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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여인 나부, 한국근현대누드걸작전(193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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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여인, 나부裸婦 : 

한국근현대누드걸작展 1930~2000


강대운 구자승 권옥연 권진규 김   경 김경승 김정숙 김충선 김호걸 김흥수 남   관 박득순 박생광 박석호 박성환 박영선 배동신 손상기 손일봉 송혜수 오승윤 이동표 이   림 이만익 이인성 이종무 이충근 임직순 장리석 전뢰진 전혁림 정문규 정승주 조병태 천경자 최쌍중 최영림 한   묵 황술조 황영성 황용엽 등 41인. (가나다순)


● 전시기간 : 1.31(목)~ 2.20(수)

● 전시장소 : 롯데갤러리 본점 (롯데백화점 본점 12-14층) 

● 전시문의 : 롯데갤러리 02-726-4456  담당큐레이터 성윤진 

● 홍보담당 : 오새라 02-726-4428



● 전시의의 : 

- 서구문화의 소산인 ‘누드’가 우리땅에서 어떻게 정착하고 변화의 과정을 밟았는지 살펴봄. 

- 누드화가 기존 아카데믹화의 전형이었던 만큼 한계를 극복하여 예술적 표현으로서의 누드조명.

- 현대미술의 주요테마로 그 흐름 자체가 한국미술사를 반영하고 있어 의의.


● 전시구성 

Section1. 60년대 이전 

         누드가 전통적인 서양미술교육의 소산이었던 시절로 아카데믹한 경향이 특징.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딛고, 자신의 화풍과 이야기로 승화시키려는 노력 엿보임.

         이인성, 권진규, 권옥연 이림, 한묵, 박영선, 황술조, 김경, 김경승, 김정숙 등

Section2. 60년대 이후 

          누드를 주로 그리는 작가 중 화단의 작가위상 고려 

           김흥수, 최영림, 박득순, 김호걸, 손일봉, 정문규, 최쌍중 등

+

현대작가들의 다양한 작풍을 골고루 보여줄 수 있도록 선정.

            누드를 전문적으로 즐겨 그리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화풍으로 변모시킨 다양한 

            현대화풍의 누드감상 가능.

강대운, 구자승, 김충선, 남관, 박생광, 박석호, 박성환, 배동신, 손상기, 송혜수, 오승윤, 이동표, 이만익, 이종무, 이충근, 임직순, 장리석, 전뢰진, 전혁림, 정문규, 정승주, 천경자, 황영성 등.


Section3. 특별한 이야기 : 이림, 한묵, 권옥연, 손상기.

누드로 행복한 추억을 그린 작가 : 권옥연, 손상기, 천경자

평생 누드를 거의 그리지 않은 작가 : 한 묵, 임직순

처음 공개되는 누드 : 이인성의 <초록배경의 누드, 1935>





“여인이 벌거벗은 그림인 고로 사진으로 게재치 못함 (매일신보, 1916)” 


1916년 동경미술학교 졸업생인 김관호(1890~1959)의 졸업작품인 <해질녘>이 문전(일본 문전10회) 특선을 알리는 신문기사 말미에 밝힌 내용처럼 지극히 보수적이었던 한국사회에 한국누드화의 역사가 근 100년이 되는 시기.

1960년을 기점으로 전, 후 구분하여 전시.

알몸은 볼거리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서구문화의 소산인 누드가 한국에 정착하며 변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려 함.

1960년대 이전은 누드 작품이 극히 드물며 아카데믹한 미술의 전형에서 차츰 벗어나려는 시도.

1960년대 이후 작품은 누드를 그린 작가 중 화단의 위상, 다양한 화풍, 그림 속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골라 선보임.

한국에 누드화가 시작된 이후, 1930년대부터 2000년대(현재)까지 근현대기 대표적 누드 50점 소개. 


50년대 이전 제작된 누드화로 현재 남아있는 작품이 약 50여 점으로 추정, 그 중 이인성(1912~1950) 작품 소개. 

6.25전쟁 시 제작된 누드화, 이 림(1917~1983)의 누드는 피로 물든 것 같은 핏빛 누드로 아파서 신음하는 인류를 어머니의 누드로 표현하여 눈길.

전쟁 피난시절, 부산에서 제작된 권옥연(1923~2011)의 <부인상, 1951>, 평생 단 한 점의 누드만을 남겼다는 한 묵(1914~)의 <누드, 1953>는 전쟁 중에도 멈출 수 없었던 작가의 예술의지를 엿볼 수 있다. 


종전 이후, 유럽, 미국 등지로 유학을 다녀온 초창기 유학파 김흥수(1919~), 박영선(1928~1996)의 이국적인 누드, 왜색이 짙었던 박생광(1904~1985)의 누드도 선보여.


1970년대 민족 고유한 정서가 담긴 설화나 민담 등을 에로틱한 여인의 누드와 결합하여 독자적 세계를 구축한 최영림(1916~1985)의 독특한 모래그림을 비롯 박석호(1919~1994), 박항섭(1919~1994), 장리석(1916~), 송혜수(1913~2005), 이종무(1916~2003) 등 향토색이 짙은 누드 소개.


전형적인 사실주의 계열 화가로 완벽한 뎃생력으로 생동감 넘치는 여인의 나체상을 그린 박득순(1910~1990)을 비롯한 김호걸(1934~), 구자승(1941~), 조병태 등 누드화를 즐겨 그린 사실주의 누드화와 함께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랬듯이, 평생 남긴 누드화가 몇 점 정도밖에 안되는 작가, 남관(1911~1990), 박성환(1919~2001), 이만익(1938~2012), 임직순(1921~1996) 등도 소개됨.


자신의 신혼을 담은 손상기(1949~1988)의 연인상인 <화가와 여인, 1978>과 임신한 여인그림 <초조,1986>는 작가의 행복한 순간을 화면에 담았다. 또한 천경자(1924~)의 대작, <전설, 1962>역시 당시 가정적으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낸 작가의 모습을 반영하듯 의례적으로 따뜻하고 서정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누드와 춘화의 다른 점은 춘화는 대중의 성적인 정서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치중한다면, 누드는 인간 자체의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제 백년을 넘어서는 한국 서양화의 역사를 ‘누드’를 통해 폭넓게 조망하는 자리.



ㅁ1960년대 이전


이인성 李仁星 1912~1950  

초록배경의 누드, 24.2x33.4cm, 나무에 유채, 1935, 개인소장

초록색배경의 누드는 1935년 작품으로 그가 즐겨쓰던 초록색 바탕과 화병, 테이블을 배경으로 뒤돌아선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작은 소품이지만, 당시 아카데믹한 분위기를 탈피하여 특유의 건삽하면서도(유화가 말라 윤택이 없음) 경쾌한 마티에르와 묘법을 선보이고 있다. 일본적 아카데미즘이 맹목적으로 이식되던 시기에 독자적 감성의 화풍을 구추한 이인성의 화풍이 잘 드러나 있다.


일제시대 선전의 대표작가인 청정 이인성은 보통학교 졸업 후 대구에서 서동진(徐東辰, 1900~1970)으로 부터 수채화를 배우고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1932~1935)하였다.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선전에서 6회 연속 특선, 최고상 수상, 심사참여, 추천작가 일본 제전에 입선하는 등, 당시 화단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자유분방하고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일찍부터 인상주의에 경도되어 풍부한 색채와 감각적인 터치로 생활주변의 풍경이나 정물, 인물을 주로 그렸다. 만년에는 세잔느와 보나르의 회화에 편력하고 이를 자기 나름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일찍 타계함으로써 아쉬움을 남긴 신화적 인물이다.


권옥연 權玉淵 1923~2011 

부인상, 72x99cm, 캔버스에 유채, 1951, 구삼미술관 소장

전쟁 중이었던 1951년 그린 그의 대표작 <부인상>은 권화백이 1951년 결혼기념으로 부인을 그린 것이다. 거의 비슷한 크기, 똑같은 구도의 옷 입은 부인상도 전해진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그린 것이지만, 낭만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당시 물감, 팔레트 같은 기본재료도 구하기 힘들었던 작가는 동료화가들에게 물감을 겨우 빌리고도 모자라 연탄재를 섞어 검은빛을 냈을 뿐만 아니라 깨진 유리조각을 팔레트 삼아 제작한 그림이다. 작고한 미술평론가 이일씨는 “부인상”을 권옥연 회화 양식의 첫걸음으로 보고 있다. 묘사적이기보다 오히려 암시적인 배경처리가 어떤 신비감을 지니게 하는 것 같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인을 모델로 한 것은 북쪽이 고향인 작가에게 남다른 심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이 역작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여겨진다. (평론가 故이규일)


권옥연 호는 무의자(無依者), 함남 함흥 출생으로 1944년 동경제국미술학교 (현 무사시노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에는 파리 아카데미 드 그랑 쇼미에르에서 수학하였다. 유학시절 인 1941-44년, 20, 23회 조선미전에 출품 입선하였다. 귀국 후 현실에서 취한 서정적인 주제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1957-60년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당시 프랑스의 앵포르멜적 추상주의에 동조하여 새로운 화풍을 시도한다. 우리의 문화에 남다른 이해와 안목을 갖춘 그는 사재를 털어 한국의 전통가옥을 중심으로 세우고 그 박물관의 관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1953년 제5회 대한미협전 문교부 장관상, 1986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4년에는 3.1문화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어 국립현대미술관이 근대미술관으로 운용하고 잇는 덕수궁분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 한 바 있다.




이  림 李 林 1917~1983 

나부, 37.5x51cm, 목판에 유채, 1952, 개인소장

대지 위에 헐벗은 채로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운 나부는 아니다. 이림은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기 위해 폐허가 된 대지와 누런 하늘을 배경으로 피로 물들어 고통받고 있는 여인을 그렸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어머니, 이 땅의 여인을 기록하기 위하여 나부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림은 1917년 경상남도 마산 출생으로 서울중동중학교, 중동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다가 1972년 한국미술협회이사를 역임하고, 1980년에는 제 24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위원과 경상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 서양화과분과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李林의 후년이 뚜렷한 작가상이 비구상 작업에서 이룩되었음은 명백하다. 그에게서 시종 병행된 구상작품들도 그럼 나름의 성과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의 본격적 창작은 國展을 비롯한 공공 성격의 중요 전람회에 출품하였던 대부분 大作의 고심한 비구상 작품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박영선 朴泳善 1928~1996

아뜰리에, 72x92cm, 캔버스에 유채, 1957, 고려대학교박물관 

1957년작 <아뜰리에>는 파리 시절의 양식을 보이는 작품이다. 기하학적으로 분할된 화면은 대상에의 감정, 이입을 차단하고, 지적 분석과 통합의 세계를 지향한다. 청색조의 색감 역시 차갑고 주지적인 박영선 작품의 특징이다. 


1955년 프랑스 파리로 떠난 박영선은 그 곳에서 새로운 조형어법과 현대미술의 최신의 경향들을 만나면서 새롭게 자신의 작품을 일구어 나간 작가이다. <아뜰리에>는 파리 체재시의 작품으로, 당시 아카데믹한 화풍을 고수하면서 조선미술전람회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풍에 머물러 있던 그가 낯설고 버거웠던 파리의 현대미술을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드모델을 비롯한 인물들의 완벽한 모델링, 면의 분할과 뛰어난 색채 표현, 구상과 추상의 조화로운 공존이 인상적이다. 



1960년대 이후


김흥수 金興洙 1919~

누드, 60.5x72.5cm, 캔버스에 혼합재료, 1980, 개인소장

“내가 여성의 누드를 그리는 것은 누드, 특히 여체가 자아내는 곡선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서다. 따라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창조적인 데폼(deform)이 아니라 아름다운 선의 창조에 있다. 이상적인 선의 아름다움이 자아내는 매혹적인 선율,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미와 행복을 동시에 찾아내는 것이다.” (김흥수)


1936년 제16회 조선미술대전 특선으로 데뷔한 작가는 1944년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55~61년 파리로 유학했다. 김흥수 화백은 여성의 누드와 기하학적 도형의 추상화를 대비시킨 조형주의를 개척한 인물로 ‘한국의 피카소’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1993년 동양인 최초로 러시아 에르미타쥬 박물관에서 초대전을 열었으며 1996년 문화훈장 옥관장, 1999년 대한민국 금관 문화훈장을 각각 받았다. 여성의 인체를 탐미하며 자신의 주요 소재로 삼았던 작가는 1955년 폐허였던 서울을 떠나 파리로 유학하면서 자신이 그리는 누드, 특히 여성누드는 평화를 상징하며 이는 프랑스에서 체득한 누드화에 대한 예술철학이라고 고백한다. 


최영림 崔榮林 1916~1985

비둘기와 여인, 45.5x53cm, 캔버스에 유채와 모래, 1970, 갤러리대아 소장 

“내 그림에는 미인도랄 게 없다. 구수한 흙 냄새가 코끝을 스쳐갈 때 나는 향기로운 여인의 탄생을 보게 된다”

1960년대 후반부터 그는 풍만한 여성 이미지나 민담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해학적이고 활달한 붓 터치로 그려 냈다. 실험과 모색을 거쳐 1970년대부터 입체감이나 원근법을 무시한 채 왜곡되고 과장된 여체로 풀어낸 최영림식 나부가 등장한다. 그의 나부에는 처자식을 두고 피난 온 이후 절망의 늪에서 헤매던 실향민으로서 망향정신이 담겨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최영림은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고(1938), 1940년 평양에서 박수근, 장리석과 함께 주호회 동인전을 갖고 제 14, 17, 21, 22회 선전에 입선하였다. 해방 후 1950년 한국전쟁 때 가족을 남겨 둔 채 동료화가 장리석과 함께 남하한 그는 제주, 마산, 서울 등지를 유랑하며 어려운 피난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제 8회 일본 동경비엔날레를 차가하고 창작미협(1957), 구상전(1967)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화여대(1958~1960)와 중앙대(1975~1981) 교수를 역임하고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지냈다. 


박득순 朴得錞 1910~1990

나부, 72.7x60.6cm, 캔버스에 유채, 1986, 개인소장 

완벽한 뎃생력으로 여체(女體)의 비례감과 톤의 탁월한 조화 속에 생동감 넘치는 여인의 나체상(裸體像)을 완숙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화면 전체에서 풍기는 나체상의 모습이 속됨 없이 우아미(優雅美)의 극치(極致)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전형적인 사실주의 계열의 화가로, 철저하게 대상의 세계를 파고들어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을 추구하였다. 그는 누드화야말로 회화의 진수이며 본령이라고 믿을 만큼 시종 일관된 자신의 예술관을 밀고 나갔던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미의 근원을 인체에 두고 많은 누드화를 제작하였다. 


박득순은 한남 문천에서 출생하여 1938년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선미전에서 2번의 특선을 하고 국전 초대작가, 한국미협 초대이사장, 서울대 미대, 수도사대, 상명사대, 영남대 교수 등을 지냈다. 아카데믹한 구상화가로서 인물화에 능하였다.


장리석 長利錫 1916~

해녀, 24x44cm, 캔버스에 유채, 1971, 구삼미술관 소장

“일반적으로 누드를 그리는 데에는 여성 몸매의 아름다운 곡선에 포커스를 맞춰 탐미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흔하다. 나의 경우 누드의 단순한 곡선의 아름다움 보다는 탄력있는 근육과 생동감 넘치는 야성적인 인상에서 더 강한 감동을 받는다. 단순한 구도상의 누드보다는 생동감있는 삶의 현장에서 누드를 그리려는 것이 나의 작품세계라고 하겠다.”  - 장리석 


평양 출신의 장리석은 일본 다마가와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1939) 선전에 입선하였다. 해방 후 제7회(1958) 국전에 <그늘의 노인>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추천작가, 심사위원(1962~1981)을 역임했다. 한국창작미협전, 창립위원(1956), 국제자유미술전(1962), 목우회(1964~1969), 한국사실작가회원전(1969~1971)에 출품했으며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손상기 孫詳基 1949~1988

화가와 여인, 23x23cm, 캔버스에 유채, 1978, 샘터화랑 소장 

<화가의 여인>은 그의 짧은 생애에 가장 행복했을 순간 중 한 장면을 담았다. 작은 화폭에 연인의 모습을 그려 넣은 작가는 간결한 선과 형태, 단순한 색감, 언뜻 스치는 표정으로 당시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길고 커다란 눈망울을 한 작가는 몸매에서 그 특유의 장애를 드러냈지만, 표정만큼은 애정과 사랑이 묻어있는 반면, 덜 성숙된 여인의 모습은 이목구비를 표현주의적으로 흐트러뜨림으로써 약간의 불안과 망설임이 비친다. 뿐만 아니라 단순하고 가라앉은 황토색 혹은 암갈색을 배경으로 선홍빛의 의자와 여인의 들뜬 입술은 긴장감마저 고조시킨다. 행복했지만 앞날이 불안했던 당시의 심정을 압축하여 표현한 수작이다. 


전남 여수에서 태어난 손상기는 세 살 때 구루병(척추가 굽어지는 병)을 앓은 데다가 초등학교 때 나무에서 떨어져 평생을 척추장애와 함께 살았다.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고, 원광대학교 회화과에서 그림을 배웠다. 고향여수의 바다와 어시장을 소재로 작업하다가 1979년 상경한 뒤 아현동 홍등가와 도심 변두리의 삶을 공작도시 연작으로 표현했다. 1981년 서울 동덕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그는 이듬해 공작도시-신음하는 도심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한국미술대전 입선을 차지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가난과 고독을 그림과 글로 승화시킨 그는 울혈성 심부전증으로 1988년 서른아홉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만익 李滿益 1938~2012

누드, 24.2x33.4cm, 캔버스에 유채, 1995, 개인소장


이만익의 회화는 주제의 일차적인 비중과 설명적인 묘사로 인해 비예술적인 혹은 민화나 삽화와 같은 대중적인 그림으로 그쳐질 위험을 지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특이한 예술 차원의 내면을 성취하고 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의 이만익은 우리의 문학적 고전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현대적 조형어법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해 오고 있다. 인물의 표정이나 전체의 사실성을 위한 원근법이나 농담법이 발견되지 않으나 명료한 형태와 고전적 정서를 결합시키면서 화려한 색조인데도 그림의 분위기엔 착 가라앉은 정한과 막연한 슬픔의 느낌이 배어 있다. 단순 명쾌하고 강건하며 때로는 부드럽고 리드미컬한 굵은 테두리 안에 작은 우주를 관장하는 듯한 여인의 모습이 깊이감 있는 푸른색과 강렬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굵게 구획된 테두리와 대담한 원색을 동반한 화면 속의 여인은 오히려 정겨움을 가져다 준다.


김호걸 金虎杰 1934~

여인누드, 70.5x51cm, 캔버스에 유채, 1983,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누드 작가 김호걸 화백은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일종의 집념과 미학을 가지고 나체를 그려왔다. 김화백은 ‘인간의 원래 모습은 옷을 입지 않은 상태이고, 옷은 지위나 기능에 따라 인위적으로 입혀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단순히 모델을 베끼는 게 아니라 균형 잡힌 인체에서 받은 건강한 생명의 느낌과 감동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한다. 모델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 요소를 오랫동안 정관하여 자세를 만들고 색채를 가미하여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김호걸은 경북 영주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으며 누드작가로 알려져 있다. 1983년작 <여인 누드>는 배경의 연보라색 면과 누드의 살색 면으로 크게 대비되어 비교적 단순한 구도를 갖추었다. 깃털과 같이 가늘고 긴 터치로 그려진 배경은 전체적으로 가볍고 화사한 느낌을 조성한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이 여인의 살결 위에 떨어져서 투명하고* 보드라운 촉각적 효과를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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