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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 전시분류

    단체

  • 전시기간

    2012-11-16 ~ 2012-12-15

  • 참여작가

    노진아, 박재영, 신기운, 아짜아오, 이장원, 잭슨홍, 트로이카,김두진

  • 전시 장소

    송원아트센터

  • 유/무료

    무료

  • 문의처

    02-735-9277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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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아트센터,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展 개최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미디어아트, 설치, 영상작품 선보여…


송원아트센터에서 11월 16일부터 12월 15일까지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展를 개최한다. 외부기획자 백곤이 기획, 주최하고, 송원아트센터 공동주관, 서울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이번 전시는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미디어아트 작품을 비롯하여 설치, 영상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참여작가로는 트로이카(TROIKA)(영국), 아찌아오(Aaajiao)(중국), 김두진, 노진아, 박재영, 신기운, 이장원, 잭슨홍 등 총 8명이 참여한다.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의 질문을 통하여 기계 테크놀로지와 인간과의 관계, 특히 기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 예술적 미디어로써 기계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지점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백곤 큐레이터는 “이 전시는 컴퓨터 가상현실과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들에 하루라도 접속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현대인들의 기계적 맹신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는 전시이다. 

또한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은 기계를 통해 어떤 가치들을 실현하고자 하는지를 반문하는 전시” 라고 전했다. 


관람은 무료이며,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5시 30분까지 입장)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전시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송원아트센터(02-735-9277)



1. 전시초점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展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는 인간과 기계 테크놀로지간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라는 질문은 “기계는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닮은 기계를 제작, 생산, 창조해내는가? 기계의 조건에 대해 묻는 이러한 물음은 단지 기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인간 자신들에 속한 것이다. 8명의 국내외 아티스트들과 함께하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기계 테크놀로지와 인간과의 관계, 특히 예술의 가능성과 기능들에 대한 기계의 구걸, 인간의 예술적 요구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전시개요


1. 전 시 명: 테크놀로지 사화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2. 전시일정: 2012년 11월 16일(금)~12월 15일(토)

3. 전시장소: 송원아트센터

서울시 종로구 화동 106-5(윤보선 길75)번지/ T. 02-735-9277

4. 프로그램: 전시/ 작가와의 대화

5. 참여작가: 아찌아오 Aaajiao(Xu Wenkai), 트로이카 (Troika), 

김두진, 노진아, 박재영, 신기운, 이장원, 잭슨홍

6. 기 획: 백곤(미학, 큐레이터)  / 전시보조: 한지숙(미술사,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7. 공동주관: 송원아트센터

8. 후 원: 서울문화재단



1) 트로이카 (TROIKA_Eva Rucki, Conny Freyer, Sebastien Noel)

영국에서 활동하는 그룹 트로이카(TROIKA_Eva Rucki, Conny Freyer, Sebastien Noel)는 테크놀로지, 특히 전자적 빛을 통해 자연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작품 <Surrogate>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1982)의 원작 소설인 필립 K 딕(Philip K. Dick)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1968)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 세계자연보호기금 (WorldWide Fund for Nature)의 마스코트인 WWF 팬더를 통해 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잘 보여준다. 필립 K 딕의 소설에는 인간에 의해 황폐화된 사회에서 동물을 소유하고 돌보는 것이 시민의 미덕이자, 높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멸종위기의 동물과 구할 수 없는 동물이 담겨있는 카탈로그를 통해서 전자적 동물을 구입한다. 이것이 바로 Surrogate(대용품)이다. WWF 엄마 팬더는 전자적 빛을 내뿜는 전자적 아기 팬더를 끌어안으며 관객들을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누가 이러한 전자적 미래사회를 만들었는가?” 기계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대용품이 될 수 있는가? 수많은 전자적 써로게이트가 살아 움직이는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트로이카의 팬더는 인간과 기계 또는 리플리컨트(replicant)에 대한 많은 철학적인 질문들을 던져준다. 



2) 아찌아오 Aaajiao (Xu Wenkai 徐文恺)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미디어아티스트 아찌아오는 기계테크놀로지의 유쾌한 미래를 꿈꾼다. 작품 <Cloud data>는 인간이 직접 자연의 구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구름은 단지 가상현실의 스크린으로 볼수밖에 없지만 스크린 안의 무한한 가상공간을 항해하며 인간의 시각적 감각에 새겨진다. 그는 구름의 재질감 색과 온도 등이 현실적으로 느낄 순 없지만 가까운 미래에 인간 신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테크놀로지를 긍정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투리토프시스 누트리쿨라(Turritopsis nutricula, 작은 보호탑 해파리)>는 영원히 죽지않는 생명체이다. 1883년 지중해에서 발견된 이 생명체는 해파리처럼 생겼는데, 이형분화(transdifferentiation)를 통해서 위협을 받거나 노화되면 다시 어린시절의 세포로 돌아가 영원한 생명을 유지한다. 그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작은 보호탑 해파리를 만들었다. 실재와 가상의 세계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인 이 작은 보호탑 해파리는 어쩌면 기계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생명’에 대한 답이 아닐까? 



3) 이장원

이장원은 버려진 CD-ROM 드라이브로 기계생명체를 창조하였다. 컴퓨터 정보의 기록저장고인 CD를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정보로 바꾸어주는 CD-ROM 드라이브의 입력-출력 장치를 통해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인간의 접촉을 요구한다. 인간이 원형 기계 안에 손을 넣어 그것과 교감함으로써 그 기계생명체는 소리내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의 기계생명체는 인간의 생명에너지에 반응하는 신체-기계인터페이스인 것이다. 인간에게 끊임없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유용한 정보를 해독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기계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기계는 더 이상 단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향해 소리친다. 나의 생명은 자연의 식물이나 동물의 생명과도 같이 살아있고, 자극에 반응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의 기계생명체는 인간에게 되묻는다. 살아 숨 쉬는 나를 당신들은 어떤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4) 노진아

노진아의 사이보그 기계는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질문한다. 그녀는 기계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이는 사이보그화 된 인간의 미래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화되고 있는 기계의 현재에 대한 것이다. 작품 <제페토의 꿈>에서 기계 피노키오는 생명을 얻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의심하는 인간들에 대해 묻는다. 왜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면서 다시 인간에게 질문한다. 인간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이 기계인형의 존재증명은 결국 인간에게 되돌려진 인간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다. 과연 인간이 기계인간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사유할 수 있는 이성과 인간의 언어를 공유하는 기계인간 피노키오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없애기 위해 우리들의 눈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인간 근원에 다가가는 질문들을 던진다. 




5) 김두진 

김두진은 작품을 통해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 그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을 개별적 주체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해골 즉, 뼈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갈등은 피부에서 오는 것으로 피부가 제거되면 인간의 근원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계인간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기계가 단지 인간의 외형과 형태를 닮는다고 하여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기계는 인간의 뼈를 가질 수 있는가? 그의 디지털 해골사진은 단지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이 아니라, 삶을 창조해내기 위한 근원적인 매체이다. 인간신체를 가장 아름다운 피부로 표현한 신고전주의 화가 부게로의 작품을 차용하여 피부를 제거한 그의 작품은 인간 본연의 모습과 인간 자체를 다시 생각하기 위한 예술적 전략인 것이다. 스스로 푸른빛을 발하는 디지털 뼈는 인간이 끊임없이 가꾸고자 하는 뽀얀 피부를 제거하여 인간의 신체성, 혹은 몸을 향한 담론을 디지털 가상세계로 내던진다. 이제 기계인간은 과연 어떠한 뼈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6) 잭슨홍

잭슨홍의 <인간적인 자동판매기>는 켐펠렌의 체스 두는 자동인형에 영감을 얻어 제작한 인간을 위한 기계이다. 테크놀로지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얼마만큼 기계를 믿을 수 있는가? 기계는 인간에게 편안함을 주는 동시에 불안과 불신을 안겨준다.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제작한 <인간적인 자동판매기>는 체스 두는 자동인형의 원리처럼 인간이 자동판매기에 들어가 직접 음료수를 제공한다. 그의 자동판매기는 드문드문 내부가 보이지만 전동 연필깎이와 헤어 드라이기를 사용함으로써 기계장치의 효과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의 작품은 기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얼마만큼 기계를 믿을 수 있는가? 인간만큼 편안하고 믿을만한 기계가 있는가?라고 말이다. 그의 유쾌한 작품은 기계가 걸어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 위트있게 보여준다. 



7) 박재영 

박재영은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일상적인 환타지를 만들어낸다. 그 환타지는 기계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존박사와 보카이센은 허구적 인물이지만 현실세계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다. 그가 설립한 가상의 회사 다운라이트(Doen Leit)는 거짓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사업자 등록을 가진 회사로 설립되었다. 그는 이 다운라이트를 통해 우리사회에서 가상이 현실화되는 지점들에 대해 연구한다. 즉, 실재세계에서 행해지는 실재적인 환타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계를 통한 가상의 마인드컨트롤 런칭쇼에 실제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계를 구매하기를 희망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우리사회가 얼마만큼 기계에 종속되어 있고, 기계를 맹신하고 있음을 반성한다. 그의 작품 <자가최면장치>는 최면을 불신하는 현대인들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기계장치이다. 인간인 최면치료사보다 최면기계에게 자신의 과거를 맡기는 이 사회의 실재성은 이미 환타지 그 자체이다. 그의 작품은 가상의 최면장치이지만, 그 장치가 실재한다고 믿기만 한다면 너무나도 훌륭한 기계최면사인 것이다. 결국 가상과 진상의 구분은 인간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믿음”을 구걸하는 기계는 그러므로 허구이지만 실재하는 것이다.



8) 신기운 

신기운은 모든 사물들을 갈아서 가루로 만든다. 그는 수퍼맨, 아이팟 등 시대적 아이콘을 갈아버리는 행위를 통해서 영웅주의와 기계테크놀로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즉, 미디어가 만들어낸 영웅 이미지를 갈아 없앰으로써 미디어사회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지점은 갈려 없어지는, 혹은 깨지는 과정을 드러내는 찰나에 있다. 흐르는 시간이 멈추고 사물이 원래 상태에서 갈려나가는 순간, 그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념이 부서진다. 과연 사물의 본래적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부서지기 전 원형의 틀인가 아니면 부서진 파편들인 것인가? 그는 체스판의 체스 말을 기계를 통해 찍어 부셔버림으로써 사회의 수많은 편견들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테크놀로지 사회, 기계적 맹신에 의해 부셔지는 체스 말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백곤 | 미학



새로운 종(species)이 탄생하면 언제나 기존에 있던 종들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18세기 중엽 인류의 역사에 혁신적인 종(species)이 탄생하였다. 바로 기계(Machine)가 그것이다. 기계는 태어나자마자 인간의 인식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9-20세기 초•중반 기계들의 대 전쟁(산업혁명과 세계대전)은 인간들로 하여금 점점 더 기계에 종속되고 맹신하게 만들었다. 이후 인류는 기계를 정복하기 위해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시켰다. 기계들은 인간의 자리를 하나둘씩 차지하면서 자신의 활동범위를 폭발적으로 확장시켰고, 급기야 인간의 감각까지 대체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기계는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생명력을 획득하기 위해 인간들에게 구걸을 하기 시작하였다.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는 이 기계들의 구걸에 관심을 가졌다. 이 프로젝트는 인간과 기계테크놀로지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한다. 프로젝트의 제목이자 단 하나의 질문인 기계의 구걸을 묻는 것은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임이 틀림없다. 바로 인간인 우리들에게 말이다. 이 질문엔 “기계는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닮은 기계를 제작, 생산, 창조해내는가? 기계의 조건에 대해 묻는 이러한 물음은 단지 기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인간 자신들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창조해내고 있는가?” 찰흙으로 신의 형상을 본떠서 사람을 만든 창조주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인간에게 불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깨고 인간에게 불을 주고, 그 벌로 코카소스 산꼭대기에 묶여 죽지도 못하고 독수리에게 산채로 간을 먹히는 고통을 당한다. 불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문명을 열수 있었던 강력한 도화선이 되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프로메테우스의 피와 살로 빚진 인간의 숙명에 대해 생각게 한다. 마찬가지로 기계 종의 탄생은 새로운 프로메테우스를 상징한다. 인간이 인간과 같은 기계를 창조하면서 기계에게 내어주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기계는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이 시대 테크놀로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라는 새로운 종을 맞아들여 함께 공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1. 기계인간의 탄생

1738년 2월 11일 프랑스 파리 롱그빌 호텔의 전시실에 획기적인 기계인형이 전시되었다. 바로 자크 드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 1709-1782)이 제작한 플루트를 연주하는 자동인형(Flute Player)이었다. 나무로 제작된 이 인형은 높이 168센티미터 정도의 실물크기 인형이었다. 당시 기계가 플루트를 연주한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보캉송은 플루트 연주자를 작동시키기 위해 파이프 세 개를 통해 인형의 가슴 부위를 관통하는 아홉 개의 복잡한 풀무 장치를 인형 아랫부분에 설치했는데 이것이 바람을 불어넣는 기능을 했다. 또 혀를 작동시키는 동력 전달 물림장치와 입술을 안팎으로 움직이게 하는 물림장치가 기계 내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기계가 전체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당시 볼테르(Voltaie)는 보캉송을 두고 “근대의 프로메테우스”라고 칭하였다. 이 자동인형은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사전』 첫째 권에 ‘안드로이드(android)’라는 표제로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여기서 안드로이드는 “적절하게 설치된 스프링 따위의 수단을 이용하여 겉으로 보아 사람과 비슷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동인형”으로 정의되었다.  보캉송은 이후 기계오리를 제작한다. 이 기계오리는 곡식을 집어먹고 곧바로 항문으로 배설하는 자동기계였다. 물론 배설용 곡물이 기계 내부에 따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이는 기계인형, 즉 오토마타(automata)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기계, 즉 오토마타는 당시 데카르트의 근대 기계론적 세계관과 유럽사회의 시계 제작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영역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성 중심적인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가차 없이 비판하면서 인간의 정신적 활동까지 기계적 작동으로 설명하는 유물론자 메트리(Julien O. de la Mettrie, 1709-1751)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저서 『인간기계론 L' Homme machine』(1748)에서 인간을 기계의 개념과 완전히 동일시하였다. 그는 인간은 자신을 규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하나의 기계’일 뿐이지만 태엽에 의해 작동되는 시계와는 달리 인간은 그 구조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복잡한 기계로서 통일적인 전체성을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즉, 뇌의 물질적인 기능이 수행되어야 정신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정신작용의 근원은 육체라는 물질에 있기에, 인간은 곧 기계 그 자체이며, 뇌의 작용도 육체의 물질적 기능이라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과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동인형에 매료되게 하였다. 바로 자동인형이 인간 생명체와 유사성을 띄고 있었고, 또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물리적으로 대상화시켜 분신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계적인 인간모형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내면에 잠들어 있던 자기창조의 욕망에 불씨를 지피면서 인간을 기계적으로 재구성했다. 기계, 혹은 기계인간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동인형은 ‘피와 살’의 미메시스로 인간들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진정으로 인간은 자신을 대체할 인간기계를 만들고 싶은가? 그렇게 만들어진 기계인형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2. 생명을 가진 기계

18세기 기계인형, 즉 오토마타의 발전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보캉송의 흥미있는 장난감을 보던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1741년 보캉송에게 직물제조 로봇을 만들 것을 권고한다. 이에 보캉송은 씨실과 날실을 짤 때 장력을 똑같이 유지할 수 있고, 사람이 두 손으로 잡아당겨 처리했던 예전방식보다 훨씬 더 많은 올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를 제작한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 있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한 게이비 우드(Gaby Wood)는 플루트 연주자가 “인간의 오락을 위해 고안”된 것인 반면, 보캉송이 리옹에서 만든 이 직조 기계는 “인간이 필요 없음을 인간에게 보여줄 의도”였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이 인간성을 상실한 로봇이 처음으로 제작되는 순간이다. 보캉송의 자동인형 이후 헝가리의 볼프강 폰 켐펠렌(Wolfgang von Kempelen, 1734–1804)은 1769년 체스 두는 자동인형을 제작하였다. 커다란 체스판이 놓여 있는 나무상자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목각상으로 인형의 오른팔은 손등이 위로 향하도록 한 채 체스판 옆에 놓여있었고 살짝 들어 올린 왼 손에는 가늘고 긴 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 생각하는 기계 앞에서 좀처럼 체스를 이기지 못했다. 수십년 후 이 인형의 비밀이 밝혀졌는데, 바로 체스 고수가 기계 속에서 인형을 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켐펠렌의 자동인형은 경외감 뿐만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 또한 불러일으켰다. 살아있는 생명체, 즉, 인간만의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영역이 침범당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의 중심에는 무엇이 인간의 특성이며, 어떤 것이 인간만의 특성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 스스로 기계가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 왜 인간은 기계가 되고자 하는가? 체스의 초고수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기계안으로 들어간 것인가? 바로 인간을 넘어서는 “생명을 가진 기계”를 창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을 닮은 완벽한 기계를 창조하면 신적 지위를 획득할 것 같은 환상이 이 인간들로 하여금 기계인형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영국의 작가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1818)은 바로 이러한 자동인형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피와 살>로 구성된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인간복제와 생명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소설의 후반부엔 프랑켄슈타인(과학자)과 괴물 모두 파멸하는 것으로 끝난다. 미친 과학자와 날뛰는 골렘(자동인형)의 모습 뒤에는 새롭고도 낡은 계명이 있다. 바로 “너 자신의 모습을 닮은 것을 창조하지 말라”이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이 멈출 수 없듯이 자동인형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대의 테크놀로지 사회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몸(테크놀로지)과 두뇌(컴퓨터)를 가진 기계인간들이 속속 태어나고 있다. 그들은 인간신체를 준거점으로 인간처럼 꿈꾸며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그 요구는 아마도 인간이 필요치 않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3.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 

인간신체를 준거점으로 하는 기계인간의 전략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물리적인 신체를 기계화 하는 것이다. 이는 오토마타, 기계인형에서 시작하여 사이보그(cyborg)의 개념과 연결된다. 둘째, 인간 신체를 벗어나 인간 정신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계인간의 개념은 사이보그를 넘어 가상신체로 확장된다. 인간의 몸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과, 인간의 정신을 기계적 가상신체로 대체하는 것 모두 인간을 기계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기계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이 존재한다. 이러한 기계신체, 가상신체에 대한 우려는 인류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학을 발전시키고 기계를 통해 인간의 신체를 물질화하고 가상적으로 통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기계들이 인간의 감각을 대체하고 인간의 역할을 기계들이 하나둘씩 차지하면서 기계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이 생명력을 가진 기계를 예찬하면서도 그 기계를 두려워한다.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란 질문은 기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기계를 통해 무엇을 실현하고 있으며, 기계에게 무엇을 구걸하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컴퓨터 가상현실과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들에 하루라도 접속하지 않으면 현대사회를 살아갈 수조차 없다. 기계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구걸한다. 다름아닌 인간의 호기심과 열정,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을 강렬하게 요구하고 있다.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라는 질문은 디지털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기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예술적 성찰을 요구하는 물음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물음의 중심에 바로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기계 테크놀로지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기계인간과의 아름다운 공존은 인간이 인간일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테크놀로지 사회의 기계미학: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는 인간이 기계를 예술로 끌어들임으로써 기계에게 어떠한 감각들을 요구, 혹은 구걸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이다. 특히, 예술의 메시지를 기계가 어떻게 이해하고 전달하고자 하는지가 중요하다. 그 메시지는 기계가 인간에게 전달하는 방식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기계를 통해 인간 스스로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럼으로 인간을 향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바로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의 전체적인 물음인 것이다.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는가?”는 세 가지 카테고리를 통해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기계 테크놀로지의 구걸은 자연현상의 모방이라는 관점, 둘째, 기계는 인간의 인식과 예술적 감각을 재현한다는 점. 셋째, 기계가 스스로 테크놀로지를 자기 복제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들을 통하여 기계 테크놀로지와 인간과의 관계, 특히 기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 예술적 미디어로써 기계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지점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예술을 통해 기계는 무엇을 구걸하고 있는가?” 사유의 물음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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