨 그림이 추상이 아닌 것일뿐더러 설령 단순화라 할지라도 그과정은 복잡한, 혹은 인고의 변형의 과정, 다시 말해 사유와감각을 압축하는 과정을 수반할 테니 말이다. 작가의 경우 이러한 비가시적인 전후 맥락들에 대한 관심이특히나 남달랐다는 생각이다. 지극히 구체적인 추상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싶다. 그리고 그 길에서 작가가 마주하는 구체적인 세상과의 간극을 좁히려는 과정에서, 어떤 역설과 긴장마저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모두(冒頭)의 말처럼 추상의길은 형태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상태, 세계의 본질 같은 것들을 드러내야 하는 길이기에 쉽지않은 작업이긴 하지만, 순수한 마음의 발로에서 기인하는 경우들이 많다.작가의 경우 정직성이라는 화명(畵名)이 그런 것처럼, 삶의 무게를 정직하게, 그렇게 온전히 받아들이는 추상을 그동안 펼쳐왔기에더욱더 그런 것 같다. 그저 세상을 바라보고 개념화하는 것이 아니라,이처럼 구체적인 현실의 무게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려 했다는 면에서 여느 추상과 구별되는 것이다. 삶의존재론적인 무게마저 느껴지는 추상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동안 작가는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해왔다. 삶의맥락들과 구체적인 경험들을 무정형의 구축이라는 독특한 추상의 길을 따라 직조하려 했고, 다시 그 살가운체험된 감각들을 드러내기 위해 예기치 않은 삶의 우연성이나 의외성 또한 화폭에 담으려 했다. 이러한그리기의 과정에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 또한 드리웠기에, 삶의 본질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작가 스스로자유롭게 하려는 추상 본연에의 의지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작가의 추상은 구체적인 삶의지반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며, 이를 다시 온몸의 감각으로 허하는 추상이라는 면에서 정직한 그리기였던것이다.

이번 전시의 경우 작가는 두 가지 공간성 혹은 장소성에 대해 천착한다.그동안 자연스럽게 체험된 공간성의 논리를 갖가지 시도를 통해 화폭에 담아왔던 작가인지라 공간, 장소성에대한 고민은 꽤나 오래 지속된 문제의식이었다. 작가의 주된 관심사라 할 만한 것이다. 그 한 궤적은 작가가 그동안 고민하고 체험했던 공간에 대한 사유들의 연장들,다시 말해 최근의 자신의 삶의 조건을 떠받치고 있었던 장소성에 대한 지속된 탐색이고, 다른한 궤적은 작가에게 새로운 공간성으로 마주한 이번 전시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들로 향한다. 이러한두 공간은 서로 이질적인 장소 감각들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모든 공간에 대한 경험은 현실적으로는이렇게 상반된 경험들로 착종된 것일 수도 있는 것일뿐더러, 작가 역시 이러한 상호 배리된 공간성의 논리를 체험해왔고 그 불균등한 경험의 양상들을 그림으로 드러내왔기에, 어떤 망설임이 앞서지 않는다. 이 서로 다른 공간성의 논리가 결국은화폭에서 함께 자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가 선택한 추상의 길은 제격일 수밖에 없다는생각이다.

작가는 먼저 자신의 현재적 삶이 투영된 장소성에 대한 고민을 선행시킨다. 자신의 현재적 삶을 온전히 누르고 있는 삶의 어떤 조건들로 말이다. 이는한낱 조건일 뿐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에겐 지극히 구체적인 지금의 상황들에 대한 명징한 감각들이자 그간의 공간에 대한 작가 특유의 관심과 연동되는것들이다. 작가는 이를 다시 추상으로 품어 안는다. (삶의) 조건이란 작가에게 ‘어떤 일을 이루게 하거나 이루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상태나 요소’ 일뿐만 아니라온몸 가득히 받아들여야 하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어떤 작용들이기도 하다. 특히나 삶의 구체성의 감각에서집적되는 추상을 고민하는 작가에게 있어, 이러한 조건들은 자신의 삶을 누르는 어떤 무게감이자 자신의 (추상)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감각 작용에 다름 아닐 것이다. 특히나 그 조건들이 공간에 대한 문제일 경우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어떤 조건일 수 있지만, 작가는 이조차도 자신의 공간 감각에 대한 추상들로 개념화시킨다. 공간을추상화시켜온 작가의 논리, 곧 공간에 대한 경험과 사유들이 어떤 감각처럼 전이되어, 다시 작가가 새로 마주하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으로 덧붙여지는 것이다. 구체성의감각이 추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고, 다시 그 추상의 논리가 감각으로 작용하여 구체적인 현실을 붙잡으려하는 식이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에서의 드로잉은 물론, 계통적으로그 전작 격이라 할 수 있는 추상들 모두 같은 공간 논리의 감각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일정한계열화된 감각들로 묶어지는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밑그림격인) 드로잉과 (그로부터 발전된) 추상의, 그런 관계가 아니라 같은 감각과 사유에서 비롯되고 발전된, 추상이자동시에 드로잉인 그런 작업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경우 화면 안에서 얼마나 더 구체적인 형상을가지고 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어떤 형태조차도 작가 특유의 추상의 논리에 의해 재정향된구체성이라 할 만 한데, 이쯤이면 추상이고 구상이고 그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새로운 공간성으로 마주한 이번 전시 공간은 어떤 감각적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전시공간의 고즈넉한 넉넉함조차도 이 봄날의 애매하기만 한 햇살처럼 다의적이고 모순적일수 있음을 애써 드려내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떤 완성되고 구축된,질서정연하고 안정감을 주는 공간감이 아니라 그러한 느낌들조차도 그 속에 담고 있는 서로 이질적인 의미들, 예컨대 비균질적이고 모호한 의미를 동시에 지닌 채로 자리하고 있음을 담아내려 했던 것 같다. 작가가 지젝(Slavoj Zizek) <삐딱하게 보기>에서 재인용한 로버트 하인라인(Robert Heinlein)의 소설 ‘조나단 호그의 불쾌한 직업’에 나오는 ‘회색빛 무정형의 안개’를 언급하는이유도 이와 연관된다. 창문 밖의 ‘미완의 생명을 지닌 듯 천천히 흐르는 회색빛 무정형의 안개’는 작가가추상의 감각과 사유를 통해 붙잡으려 했던 그 어떤 것이라 추정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안개는 아무것도없는 텅 빔의 상태이기도 하다. 창문을 통해 보면 모든 것이 자명하게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그 창문을열면 아무것도 없고, 그저 자욱한 회색빛 안개만이 흐르고 있는 이 안개에 대한 인용은 작가의 추상이창문이라는 재현 틀을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보기를 위한 것과 연관되어 있음을 증거 한다. 언어 같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오롯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들, 때로는공백이나 무의미, 뉘앙스처럼 자리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 말이다. 그렇게 좀처럼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들로 작가의 시선은 향한다. 그렇기에 때로는 자명한 가시성으로 다가오는 형상들을 지우려하기도 하고, 그리다만 것 같은 공간의 자유로운 구획들, 격자의 구조와 뭉개진 자국들이 같은 화면에 자리하게 할 수 있었던것이다. 때로는 색채의 과감한 사용을 통해 세상이 가진 복잡다단한 속내와 유동성의 느낌을 전하기도 하면서말이다. 특히나 스프레이를 사용한 형상의 번짐과 지우기는 작가가 이러한 회색빛 무정형의 안개와도 같은창문 밖 세계를 형상하려는 의지로 읽혀진다. 사실 앞서 말한 창문 밖 회색빛 무정형의 세계는 어떤 빈곳, 이를테면 반-장소에 해당하는 라캉(Jacques Lacan)식의 실재계(The Real)를 의미한다. 이곳은 현실보다 더비실재적인 곳으로,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것은 우리의 보고자 하는 욕망의 시선(응시, regard)이미처 채우지 못하는, 그러한 응시를 덮어버리는 막(screen) 같은것이다. (시선의) 욕망이란 것이 끝내 충족되지 않고 끊임없이지연되는 것이라 한다면, 이 막은 그러한 욕망이 끝내 결핍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비추는 일종의 스크린 같은 것으로 작용한다. 우리 자신의 존재를 못내 투영하고 마는 그런 스크린 말이다. 결국 비가시적인 세상의 이면을 향한 작가의 시선이 이처럼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은 역설적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단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상사의 타자성이 작용하는,그런 맥락까지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구현하고자 하는 추상은, 외부의 구체적인대상들로 향한 것들이었지만 결국은 자신의 내부를 향한 시선, 그 맥락에 대한 사유의 작동 자체를 다시재인식 하고자 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현존을 누르는 것들, 곧 타자의 욕망이라 할 수 있는 것들과 특정한 관계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현존, 그러니까 자신의 살아있는 공간에 대한 감각과 인식들을흐린 안개처럼 뿌옇게 가로막고 있었던 삶의 어떤 조건들과의 관계들 말이다. 그런 조건들이 결국은 현재의작가 자신을 보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는지. 그 구체적인 공간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향해 닿으려 하는자신의 온전한 감각 덩어리들 말이다. 작가가 느꼈을, 공간가득 화사하게 너울거리게 할 이 봄날의 정취는 그렇게 다시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만 같다.

 

민병직(문화역서울 284 퍼블릭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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