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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제니 킴 / 회화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김성호


회화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김성호(Sung-Ho KIM, 미술평론가) 
 
작가 제니 킴(Jenny KIM)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회화하기가 무엇인지를 지속해서 되묻는다. 수많은 예술가, 이론가들이 규명해 왔던 회화에 대한 정의가 김현주의 작업에서 날것으로 되살아오는 까닭은 그녀가 회화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심층적인 질문을 내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의 존재론? 그것은 인간 욕망의 부산물인 예술 작품이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니 킴은 자신(만)의 회화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 질문은 무엇이며, 그녀가 찾아 나선 대답은 어떠한 것들인가? 제니 킴의 작업 전반에 나타난 작품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분석과 해설을 시도하는 이 글을 통해 함께 살펴보자. 
 



I. 감춤을 통한 드러내기 & 지움을 통한 그리기 - Fade Ou 연작  
근대미학자 수리오(Etienne Souriau)는 는 회화의 가장 핵심 요소를 ‘색’으로 간주하고, 20세기 중반의 주요한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회화 고유의 매체적 특징을 ‘평면성’으로 간주하면서 회화의 위상을 규정하려고 했다. 우리는 안다. 회화에 대한 양자의 보편적 정의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면서도 그것으로만 오늘날 회화를 포착하는데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날 회화는 보편적인 정의에 머물지 않고 예술가 개인의 인식 속에서 저마다 다르게 규정되고 체득된다. 예술 종말 이후의 다원주의 미술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수많은 예술가가 회화에 천착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작가 제니 킴은 〈Achaeological imge〉(2005) 연작에서, 중간 색조의 퇴락한 듯한 화면 위에 거친 붓질이 모호한 이미지 덩어리로 뭉쳐있거나 흐릿하게 풀려 있는 등 표현과 재현이 오가는 회화 탐구를 통해서 회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바 있다. 그것은 물감의 덧칠, 스크래치 등을 통해서 표현의 조형 언어를 연구하는 것이거나 흐릿한 매듭이 풀리는 재현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이었으나, 본질적으로 표현과 재현 사이의 회화 본질에 대한 탐구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제니 킴은 이후에도 〈Origin〉(2006) 연작에서 표현주의 추상 화면 안에 최소한의 기호나 재현의 언어가 살포시 얹어지는 화면을 구사하는 방식을 통해 회화 본질에 대한 질문을 지속해 왔다. 
제니 킴은 2007년부터 본격화한 〈Fade out〉 연작을 통해서 표현과 재현이 한 덩어리가 되는 다양한 조형 언어를 실험한다. 예를 들어 표현주의 붓질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닌 화면 안에 알파벳과 같은 기호, 특정하기 어려운 도상적 상징을 선묘로 올려놓거나 애플과 같은 특정 브랜드의 로고나 마릴린 먼로와 같은 아이콘과 재현의 언어를 탐구하거나 술병, 향수병, 컵, 전구, 운동화, 하이힐과 같은 일상 사물의 팝아트적 재현 이미지를 멀티플의 형식으로 반복, 집적하면서 표현과 재현의 만남을 실험해 왔다. 
이 당시 작업의 형식적 특징은 단지 표현과 재현의 언어뿐 아니라, 잡지, 신문 등의 콜라주나 그것을 뜯어내고, 긁어낸 데콜라주가 교차하거나, 이미지와 텍스트가 맞물리고, 물감의 두꺼운 마티에르와 모노톤의 평면적 배경이 대비되는 등 이질적인 조형 언어가 대립, 병치하는 방식의 화면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특히 화면 안에 불러온 평범하기 그지없는 팝아트적 소재인 일상 사물을 다양한 조형 언어로 해체, 재조합하는 방식을 통해서 변화무쌍한 이미지로 전환해 내는 그녀의 격정적 조형 언어는 파토스(Pathos)의 면모를 강력하게 드러낸다. 
유심히 살펴볼 것은, 2007년부터 시작된 이 〈Fade out〉 연작이 2012년부터는 조금 더 다른 차원의 관심으로 이동해 갔다는 사실이다. 이전의 콜라주와 데콜라주의 조형 언어가 여러 겹의 물감층으로 전환되거나 표현과 재현의 교차가 흰색의 모노톤으로 전환되는 방식으로 확연히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캔버스 옆면으로 흘러내린 색색의 물감층은 작업 당시의 파토스적 격정을 살펴볼 수 있는 ‘드러내기(develop)’의 언어를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표현주의 붓질을 최종적으로 뒤덮은 캔버스 앞면의 흰색 모노톤은 ‘감추기(envelop)’의 언어를 시도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러한 드러내기와 감추기의 조형 언어는 이후 작업인 〈Bowl(Fade out-Bowl)〉(2013~2016) 연작, 〈Dot(Fade out-Dot)〉(2014~2016) 연작에서도 잘 드러난다. 색색의 물감층으로 덮인 캔버스 표면을 그릇이나 항아리 혹은 커다란 점의 실루엣만 남긴 채 옆면을 미디엄 섞인 백색의 물감으로 뒤덮은 이 연작들은 결과적으로 물감을 뒤덮는 ‘감추기’의 방식을 통해 ‘감춘 뒤 남은 이미지’ 즉 그릇, 항아리와 같은 이미지가 표면 위에 떠오르게 되는 ‘드러내기’를 실현한다. 즉 지우기(감추기)를 통해 그리기(드러내기)를 실현한 셈이라 하겠다. 
 




II. 비가시성의 가시화 – Spread Out 연작  
작가 제니 킴은 2016년부터 〈Spread out〉 연작을 시작했다. 이 연작은 이전까지의 모든 작품, 특히 〈Fade out〉(2007~2021) 연작에서 탐구했던 일련의 조형 실험을 계승하고 확장한 것이자, 〈Fade out〉 연작 후반부에 등장했던 새로운 실험을 최근에 본격화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미 작업했던 작품의 캔버스 천을 뜯어내 캔버스 옆면뿐만 아니라 뒷면까지 다시 작품화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조형 탐구는 ‘비가시성의 가시화’로 해석할 만하다.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전개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가?  
 〈Spread out〉 연작은 〈Achaeological imge〉 연작에서 시도했던 재현과 표현의 관계를 필두로 〈Origin〉 연작에서의 재현과 기호, 〈Fade out〉 연작에서의 재현/표현, 콜라주/데콜라주, 이미지/텍스트 그리고 ‘저부조의 마티에르와 질료성/모노크롬의 평면성’이 병존하는 화면을 많은 부분 계승하면서도 〈Bowl〉, 〈Dot〉 연작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던 ‘지움(감추기)’을 통해 ‘그림(드러내기)’이라는 조형 언어를 극대화한다. 
특히 2012년 당시 〈Fade out〉 연작이 선보인 ‘드러내기’의 언어는 캔버스 옆면으로 흘러내린 색색의 진득한 물감과 더불어 여러 차례의 작업 중에 캔버스의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 이젤 바닥에 엉겨 붙은 채 굳은 물감 찌꺼기 혹은 물감 덩어리를 떼어내 역발상으로 캔버스 윗면에 붙여 만든 부조적인 작품에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생각해 보자. 캔버스 밖으로 밀려나 버려져 있던 물감 찌꺼기나 덩어리는 애초에 ‘완성 작품’에서 이탈한 무엇이거나 배제된 것 혹은 잔여(殘餘)와 잉여(剩餘)의 존재였으나, 제니 킴에 의해 비로소 작품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 밖으로 추락했던 잉여물은 그녀의 작품 속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작품으로 보이게 되는 역능(力能)의 존재로 귀환한다. 
〈Fade out〉 연작에서의 위와 같은 조형 특징을 확장하는 〈Spread out〉 연작은 이전 작업에서 이미 선보였던 색색의 자유로운 표현주의 붓질을 최종적으로 흰색에 가까운 모노크롬 물감층으로 뒤덮으면서도 캔버스 옆면에 무수한 물감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김으로써 ‘지움을 통한 그리기’를 실현하거나, 캔버스 틀로부터 뜯어낸 캔버스 천의 옆면과 뒷면을 새로운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전유(專有, appropriation)의 방식을 통해 ‘비가시성의 가시화’를 실현한다. 
무엇의 전유이자 가시화인가? 간단히 종합하면 〈Fade out〉 연작이 “(화면이) 점점 희미해지듯 사라지다”라는 사전적 정의처럼 감추기, 지우기가 작업의 주요 조형 언어로 대별된다면, 〈Spread out〉 연작은 “퍼져 나가다”라고 하는 사전적 정의처럼 소멸성의 것 혹은 잠재적인 것들을 되살려 회화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즉 ‘지우기’의 결과가 잉태하는 ‘그리기’를 강조하거나, 캔버스 뒷면에 관한 관심을 통해 비가시성에서 ‘가시성을’ 견인하는 방식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작품을 보자. 〈Spread out〉 연작에서, ‘지움을 통한 그리기’를 극대화하는 방식은 캔버스 표면 위에 올린 모노크롬 물감의 질료적 특성을 저부조처럼 올려놓음으로써 강조된다. 캔버스 위에서 분출되었던 표현주의적 스트로크가 단색 물감으로 일순간에 감춰지고 지워지게 되는 ‘소멸의 사건’ 혹은 ‘상실의 순간’은 이전의 존재를 잠재태(潛在態, virtualité)의 것으로 묶어두면서 ‘사건 이전과 이후’의 존재를 가른다. 그것은 피상적으로 ‘사건으로 인한 부재’를 확고히 하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두꺼운 단색 물감층 아래 분명히 존재하는 실재(réalité)이기에 표피 아래 실존하는 ‘잠재적 실재(réalité virtuelle)’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표피 아래 달리 말해 겉으로는 이미 사라진 것들이지만, 속으로는 사라지지 못하는 것들인 셈이다. 
〈Spread out〉 연작에서, 캔버스 틀로부터 뜯어낸 캔버스 천을 뒷면까지 펴서 새로운 작품으로 전유한 작업은 또한 어떠한가? 그것은 캔버스 틀 뒤로 접어놓았던 뒷면의 천을 옆면이나 앞면으로 펼쳐놓는 전환이자, 천을 고정하기 위해 존재했던 캔버스 뒷면의 타커(tacker) 흔적까지 앞면으로 끌어오는 전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환과 전유는 뒷면과 앞면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숨겨져 있던 캔버스 뒷면을 앞면으로 가시화하는 무엇이자, 보이지 않는 잉여의 뒷공간으로 버려졌던 것들의 전면적 귀환이기도 하다. 즉 잠재태를 현실화(actualisation)하는 조형 전략의 가시적 실현이다. 






III. 에필로그 
작가 제니 킴은 회화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회화란 그리는 것인가, 아니면 지우는 것인가? 회화 제스처가 남긴 필연 뒤 남는 우연도 회화의 부분인가? 회화의 잔여물이 회화로 전환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존재는 무엇인가? 회화는 매체적 특성에 대한 규정인가 아니면 인간 삶에 대한 은유인가?  
작가 제니 킴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있어 조급해하지 않는다. 그저 답이 없는 질문을 지속해서 내던지면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녀는 미디엄과 섞은 아크릴 물감으로 캔버스 혹은 패널 위에 질퍽한 질료의 세계를 펼치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 회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오히려 덮기, 감추기, 지우기와 같은 네거티브의 회화 조형을 감행하기도 하고, 역으로 보이지 않는 뒷면을 옆면, 혹은 앞면으로 끌고 와 비로소 보이는 회화의 필연적 위상을 탐구하기도 한다. 캔버스의 모양과 크기가 변하는 쉐이프트 캔버스, 그 뒤로 이어진 캔버스 옆면의 무한한 변주도 회화 본질에 대한 질문과 그 답 찾기의 일환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 그녀의 회화는 답을 찾는 일을 지속해서 미루어 두면서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행위인지도 모를 일이다. 
제니 킴이 이전까지의 연작을 어떠한 방식으로 확장, 전개해 나갈지 명확히 예측하는 일이란 쉽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의 작업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추정해 볼 때, 회화의 본질을 모색하는 조형 실험을 더욱더 근원적인 지평에서 심층 탐구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아울러 회화의 존재론적 질문을 작가 자신을 투영한 기억 소환과 더불어 인간 존재에 대한 은유로 반추해 갈 것이라는 기대도 가능케 한다. 그녀의 대표적인 작업인 〈Fade Out〉 연작과 〈Spread Out〉 연작을 잇는 변화의 양상이 어떠할지 또는 이러한 연작 이후의 새로운 연작의 등장이 가능하다면 무엇일지 우리가 기대하는 까닭이다. (20231005)

출전 / 
김성호, 「회화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제니 킴(Jenny KIM)』, 전시 카탈로그, 2023. 
(제니 킴 개인전, 2023. 05. 02 ~ 2023. 05. 19, DGB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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