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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섭, 르네상스로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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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꿈꾼 르네상스 다방의 화가들


이주헌(서울미술관 관장)


1.

우리는 늘 재생을 꿈꾼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를 빈다. 모든 희망의 궁극은 재생 혹은 부활이다. 모진 겨울이 지나면 봄이 돌아온다. 봄에 대한 희망이 있어 우리는 겨울을 견딘다. 시대가 험하고 힘겨울수록 우리는 예전의 좋았던 날들을 그리워하며 그 시절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다. 비록 지금은 고난에 싸여 있어도 행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화가들도 그런 믿음으로 인고의 세월을 견뎠다. 언젠가 창작의 열정을 마음껏 펼칠 날이 오리라, 나의 르네상스, 우리 미술의 르네상스가 반드시 도래하리라, 그런 희망으로 그들은 간난의 세월을 꿋꿋이 견뎌냈다. 오늘날 우리 미술은 전례 없이 왕성한 창작의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선배들의 그 같은 소망과 열정, 헌신이 있었기에 이렇듯 우리 미술에 르네상스의 꽃이 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전시는 그렇게 거름이 되고 뿌리가 된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고통 속에 펼친 그들의 숭고한 투쟁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그 대상을 아우르자면 아주 많은 숫자의 작가들이 조명되어야 하겠으나, 이 전시는 이중섭을 비롯해 한묵, 이봉상, 박고석, 손응성, 정규 여섯 명의 미술가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들은 모두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전시를 가졌던 작가들이다.* 특별히 앞의 다섯 작가는 1952년 기조전이라는 이름으로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함께 그룹전을 가졌다. 이번 서울미술관 전시에 ‘둥섭, 르네상스로 가세! - 이중섭과 르네상스 다방의 화가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특정 작가들만을 조망하게 된 계기다.**

기조전이 열린 게 지금으로부터 딱 60년 전의 일이니, 올해가 글자 그대로 회갑이 되는 해다. 태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왔음을 뜻하는 회갑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난다는 르네상스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떠올려 볼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계기를 토대로 우리 미술의 르네상스를 염원했던 이들 근대 미술가들의 열정을 되새김질해 보는 것이 이 전시의 목적이다. 과거를 면밀히 돌아보아 풍부한 자산으로 삼고 우리 미술의 새롭고 진취적인 전망을 제시하고자 하는 서울미술관의 의지는 그렇게 이 전시에 그 첫 번째 땀방울로 오롯이 담기게 되었다.


* 기조전 참여 작가는 이중섭, 이봉상, 한묵, 박고석, 손응성 5명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기록에 따라서는 정규를 포함해 6인으로 전해져 오는 경우도 있다. 박고석이 쓴 ‘인간 한묵’이라는 글을 보면, 정규도 기조전의 출품작가로 나온다. 이처럼 기록이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 전시 환경이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웠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조전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정규는 1953년 5월 7~15일 르네상스 다방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소품전을 가졌다. 이때 <반월백(半月白)> 등 15점을 출품했다.

** ‘둥섭’은 ‘중섭’의 서북 방언으로, 한묵 같은 친구들이 곧잘 그를 그렇게 불렀고, 이중섭도 작품에 ‘둥섭’이라는 사인을 하곤 했다.


2.

한국전쟁 당시 우리 미술가들의 창작 환경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제대로 된 창작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 생활공간과 작업공간이 뒤섞인 상황에서 최대한 융통성을 발휘하여 작품을 제작했다. 물자가 부족해 재료의 공급 또한 원활하지 않았다. 밀수를 통해 일본에서 들여온 물감은 매우 비쌌다. 당시 굶주리다 못해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이 그만의 독창적인 성취로 평가되는 은지화를 제작한 것은 그런 악조건이 야기한 역설이었다. 밥 한 끼 제대로 먹기 힘든 상황에서도 화가들은 이렇듯 좌절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이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보관과 수장이 용이하지 않아 안타깝게도 많이 망실되었다. 이에 더해 해방공간에서부터 생긴 좌우 대립의 균열이 전쟁 시기 작가들의 월북, 납북, 월남, 실종 등으로 이어져 우리 미술계는 그야말로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끈을 놓지 않고 악전고투한 이들 미술가들 덕분에 한반도 남쪽에서 우리의 근대 미술은 나름대로 그 토대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안정과 도약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파란만장한 시기에 르네상스(당시의 간판 표기는 루네쌍스) 다방을 비롯한 부산의 다방들이 갤러리 역할을 해 줌으로써 피난지의 미술가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김종영 미술관의 학예실장인 최열 선생이 이에 대해 상세한 글을 썼으므로 이와 관련한 내용은 그 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지금껏 다방이 우리 미술과 관계를 맺고 우리 미술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미술계 안에서도 그다지 관심을 둔 적이 없는데, 이 전시는 그런 부분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완하고자 했다. 도록에 실린 최열 선생의 글과 함께 자료전과 옛 다방의 재현 설치를 통해 다방과 우리 미술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했다.

다방의 재현 설치라고 했지만, 실제 다방을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다. 1950~60년대 다방 사진 등 여러 자료를 토대로 그 시절 다방의 분위기를 유사하게 재현하고 다방에서 전시가 어떤 양태로 벌어졌을지 단편적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그러므로 사실 재현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오브제 설치로 보아주면 좋을 것 같다. 오늘날 다방은 우리 사회에서 급속히 사라져 거의 천연기념물처럼 되어버렸다. 한때 티켓다방이니 ‘주다야싸’(주간 다방, 야간 살롱)니 하는 퇴폐영업소 혹은 술집 형 다방으로 변질되어 성업을 하는 곳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마저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런 사라짐과 굴곡의 역사로 인해 차를 마시며 음악과 미술, 문학을 즐기던 문화공간으로서의 다방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었는데, 이번 전시는 특히 젊은 세대에게 그 본래적인 이미지를 재발견하도록 도우려는 측면이 있다. 


3.

기조전은 1952년 12월 22일부터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일주일간 열렸다. 기록에 따르면 이중섭이 2점, 이봉상이 6점, 한묵이 6점, 박고석이 5점을 출품했다. 손응성은 <추제(秋題)>라는 작품을 출품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중섭에게는 이 전시가 첫 그룹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기조전에 출품했느냐는 지인의 질문에 그는  “그저 냈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무심한 듯 달관한 듯 세상을 바라보는 그 특유의 시선이 묻어나는 답변이다. 그러나 기조전의 서문을 보면 당시 동인들이 불안정한 시대상황을 의식하고 예술가로서 나름의 결연한 의지와 각오를 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회화 행동에의 길이 지극히 준엄한 것이며 무한히 요원한 길이라는 것을 잘 안다. 만일 아직도 우리들의 생존이 조금이라도 의의가 있다 친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일에 대한 자각성이어야 할 것이다. 진지하고도 유효한 훈련과 동시에 우리들은 먼저 한 장이라도 더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유의하고 싶다.”


전시회의 반응은 좋았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주었고 그림도 꽤 팔렸다.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당시 실업가로 활동하던 김광균이 작품을 몇 점 샀고 작가들을 술집으로 초대해 한턱 쏘았다. 당시 미술에 심취해 있던 김광균의 회사가 광복동에 있었는데, 화가들은 이따금 그곳에 들러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박고석의 부인 김순자 여사의 회상에 따르면,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냈고 훗날 한국일보를 창간하게 되는 장기영이 이 전시에서 박고석의 그림 한 점을 샀다.

손응성의 작품에도 판매 딱지가 붙었는데, 이중섭이 그걸 보며 “네 그림도 팔렸다”고 함께 기뻐해주었다고 한다. 전시회를 마친 뒤 이중섭이 손응성의 작품을 딱지 붙인 사람에게 직접 날라주고 그림 값을 받아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이중섭이 자기 그림 팔린 것에서 술값을 남기고 건네준 것이었다. 손응성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던 것이다. 뒤에 그 그림을 산 사람이 그림 값을 또 손응성에게 주어 결국 손응성은 그림 값을 두 번 받은 셈이 되었다. 당시 이들 사이의 우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일화다.

동료 화가들도 기조전에 관심이 많았다. 도상봉은 거의 매일 르네상스 다방에 와서 그림을 보았다. 그가 이중섭의 그림에 특히 관심을 보이며 “중섭 씨, 그림이 아주 좋습니다” 하면, 이중섭은 “죄송합니다, 이다음에 잘 그려서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집불통의 확신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됨이 좋아 한없이 겸손했던 이중섭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당시 기조전 동인 말고 르네상스 다방에서 동인전을 가졌던 또 다른 그룹으로는 토벽 동인이 잘 알려져 있다. 피난 내려온 작가들이 아니라, 서성찬, 김영교, 김종식, 김윤민, 김경, 임호 등 부산 토박이 작가들이 참여했는데, 이들 역시 어려운 시국을 예술을 향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극복하려 했다.

“제작은 우리들에게 부과된 지상의 명령이다. 붓이 분질러지면 손가락으로 문대기도 하며, 판자조각을 주워서는 화포를 대용해 가면서도 우리들은 제작의 의의를 느낀다. 그것은 회화라는 것이 한 개 손끝으로 나타난 기교의 장난이 아니요, 엄숙하고도 진지한 행동의 반영이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예술이라는 것이 부박한 유행성을 띤 것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닐진대, 그것은 필경 새로운 자기인식밖에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 가난하고 초라한 채 우리들의 작품을 대중 앞에 감히 펴 놓는 소이는 전혀 여기에 있다.”(‘토벽 동인전’ 서문)

이런 시대적 풍경을 보노라면 우리의 근대 미술가들이 문화예술의 빙하기를 맞아 얼마나 처절한 투쟁을 벌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르네상스의 도래를 간절히 꿈꾸었는지 선명히 알 수 있다. 그런 만큼 그들이 이 시대에 만든 작품을 되돌아보는 것은 그 소중한 사명의식과 열정을 깊이 음미하고 되새겨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나머지 글 읽기 : http://www.daljin.com/column/9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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