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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이철희 전 /반(半)투명성을 지향하는 소통의 파이프 조각

김성호

(半)투명성을 지향하는 소통의 파이프 조각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작가 이철희는 이번 전시에 파이프를 모듈로 삼아 조각의 몸체로 삼은 최근작들을 선보인다. 이 글에서는, 패턴과 변주, 빛의 투과와 반투과, 존재와 부재의 미학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이번 전시가 이전의 작업들과 어떠한 영향 관계 속에서 전개되어 왔으며, 어떠한 미학적 개념을 주목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I. 공() - 원과 구멍으로부터
이철희의 작업이 2009년경부터 크게 변모한 지점에는 공(空)의 세계가 자리한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유명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무수히 많은 구멍을 뚫은 철판 위에 같은 인물을 겹쳐 그려 이미지의 레이어를 만든 회화인데, 분명코 변화의 시작이었다.
‘공’이란 그의 작업에서 ‘구멍’이 함유하는 ‘비어 있음’의 공간 개념뿐 아니라 존재의 문제의식을 재고한다. 자세히 보면, 이철희의 회화에서 창작의 결과는 분명코 레이어가 쌓인 2차원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창작 과정 속에서 3차원 영역으로의 확장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타공 기법으로 무수한 구멍을 만든 철판을 캔버스 위에 3-5cm 간격으로 이중, 삼중으로 레이어를 만들어 올린 그의 회화는 ‘있음’과 ‘없음’의 세계를 오가면서 우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회화 배면의 세계로 깊이 침투하기 때문이다. 마치 폰타나(Lucio Fontana)의 시리즈 작품인 〈공간적 개념, 기대(Concetto Spaziale, Attese)〉처럼 이철희의 회화는 배면으로 잠입하는 회화의 새로운 공간의 차원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보라! 납작한 철판의 평면 위에 ‘구멍’의 형태로 비워진 무수한 ‘작은 원’들은 ‘없음’의 세계이지만, 그 밑의 캔버스의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이내 ‘있음’의 세계가 된다. ‘있음과 없음의 중첩’, ‘없음으로부터 있음으로의 전환’, 이와 같은 회화 전략은 납작한 2차원 세계를 전면이 아닌 배면으로 침투시키면서 질료 내부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II. 허() - 승자의 페르소나
흥미롭게도 그의 일명 ‘타공 회화’에 드러난 인물들은 모두 유명 인사들이다. ‘승자의 얼굴’로 번역되는 작품 제명 〈Winner’s face〉를 그는 ‘성공한 사람의 얼굴’로 의역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시대의 천재 화가 피카소, 아이폰으로 손 안에 세계를 담은 애플 사(社)의 CEO 스티브 잡스, 삼성의 CEO 이건희 등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성공을 거둔 유명 인사들은 보이지 않는 적들과의 싸움(혹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들이다. 마를린 먼로, 오드리 햅번, 엘비스 프레슬리, 신중현, 싸이 같은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 스타들은 또한 어떠한가? 이들 역시 대중에게 성공한 이들로 각인되어 왔다. 1997년부터 미술을 시작한 이래 언제나 자신의 작업이 ‘세계적’이 되길 소망해 온 작가 이철희의 입장에서 이들은 롤모델이 되기에 족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맞닥뜨린 ‘치열한 싸움들’에서 승리한 성공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 이철희가 자신의 소망을 투영하는 승리의 롤모델로 그리고 있는 인물들은 실상 신화화된 허상(虛像)이다. 그는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승자들의 표피적 이미지를 여러 층을 통해 표현하면서, 그들의 실체는 실상 신비의 색채로 덧입혀진 공(空)의 세계일 따름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증거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 인사의 초상이란 실상 그들의 실체를 가리는 가면(假面), 즉 페르소나(persona)일 뿐임을 말이다. 
이러한 이철희의 세계관은 〈Winner’s face〉라는 같은 제명을 가진 조각 작업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이 조각들은 회화와 달리 모두 익명의 얼굴들이다. 따라서 작가 이철희가 흠모하는 승자의 초상이란 실상 개별적 특수자의 정체성에 있다기보다는 보편적 승자의 정체성과 관계한다. 그에게 있어 정치인과 대중스타는 따로 구별될 인물들이 아니며, 모두 동일한 승자들인 것이다. 회화에서 표현된 ‘승리자들의 개별적 정체성들’은 그의 조각에서는 단지 익명의 보편적 승자들의 ‘각기 다른 표정들’로 소환될 따름이다. 그의 조각을 보라! 담담한 표정으로 침묵의 표정을 전하는 승자들의 얼굴은 동일하다. 동일한 초상으로 멀티플을 이룬 거대한 탑을 보라! 그들은 승자라는 보편자의 세포핵이 분열되어 만들어진 무수한 ‘자가 생식자’들이다.
한편, 우리는 그의 조각 〈Winner’s face〉이 익명적 얼굴을 통해서 승리자의 보편적 이미지를 강화시키면서도 또 다른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무표정한 침묵의 페르소나, 그것은 가면 뒤의 진심과 실체를 가리는 위장의 장치이자, ‘참’을 은폐하는 ‘거짓’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담대한 듯이 보이는 승리한 자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실상 위선으로 실체를 가린 껍데기 이미지일 뿐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부분은, 투명한 승자의 얼굴이 어느새 불투명한 가면으로 전환되는, 그의 작업이 감추고 있는 미학적 전환 지점이 된다.







III. 통() - 관()의 차원 이동
작은 원들로 구멍을 뚫은 철판을 겹쳐 레이어를 만든 표면 위에 유명 인사들의 초상을 그리면서 공(空)의 세계를 실험하던 그의 새로운 회화는 조각의 영역으로 이동하면서 승자의 얼굴을 만나게 되고 이내 허(虛)의 세계를 성찰한다. 이제 그는 2차원의 원(圓)을 3차원의 것으로 이동시킨 파이프(管)의 등장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에서의 이러한 ‘비어 있음’의 의미를 ‘소통’의 의미로 보다 더 확장한다.
생각해 보라! 파이프는 2차원의 ‘원’의 공간을 3차원으로 길게 연장한 투과체의 ‘원기둥’이다. 그는 무수하게 많은 파이프들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계획하는 형상에 걸맞게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설계하고 미리 재단한 후, 집적(集積)의 방식으로 멀티플아트(multiple art)라 지칭될만한 3차원 조각을 만들어 나간다. 작가 이철희에게 있어 복수형 예술로 통칭되는 멀티플아트는 예술작품 자체의 복제를 통해 성취하는 ‘원본성을 지닌 에디션’이라는 개념보다 개별 모듈의 존재 방식을 여러 차례 반복, 재생하는 창작 개념에 보다 더 가깝다. 달리 말해서, 같지만 조금씩 다른 크기의 파이프들을 마치 디지털 기기의 픽셀(pixel)처럼 반복적 집적을 통해서 작품을 만든 것이다. 즉 모듈의 복수화를 성취한 멀티플아트라 할 만하다.
이철희의 작품에서 개별 모듈이란, 기본적으로 같은 종류의 파이프를 지칭한다. 그렇지만, 작품 안에서 이 파이프들은 저마다 다른 크기와 형태로 재단될 뿐 아니라, 제각기 다른 위상학적 좌표들(Topological coordinates)을 견지한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보라. 그의 파이프들은 조각의 최하단부로부터 시작해서 최상단부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하나의 층씩을 완성해 나간다.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치밀한 설계와 더불어 고된 집적의 노동을 통해서 비로소 무수한 파이프 층을 이루는 투과체의 조각이 탄생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가 그토록 그리는 “수만 개의 세포가 모여 하나의 조직을 이루는 거대한 생명체 같은 조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품의 4면의 양상은 여실히 다르다. 대개 한쪽 면이 파이프의 원의 형태만 보이는 출발점(혹은 도착점)이라고 한다면, 또 한쪽 면은 파이프의 기다란 관의 모습이 자리하는 지점이다. 때로는 이 지점들이 서로 뒤섞여 있기도 하다. 보라! 앞 다리를 들고 막 달리려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한 쌍의 말’과 편안한 휴식을 취하면서 앉아 있는 ‘코뿔소 한 마리’를 말이다. 말 한 쌍을 표현한 작품은, 역동적인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서, 파이프의 ‘원’의 형태와 ‘관’의 형태가 수시로 방향을 달리 하면서 보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물론 그것은 4개의 다리와 긴 꼬리 등 몸통과 따로 형성되는 부분이 워낙 많기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코뿔소 한 마리’는 얼굴, 몸통, 다리가 특별히 분리되지 않고 한 몸처럼 인식되면서 전체적인 형상을 매우 편안하게 보이도록 구성했다.
그렇다면 코, 입을 둘러싼 미소만 따로 떼어내 만들어진 ‘커다란 인물 두상’은 어떠한가? 또한 Love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장치한 추상적 조각은 또 어떠한가? 말이든 코뿔소이든 그리고 구상이든 추상이든 이철희의 모든 작품에서, 파이프의 중심축 방향으로 엇비슷하고 길쭉하게 혹은 짤막하게 잘려나간 파이프의 다양한 ‘관’의 형태와 더불어 일률적인 ‘원’의 형태가 뒤섞인 작품의 외관은 신비롭고 매혹적이다. 이러한 양상은 파이프를 일정한 방향으로 집적하면서 나타난 결과인데, 구상되는 형태에 따라 깎이는 각도가 상이해지면서, 조각 표면의 다양한 텍스처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2차원 원으로부터 3차원 원기둥으로’ 차원 이동한 이철희의 최근작인 일명 ‘파이프 작업’은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공의 세계로부터 소통의 세계로의 전환’이라는 지점이다. 풀어 말해, 이철희는 ‘2차원 구멍인 원(圓)’이라는 공(空)과 허(虛)의 세계로부터 ‘3차원 구멍인 관(管, 파이프)’이라는 통(通)의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다.








IV. 합() -반투명성의 비늘 옷
이철희의 최근 작업에서 3차원 구멍은 파이프로 만들어진 긴 터널이다. 가끔씩 옆구리가 제거된 채 파이프의 기능을 상실한 불구의 몸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잘려진 파이프는 외려 멋진 예술의 몸이 된다. ‘3차원 구멍인 관’은 이상적으로 이쪽과 저쪽의 소통을 매개하는 매개체이다. 그런 면에서 파이프관은 투명해 보이지만, 알루미늄이나 스테인리스 스틸의 육중한 재질이 가로막기도 하고, 파이프의 옆구리를 비우기도 하면서 마냥 투명성의 존재로만 남겨 두질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투명과 불투명을 오가는 반(半)투명의 존재이다.   
작가 이철희는 자신의 작업을 “수천 개의 구멍과 원기둥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비늘처럼 연결되어 형상”을 이룬 것으로 설명한다. 물론 여기서 ‘비늘’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멀티플아트의 증식의 논리를 충족하는 모듈의 반복적 집적을 구성하는 개체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우리로서는 추가적으로 그가 표현하는 ‘비늘’을 반투명성의 매개체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비늘’이란 물고기가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불투명한 방어막이자, 동시에 자신을 세계로 이어주는 투명한 인터페이스(interface)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철희 작업에 있어서의 ‘반투명성’이란 마치 ‘비늘’의 기능을 하는 ‘비늘 옷’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구멍과 원기둥이 합(合)하여 만들어지는 자신의 조형 예술관을 드러내는 훌륭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파이프의 물리적 조합과 더불어 원과 원기둥이라는 차원으로서의 전환 논리, 그리고 실제로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패턴 무늬의 변환과 같은 망막적 효과 등이 한데 어우러진 그의 이번 전시를 통해서,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의 반투명성의 미학이 독특한 차원으로 전개되어 나가길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반(半)투명성을 지향하는 소통의 파이프 조각' (이철희 전, 2016. 9. 1-11. 1, 임페리얼팰리스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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