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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희 : 전시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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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지 희 개인전

 


 


전시기간   2012. 10. 12  – 2012. 11. 29
전시오픈   2011. 10. 12  fri  pm.6
전시장소   안국약품본사 1층 갤러리AG
초대작가   황지희
장      르   영상,설치
주      최   안국약품(주)

 


 

 

 

해부학자 혹은 전쟁기계
―황지희, ≪전시상황≫展, 2012

 

김만석(미술비평)

 

압도적 약세의 위치에서, 혹은 시체 옆이라는 위치에서 폭력을 감지할 때 그는 방어태세를 취한다. 그리고 방어태세를 계속 취하는 한, 감지된 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도미야마 이치로,

 

황지희가 주로 다루었던 대상은 시체나 사체였다. 차갑게 식거나 말을 잃어버리고 의미를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는 공허한 존재들, 이 침묵들에게 다른 방식의 생명을 부여하고자 그녀는 긴 시간을 할애했다. 죽은 것들을 되살리는 데에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은 종교적 방법이지만, 그녀가 신앙과 믿음에 기댄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시신을 되살리기 위해서 몇 만 볼트의 전류를 흘려보내 신경을 살리는 방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혹은 좀비를 만들어 주위를 공포에 떨게 하거나 다시는 죽지 않아 제멋대로 돌아다니도록 고안하거나 비밀스러운 주술을 갖추는 데에 주력하는 것일 수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죽어버린 것들 옆에서 혹은 앞에서 끈질기게 그 사체들을 매만지며 그것들을 되살리는 데에만 골몰했다. ‘죽은 자식 부랄 만지기’라는 속담이 그녀의 내밀한 작업을 방해했겠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의 더미에서 가능한 생명의 활력들을 검토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그녀는 이 세계, 그러니까 세계라는 시체 안치소에서 이 죽음들을 해부하고 그것들에 다시 활력을 부여하기 위해 우선 그녀는 기이한 직업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녀가 이미 활력을 상실해버린 대상을 되살리는 데에 필요했던 방법은 ‘해부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시체 안치소에서의 해부학자의 역할이란 그저 기왕의 신체의 구조와 조직을 성찰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녀가 굳이 시체 안치소에서 해부학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갖는 구조와 조직을 적확하거나 정치하게 묘사하는 데에 머무르고자 함이 아니었다. 사실 해부학이 의학만의 고유한 영역일 수 없고 미술의 진전에도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녀가 해부학자가 되었던 것은 우연일 수 없지만, 그녀가 굳이 시체 안치소에서 해부학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그녀의 해부학이 묘사에 초점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에 몰두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묘사냐 생성이냐는 해부학자를 판가름하는 아주 중요한 차이일 수 있는데, 묘사로써 해부학이 어떤 종의 이해를 확정하거나 결정하는 방식으로 그 생명의 가치에 일정한 한계를 부여한다면, 생성으로써 해부학은 그 종의 가능성을 폐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보다 열린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다른 종과의 연관에 주의를 집중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말할 것도 없이 의미를 상실해버리거나 상투적인 의미로 제한된 사물들을 찢고 자르고 깁고 봉합하는 해부학자가 된 그녀는 생성으로써 해부학을 작업의 방법으로 도입했다.

 

2004년 이후 그녀의 작업은 주어진 오브제를 조합하거나 문자-이미지로 탈구축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왔다. 그녀가 이 시기,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이후 2011년 첫 번째 개인전까지 작업의 주요한 오브제로 의자와 책상을 선택한 것은 그녀의 해부학적 방법이 도달하려는 영역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의자와 책상이 존재를 지탱하게 만드는 조건이거나 존재의 지평을 의미론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 오브제를 해체하거나 탈구축한다는 것은 조형의 이미지를 변형한다는 사실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일테면 의자가 어떤 존재를 지탱하게 만드는 조건이고 지평이라면 이것을 변형하거나 탈구축할 때, 현실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리나 상시적으로 지각하던 현실을 자명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된다. 의자의 다리를 해체하여 문자 이미지로 변형하거나, 의자의 부분들을 인간, 고양이, 새, 사슴, 양, 달팽이, 나비 따위와 잡종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의자의 각 부분들과 다른 생명체 각 부위들은 일정한 연관 속에서 의미론적으로 종합된다. 그 과정에서 의자가 갖는 고유한 오브제의 속성이나 다른 생명체의 고유함은 뒤섞이고 혼종하게 되는데, 그것은 더 이상 원래의 의자일 수 없거나 본래의 각각의 생명체일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탈구축을 감행함으로써 황지희는 어떤 존재나 사물이 갖는 개념에 새로운 의미체계를 도입하여, 죽은 개념에 활력을 부여한다. 자신 앞에 내던져져 있는 존재나 사물을 기왕의 인식론적 체계로 환원하지 않고 그 존재와 사물이 인접해 있는 다른 사물들과 결속시켜, 그 개념이 갖는 의미를 확장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녀의 작업에서는 말(개념 혹은 의미)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일대일 대응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령, 문자 ‘ㅈ’과 ‘ㅣ’를 창문과 커튼 그리고 스탠드 조명으로 간주하고 오브제인 의자를 문자인 ‘ㅂ’으로 이해하도록 배치한 <집>(라인테이프, 나무의자, 가변설치, 2007)과 같은 작업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실재하는 사물로써 집’과 ‘문자로써 집’을 결합시키는 일련의 해부학적 작업은 이 시기 이후로 활성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과 사물을 탈구축하는 방식을 통해서 그 사물이나 말이 갖는 고유성을 해부하는 과정이 기왕에 존재하는 의미론적 체계로 다시 수렴될 뿐이라면, 그 작업은 기존의 시스템을 오히려 긍정하는 효과 너머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개념과 의미 그리고 사물의 식상한 이해로부터 이탈하여 도달하는 세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계나 의미체계 내부로 다시 수렴된다면, 그러한 해부학적 방법은 동어반복에 불과한 일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이 작업 이후 황지희는 영문 알파벳 대문자를 한글 문자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방식을 시도하기도 한다. 즉 개념 그 자체를 이루는 문자 체계들을 비트는 방식을 취해 보기도 하지만, 해부학적 방법이 기존의 개념이나 의미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쉽사리 이끌리고 만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그녀는 말을 사물 그 자체로 다루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달리 말해, 그녀는 해부학을 방법적으로 활용하긴 하되, 그러한 탈구축이 특정한 의미론적 맥락 안으로 함몰되지 않는 방식을 선택한다. <애를 쓰다>(pencil, 4m이내 벽면설치, 2010)는 ‘애를 쓰다’라는 문장/문자를 실제로 반복적으로 ‘애를 써서 쓰면서’ 그 말이 갖는 의미를 실제로 수행하여 그 의미를 실감하도록 구성한다. ‘애를 쓰다’라는 말이나 문장이 갖는 실질적인 의미를 추상화하지 않고 시각적이고 물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 말/문장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구성했다는 것이다. 곧 ‘애를 쓰다’라는 말과 문장을 하나의 사물로 구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성공의 가계도>(시트지, 벽면설치, 2011)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상투적인 말을 ‘가계도’를 통해서 ‘성공’을 존재론적인 질문의 대상으로 만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말(개념, 의미)을 존재론적으로 구성하면서, 말이 갖는 한정적인 의미들을 조형적 질서를 통해서 비판하고 의미 형성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의미와 개념 그리고 문자 자체로부터 이탈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The Color>(MDF에 아크릴릭, 시트지, 벽면설치, 2011)이라는 작업에서 흑인을 흰색으로 칠하고 백인을 검정색으로 칠한 후에 각각의 단어 옆에 ‘흑인은 하얗다’라는 문장을 파란색으로, ‘백인은 까맣다’라는 문장을 빨간색으로 배치한다. 그리고 그 문장들 옆으로 ‘흑인은 하얗다는 파랗다’, ‘백인은 까맣다는 빨갛다’는 문장을 노란색으로 붙인다. 즉, 이 작업은 말이 갖는 ‘의미’가 현실적 조건과 결부되었을 때, 그것이 갖는 의미가 매우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확정적이거나 불변적인 의미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이는 말이 사물과는 관계없이 문자의 차이를 통해서 의미가 형성된다는 구조주의적 이념을 반성하는 기획이면서 말을 낱낱의 개별적 사물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조건을 통해서 숙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신문을 구토하다>(씹은 신문지, 5분 12초 영상, 가변설치, 2011)는 신문지를 씹는 작업의 과정을 촬영하고 그것의 결과물을 함께 배치하여 전시한 것인데, 이는 기왕의 의미생산의 과정이나 방식이 말과 사물을 해부하는 데에만 머물 수 없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실현되는 전시라는 조건으로 옮아가야 한다는 것을 명시해주는 작업이다. 이 작업에서 그녀는 의미가 항상 이미 선험적으로 ‘있다’는 전제를 과감하게 벗어나게 된다. 의미가 생산되는 것이라면, 의미가 생산되기 위해서는, 아니 의미가 기존의 의미로 다시 구조화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 조건 즉 ‘거푸집’을 해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전시’가 구성되는 방식이나 작가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원리 그리고 그것을 관람하는 관객들이 의미를 구성하는 거푸집이므로 그녀는 이들을 작업으로 불러 모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녀의 작업은 ‘전시’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갈등적인 역학을 적극적으로 구성해내는 일이 중요해진다. 달리 말해, 죽은 것들 옆에서 서 있으면서 그것들을 되살리는 데에 주력하기보다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 의미 바깥의 영역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는 그녀가 재생하고자 했던 의미들이 외부적 힘들에 무기력하게 함몰될 때마다 감각하거나 예감했을 문제였을 수 있다. 달리 말해, 해부학자로서 그녀의 작업은 항상 어떤 외부적 힘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으며 그 힘들과 경합을 벌여야만 하기 때문에, 의미는 의지적으로 생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부적 힘들과 싸울 때에만 생산될 수 있다. 이는 의미의 근본적인 조건이 내재적인 것일 수 없고 외부적 힘에 의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이고 외부적 힘들은, 마치 폭력처럼 작동 중이라는 사실을 함의한다. 일테면 전시를 통해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주제의식들은 작가로부터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시를 둘러싸고 있는 힘들의 갈등적인 접속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가 이루어기 위해 작동하는 힘들이란 작가, 큐레이터, 전시 공간, 설치되거나 배치된 텍스트, 비평가, 관객들로부터 시작해서 갖은 세세한 항목들 일체들에 해당된다. 그것들의 복잡하고 복합적인 충돌이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 따라서 해부학적 방법으로부터 출발한 그녀의 작업은 그 충돌들 자체를 포착하는 것으로 옮아간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이번 작업은 전시를 둘러싼 미지의 힘들, 혹은 미래적인 힘들인 ‘전쟁기계’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두 번째 개인전 제목이 ‘전시상황’으로 되어 있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전시는 단순히 전람회를 지시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서로 다른 힘들의 충돌이 일어나는 시간이며 공간이라는 뜻이고 ‘상황’이란 그 힘들이 일관되게 같은 에너지로 충돌하는 게 아니라 매번 다르게 갈등하는 불균질적인 사건에 해당한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이라는 층위를 힘들로 다룸으로써 전시를 그야말로 전장으로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녀의 작업이 오래전부터 시체나 사체를 다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행로라고 할 수 있다. 죽은 것에 둘러싸여 그것들이 죽은 채로 내동댕이쳐질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시스템이라면, 내동댕이쳐진 존재와 사물들 앞에서 여전히 엄습할 억압적 힘들이나 폭력들을 예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 혹은 사물은 매번 죽음을 거듭하면서 존재와 사물을 특정한 형태로 고정화하는 힘들로부터 ‘방어태세’를 취해야만 한다. 이 압도적인 약자의 위치에서 생명의 가능성을 심문하기 위해서 해부학적 방법은 필수적이었을 터.

 

전시가 상식적이거나 상투적인 미술적 실천과 몸싸움을 벌이는 것이라면, 항상 이미 전시는 전쟁기계이겠지만, 실상 외부적 힘들을 적극적으로 차단해온 것이 사실이다. 텍스트나 그 주제 혹은 의미를 구성하는 바깥의 힘들을 ‘예감’하는 방식을 흔히 ‘인터액티브’라고 부르지만, 인터액티브 아트들이 외부를 내부화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안과 바깥의 경계를 (일반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내부화하여 지워버리는 것을 보라. 그러니까 ‘인터액티브’ 작업들이 외부를 동일자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외부의 힘을 무력하게 재조정해버리거나 기술적인 프로그래밍으로 순치시켜버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지 않던가. 황지희는 외부의 힘들에 절대적으로 취약한 상황 아래에서 작업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터액티브의 역설로부터 비켜 서 있다. ‘작가―작품―(전시장, 큐레이터)―관객’이라는 수평적인 것처럼 구성되어 있는 위계적 도식(사실 저 도식은 각각의 항목에 따라 종종 수직적으로 강제되기 일쑤다.)을 수평적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항목들을 갈등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과 전리품>, <작가와 능력자>, <진품과 가품>, <타겟되기>와 같은 작업은 작가와 작품, 관객들을 문제적인 것으로 전개하는 것이며 그것들이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의미 생산에 주목하고자 하는 작업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각각의 작업들은 미술을 구성하는 제도 전체의 문맥들 그리고 미술을 가능하게 하는 현존하는 시스템의 문제들이 충돌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사실 일상이 평온한 삶의 반복적인 형식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관점에 비추어볼 때, 그 작업 자체로 완결된 형식이 가능할 리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과정’이라는 ‘부재’를 조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체로 완결된 구조, 달리 말해, 이미 죽어버린 시신들과 그것을 죽게 만든 힘들을 몰아내는 일이 훨씬 중요해진다는 것. 미술적 실천이 삶/생명의 가능성을 톺아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과정에 개입할 때일 것이다. 하여, 자본주의적 체계 내부로 미술이 함몰되어가는 사태에서 미술을 이루는 조건들과 몸싸움을 조용히 벌이고자 하는 그녀의 기획은 섬세하게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신문지부터 씹어 볼까.

 

 

 





 

 

작가 프로필

전시상황전 -Exhibition & War-

황지희 Hwang, Jihee

2009 동대학원 입체조형 전공 졸업
2005 경성대학교 미술학과(조형) 졸업


개인전
2011. 4   나>너 나는 너보다 무겁다. 대안공간 반디, 부산
2009. 6   독한이미지전. 경성대학교 제2미술관, 부산

 

단체전
2012 소통을 말하다. 롯데백화점갤러리,일산
2011 국가와 민족의 안팎. 갤러리 화인,부산
2011 Ongoing. 오픈스페이스 배,부산
2011 충칭 아시아 청년 비엔날레. 충칭 미술관, 충칭
2011 21세기 풍경:Emptiness. 성곡 미술관, 서울
2010 The Dream Space. 부산 시립 금련산갤러리, 부산
2010 24도씨에 반응하기. 소울아트스페이스, 부산
2010 텍스트의 반격. 대안공간반디, 부산
2009 Pink Busan. 채스아트센터, 부산
2009 Pumping Heart. MK2 ART SPACE, 베이징
2009 대룡마을 국제아트페스티벌 오솔길 프로젝트. 대룡마을, 부산
2008 국제영상행위설치 페스티벌 Light & Site & Text. 부산 시민회관, 부산
2008 프랑스 파리 작가 연계 오픈스튜디오전. 도로시갤러리, 파리 
2008 쌍쌍파티. 해양자연사박물관,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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