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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셸 바스키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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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 앤디 워홀 등과 교유하던 1980년대 중반의 그래피티 회화적 양식표현 기법을 사용한 작품으로 구성.


○ 관람 안내

전 시 작 가: 장-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American, 1960-1988)

전 시 일 정: 2013. 2. 14 - 3. 31

전 시 장 소: 국제갤러리 2관(K2)

기자간담회: 2013. 2. 14 (오전 11시), 국제갤러리 2관 

개 관 시 간: 월요일-토요일: 10am-6pm, 일요일, 공휴일: 10am-5pm


○ 전시소개

국제갤러리는 오는 2월 14일 K2 전시장에서 21세기 미국 미술의 검은 피카소라 불리는 장-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전을 개최한다. 1988년 8월 27세의 나이로 드라마 같은 삶을 마감한 바스키아는 짧았지만 왕성했던 8년간의 작품생애를 통해 미국미술의 신표현주의 및 신 구상회화의 대표적인 작가로 불린다. 지난 2006년에 이은 두 번째 국제갤러리 개인전은 80년대 미국 팝 아트의 문화적 부흥에 따른 당시의 사회상을 반추한다. 특히 영웅적 흑인아이콘(예를 들면 당시 흑인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재즈 음악가 찰리 파커, 야구선수 행크 아론), 만화, 해부학, 낙서, 인종에 대한 그만의 시적이고 상징적인 문구는 시대적 하위문화의 정치적이고 자전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약관의 나이로 80년대 뉴욕 미술계의 스타덤에 오른 바스키아는 현대 회화의 대가(피카소, 장 뒤뷔페, 싸이 톰블리, 그리고 로버트 라우셴버그)들과 함께 거론 되기도 하였는데 정규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그만의 독특한 이미지들의 구성과 조합은 당시 뉴욕미술의 주요 평론가 및 화랑가 사이에서 탁월한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번 전시작품으로 구성되어있는 다양한 해부학의 도상들이 그려진 이미지들은 7살 불의의 교통사고로 비장을 들어내야 했던 시절 당시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그레이의 해부학'책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는 추후 전통적인 미술언어에 구애 받지 않은 바스키아만의 독특한 작품언어에 근간이 되었다. 


○ 작품세계

장-미셸 바스키아는 비교적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광기 어리고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통해 동시대의 중요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였다. 작품 주제는 앞서 언급한대로 자전적 이야기, 흑인 영웅, 만화책, 해부학, 낙서, 낙서와 관련된 기호 및 상징뿐 아니라 금전적 가치, 인종주의, 죽음과 관련한 그만의 시적 문구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와 같은 주제들은 때때로 경계가 불분명하며 복합적이지만 작품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기호, 문자, 인물, 등의 암시를 통해 작가의 의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자전적 이야기

바스키아는 1977년-79년에는 SAMO라는 이름으로, 1980년부터 왕관기호와 저작권의 의미를 뜻하는  라는 공증의 기호를 사용한다. 이 왕관이 상징하는 의미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존경과 찬미를 나타내기도 하고, 후에 바스키아만의 고유의 기호 곧 날인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 예로 이번 전시작품 중 자동차와 비행기가 그려진 1981년작 <무제 Untitled>는 붉은 십자가의 구급차와 비행기들이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묘사되어 그의 유년시절 교통사고에 대한 암시를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인 브룩클린에 위치한 라구아디아 공항과 케네디 국제 공항에서 착륙을 암시하는 비행기 역시 단순하게 표현되었고, “AAAAA”라는 반복적인 이니셜은 구급차의 사이렌소리와 바스키아의 첫 번째 영웅인 흑인야구선수 행크 아론의 성”Aron”의 첫 글자의 의미도 포함되어있다. 나아가 이미지 중심에 위치한 망치는 당시 전설적인 야구선수 행크 아론이 홈런을 치는 모습에서 비롯된 별명 “망치질하는 행크(Hammering Hank)”를 암시한다.


인종주의/ 흑인영웅

바스키아 미술의 중심은 인물이라고 일컬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당시 인종차별적인 사회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흑인영웅들에 대한 이미지와 남미계 히스패닉에 대한 정체성, 인종차별주의 등을 통해 동시대 흑인인물과 그에 관련된 정치적 사회적 사건의 모순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실례로 말콤 엑스, 행크 아론, 제시 오웬즈, 마일즈 데이비스, 찰리 파커, 루이 암스트롱, 빌리 홀리데이, 냇킹콜 등이 있는데, 그 중 행크 아론은 1974년 4월 8일 베이비루스의 715개 홈런기록을 깨뜨린 것으로 유명한 야구선수다. 메이저리그 11개 기록과 내셔널 리그기록 18개를 세운 공에도 불구하고 아론은 자신의 경력 대부분을 무명인 채 보냈고, 당시 미국 내 인종적 권위와 투쟁해야 했다. 그 외에도 권투선수 조 루이스와 잭 존슨, 그리고 슈가레이 로빈슨과 같은 권투역사의 챔피온들을 등장시켰는데 특히 슈가레이는 여타 체급을 넘나들며 건재함을 보였던 권투영웅이었다. 이는 마치 바스키아가 지향했던 자신과 미술의 삶이 어떤 특정한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기를 기대하는 면모와 닮아있다. 그 외 에도 이름 모를 리스트 및 숫자.  단어의 배열은 스포츠선수들의 대진표, 재즈가수의 노래 목록들로서 해당인물의 간접적인 상징을 나타낸다. 


만화/ 낙서/ 해부학도상

바스키아는 어렸을 적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어했는데 특히 어린이 만화 속에 반영된 정치적 상황의 이면을 그려냈다. 이는 사회적 현상의 이면의 것들, 예를 들어 스포츠가 정치적인 선전 목적으로 이용되고 대중문화의 도상은 인종차별주의 혹은 제도의 모순된 상징들에 관한 것이다. 

그 외에도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해부학도상의 이미지는 바스키아의 유년기 일화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7살 때 사고로 비장을 제거한 경험 이후 다양한 해부학 서적들을 탐독했고 그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과 폴리쳐의 예술적 해부학의 내장 기관 드로잉 이미지들을 향후 회화에 차용했다. 이 비장(Spleen)이라는 단어는 종종 그 자신을 나타내는 의미로 등장한다.

SAMO(세이모)라는 은어를 이름 삼아 뉴욕도시를 돌며 낙서미술을 행해왔던 그는 이를 대중적인 시 또는 개념미술의 형태로 인식했다. 바스키아의 낙서에 대한 정의는 지하철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는 것 보다는 훨씬 폭넓었고, 1980-81년 보다 광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을 진행해왔다. 특히 작가 싸이 톰블리(Cy Twombly)의 영향은 낙서 같은 외관으로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고, 해부학 외에도 풍부한 낙서이미지를 위해 아프리카의 암벽미술, 도식이미지자료집 등 여러 참고문헌에서 자신의 시각어휘를 풍부하게 해줄 기호와 상징, 표식의 공급원을 찾았다.


죽음 

바스키아의 말기 작품 대략 1987-88년도 작품들을 살펴보자면 우울하고 상처받고, 어두운 인물 이미지를 자주 도입했는데 이는 당시 마약남용과 유명세에 따른 인간관계의 고민과 앤디 워홀의 죽음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이란 주제는 바스키아 회화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편재하는 주제로써 이는 그의 불확실한 육체적 정신적 상태, 잠재적인 위협 등 그의 심리적인 면모가 작품에 점진적으로 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례로 1982년 당시 21세 때의 그의 자화상 <젊은 낙오자로서의 미술가 초상,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Derelict>는 늘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고찰해왔던 작가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고, 1987-88년의 후기 작품에 들어서며 더욱 자주 등장하여 보다 직접적인 암시로 나타난다. 


○ 작가소개

장-미셸 바스키아는 1960년 12월 22일 미국 뉴욕주의 브룩클린에서 중산층 회계사이자 아이티인 아버지와 푸에르트리코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그의 부모님은 바스키아가 7살 되던 해 이혼했다. 바스키아는 1988년 27세의 나이로 뉴욕 자택에서 코카인 중독으로 요절하기까지 8 여 년의 짧은 작품 활동기간은 당시의 미국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만화가와 시인을 꿈꾸던 바스키아는 15살 집을 나와 17살이 되던 해 당시 진보적인 대안학교, City As School을 그만두었고, 이후 그곳에서 만난 친구 제이콥 리즈 프로젝트의 낙서화가 알 디아즈와 함께 떠돌며 스프레이마커나 오일크레용을 사용해 뉴욕 소호 거리의 외벽에 사회적으로 저항하는 이미지와 메시지를 남겼다. 그들은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작품과 함께 늘 흔적을 남겨놓았고 이는 ‘세이모’ SAMO©(속어-Same Old Shit)라는 가상의 인물로 불려졌다. 이후 그들의 기지 넘치는 철학적 시 들로 이뤄진 문구들은 뉴욕 도시에 곳곳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비주류의 정서와 문화의 주요한 표현수단의 시발이 되었던 그래피티(Graffiti) 곧, 낙서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바스키아의 바램에 따라 도시를 캔버스 삼아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상과 감정을 순간적인 상황에 따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향후 그래피티가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바스키아는 미술 외에도 다방면에 걸쳐 많은 재능을 보였는데 디자이너로서 작품이미지를 티셔츠에 도안하여 판매하기도 하였고, 버려진 재료로 쥬얼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나아가 음악과 퍼포먼스를 행하는 밴드멤버로서 80년대 아티스트의 거점이 되었던 머드클럽, 클럽 57에서 활약했다.     


주요전시로서는 1980년 '타임 스퀘어쇼'Times Square Show’ (맨해탄 미드타운 근방의 빈 건물에서 열린 그룹 전으로서 대형 설치 회화를 진행했고 당시 많은 호평을 받았다.) 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다운타운 미술계이야기를 담은 영화 뉴욕 비트의 주인공을 맡았으며, 1981년 이태리 갤러리아 아르테 에밀리오 마촐리(Galleria d’Arte Emilio Mazzoli)에서 ‘SAMO’란 이름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뉴욕의 PS1 '뉴욕/뉴 웨이브'전을 통해 20명의 예술가들과 함께 참여, 총 20여 점의 드로잉과 회화를 선보였고 이를 통해 1985년 뉴욕타임즈에 주목 받는 작가로 회자되었다. 그 외에도 머드클럽에서 키스 헤링이 기획한 ‘로워 맨하탄 드로잉전시회’,’브래스웨이트 퓨처라’ –언어를 넘어서: 낙서에 기본하고 뿌리를 두고, 영감을 받은 작품들 (Beyond Words: Graffiti Based- Rooted inspired works)을 선보였다. 


이외에도 카셀 도큐멘타7 (Kassel dOCUMENTA)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 1983년에는 휘트니비엔날레 참여, 1983년 Akira Ikeda Gallery에서 앤디 워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와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1984년 뉴욕현대미술관(MoMA) 재개관전 –최근 회화와 조각의 국제전(An International National Survey of Recent Painting and Sculpture)전, 에딘버그의 프룻마켓 미술관 전, 1985년 뉴욕 타임즈 표지에 실린바 있고, 1986년 칼 하엔라인 기획의 하노버미술관 전시 외 다수의 갤러리 및 미술관 전시에 참여하였다. 국내전시로는 1991년 경주 아트선재센터에서 앤디 워홀과의 2인전, 국립현대미술관 순회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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