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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서문│동시대 유리 풍경전 / 불이 만드는 청명한 풍경

김성호



불이 만드는 청명한 풍경 


김성호(미술평론가) 
 

〈유리섬미술관〉에서의 이번 기획전, 《GLAS : SCAPE in Contemporary Art – 동시대 유리 풍경》전은 유리 조형의 세계를 묵묵히 펼쳐 나가고 있는 18인의 예술가를 초대했다. 회화나 디지털 이미지의 방식으로 유리 조형의 세계를 탐구하는 일군의 예술가를 함께 초대한 이 전시는 동시대 조형 예술의 세계에서 국내 유리 예술이 당면한 오늘날의 현 상황을 조명한다.
이번 전시는 유리공예의 다채로운 풍경을 관객들에게 선사함으로써 유리 예술과 관객들과의 친밀도를 높이고자 한다. 부대 행사로 마련된 ‘유리 블로잉(blowing) 시연’은, 전문적이고도 복잡다기한 유리 예술의 창작 과정을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대중에게 선보임으로써, 이번 전시가 결코 전문가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과의 소통을 함께 도모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I.  '동시대 유리 풍경' 전이 그리는 풍경
전시의 출품작들은 유리공예로부터 유리 조형의 세계를 아우르면서, 저마다의 참신한 실험을 거듭하면서 동시대 유리 예술의 다채로운 풍경을 그린다. ‘초자(硝子)’라고도 불리는 유리(琉璃)란 말 그대로 “석영, 탄산소다, 석회암을 섞어 높은 온도에서 녹인 다음 급히 냉각하여 만든 물질”이다. 이것은 “금속이나 비금속의 산화물이 열로 인하여 화학 반응을 일으켜, 원자가 불규칙한 망목상(網目狀)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겉보기에 그것은 분명히 고체이지만, 고체 특유의 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더러, 일정한 녹는점도 갖고 있지 않기에, 물성적으로는 ‘점도가 높은 액체’ 즉 ‘과냉각 액체’로 규정되는 특이한 존재이다. 
흥미롭게도 전시의 출품작들은, 형식이나 내용의 측면에서, 유리의 이러한 ‘비결정적 물성’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여기서 필자는 출품작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을 다음과 같은 5개의 범주로 대별해 보고자 한다.


1. 풍경이 된 유리공예 / 먼저, 쓰임새를 유념하면서 만든 예술적 유리공예의 유형들이다. 블로잉(blowing)과 콜드워킹(cold working)으로 만들어진 박성훈(Park, Sung-Hoon)의 컵들은 그윽한 그러데이션과 더불어 표면에 잔잔한 텍스추어를 지닌 예술적 유리공예의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단순한 기능성에 자족하지 않는 이러한 작품들에는 미적 감흥으로 충만하다. 블로잉 기법으로 만들어진 김준용(Kim, Joon-Yong)의 그릇은 마치 붉은 꽃송이가 선녀처럼 내려앉은 비기(秘器)이거나 영묘한 푸른빛의 성배(聖杯)라 할 만하지 않은가? 유연한 식물이나 명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생물의 형상을 닮은 김헌철(Kim, Hun-Chul)의 그릇들은 자연스럽게 자연의 빛과 풍경을 그릇의 몸 안에 담아내면서 태고로부터 망각된 우리의 기억을 소환한다. 가히 풍경이 된 유리공예라 할 만하다.  



김현절 작

 
2. 자연을 품은 유리의 부피 / 김지원(Kim, Ji-Won)의 작품은 또 어떠한가? 보라! 슬럼핑(slumping) 기법으로 납작하게 주저앉힌 푸른색을 입힌 와인 잔이나 투명한 유리병들은 스스로 실용성을 탈각시키고 마치 설치미술과 같은 양상으로 무수히 집적되어, 유리공예를 일상의 단순한 오브제로부터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시킨다. 이와 같은 집적의 조형 언어는 납작한 유리를 다른 무엇으로 변주한다. 감성원(Kam, Sung-won)의 작업은 마치 유기체처럼 비균질적인 형상으로 재단된 색판 유리들을 반복적으로 집적시켜서 시각적 레이어를 만들고 유리를 투영하는 빛의 효과를 선보인다. 그것은 마치 떨어진 낙엽들이 겹쳐진 시공간 혹은 산봉우리가 아스라하게 중첩된 자연의 풍경과 닮아 있다. 한편 라미네이팅(laminating)과 인그레이빙(engraving)으로 깎이고 연마된 곽동준(Kwak, Dong-Joon)의 유리판은 회화적인 띠무늬의 층을 만들면서 자신의 유리 조형 안에 꽃, 숲, 대자연을 불러온다. 납작한 유리가 지닌 물리적인 부피는 얇디얇은 것이지만, 예술의 언어로 인해 이미저리(imagery)로서의 부피는 실로 장대해지는 것이다.  



감성원 작


3. 장식과 조각 사이의 마인드스케이프 / 보라! 납작한 유리가 만드는 풍경은 장대하다. 투영(透映)과 반영(反映)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유리체의 물성이 잠식하는 부피의 장대함은 실상 외부로 확장하는 것이기보다 자신의 몸 내부로 확장하는 것이다. 구겨진 채 접혀진 셔츠를 그대로 캐스팅해서 색을 입은 반투명체의 유리 조형으로 변주시켜 낸 곽동훈(Kwak, Dong-Hoon)의 작품은 인간의 문명적 표피인 옷만 덜렁 남김으로써 인간 주체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유리 물성의 반영과 투영의 효과를 통해서 그 ‘없음’의 문제를 신비롭고도 오묘한 푸른빛으로 가득 채운다. 이처럼 작은 유리 조형 몸체가 끌어안은 풍경이란 유리의 물성 내부로 잠입한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이다. 유리가 FRP와 만나 형상화된 강희찬(Kang, Hui-Chan)의 작업은 바닷속 성게와 같은 생물체의 모습으로 보이다가도 동화 속에서 빛을 발하던 어린 왕자의 고향의 별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선민(Park, Seon-Min)이 토치로 녹여 만든 플레임워킹(flameworking) 기법의 유리 조형은 작가의 기억 속에서 길어 올린 분홍빛 꽃고무신이다. 그렇다. 기억으로부터 포착되는 풍경 속 색과 형상이란 결코 손에 잡히는 실체가 아닌 ‘마음의 풍경’인 것이다.



박선민 작



4. 풍경의 기호 / 마음의 풍경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흔적이 있다. 판유리에 거칠게 구멍을 뚫어 절단면을 다듬지 않은 채, 다이어그램(diagram)의 도상을 새기고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수식을 가져온 김수(Kim, Su)의 실험적인 유리 조형은 무척 흥미롭다. 풍경을 기호(sign)로 치환해서 사람의 흔적들을 되새김질하듯 새겨 내고 있기 때문이다. 라미네이팅(laminating) 기법으로 만든 편종필(Pyun, Jong-Pil)의 건축적 구조물, 캐스팅 기법으로 만든 이영재(Lee, Young-Jae)의 말풍선 또한 기호화된 풍경과 사람의 흔적을 여실히 곱씹게 만든다. 점, 선, 면의 조형 요소를 쟁반, 의자, 인체의 형상으로부터 추출해 내는 임현준(Im, Hyun-Jun)의 유리 작업 역시 풍경이란 결국 인간 흔적의 기호적 풍경임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나아가 블로잉 기법으로 만든 이태훈(Lee, Tae-Hoon)의 손가락 형상은 영어 알파벳을 만들면서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기호를 남긴다. 김형종(Kim, Hyung-Jong)의 판유리로 만든 인간 군상의 실루엣 역시 ‘기호화된 풍경’ 혹은 ‘풍경의 기호’에 다름 아니다.



김형종



5 그림 같은 풍경 /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는 ‘그림 같다’고 했던가? 유리 풍경을 해석하는 유용상(Yoo, Yong-Sang)의 회화는 하이퍼리얼리즘의 기법으로 유리의 반영성과 투영성을 깊이 탐구한다. 구형의 유리구슬의 표면 위에 풍경을 남긴 조현성(Cho, Hyun-Sung)의 작업이나 사람의 피부 위에 퓨징(fusing)으로 만든 작은 유리구슬들을 올리고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유충목(Yoo, Choong-Mok)의 디지털 이미지는 유리공예, 사진, 회화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감정 없는 구슬에 감정을 듬뿍 이입한다.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면서 말이다. 
 

유충목



II.  '동시대 유리 풍경' 전의 과제
서구에서는 전통적 공예의 현대화와 더불어 첨단의 공예 산업이라는 투트랙이 대중의 관심 속에서 순조롭게 전개되고 있는 것에 비하면, 국내의 유리공예, 유리 조형의 상황은 열악하기조차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서는 유리 예술의 역사도 일천할 뿐만 아니라, 국내 대학에 개설된 유리 예술 관련 전공이 손에 꼽을 만큼 일천하고, 타 장르에 비해, 유리예술가의 인구도 소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쓰임새를 전제하면서도 창작 과정의 용이함으로 인해 대중적 매체로 자리하면서도 다양한 실험으로 순수 예술의 세계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는 사진 예술과는 극명히 대비되는 지점이다.
서구에 비해, 타 장르에 비해, 열악한 상황 속에서 국내의 유리공예 혹은 유리 조형이 천착해 나갈 미래는 그럼에도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유리섬미술관〉과 같은 유리 예술의 산파 역할을 자임한 많지 않은 비영리 기관들과 소수의 유리예술가들의 치열한 예술 실험들이 오늘에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 예술의 플랫폼으로서 이러한 기관은 유리 예술의 역사와 현재적 상황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사료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진 예술가를 육성하는 일, 나아가 대중들에게 유리 예술의 실험적인 현대미술로서의 위상을 알리고 교육해야 할 사명마저 지니고 있다. 
이번 전시 《동시대 유리 풍경》전은 뜨거운 불길을 거쳐 투명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유리 광물의 비결정적인 존재론적 위상과 부합하게, 가히 ‘불이 만드는 청명한 풍경’이라 부름직하다. 오늘날의 유리 예술은 물성의 변화를 촉진하는 연금술적 매력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특유의 조형 언어를 조형 예술의 넓은 세계에서 다양하게 실험하는 일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국내 유리공예, 유리 예술이 동시대 국내 미술 현장에서 다소 이격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번 전시를 계기로 유리 예술이 국내외 공예의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계에 다양하게 펼쳐지길 기대한다. ●



출전/

김성호, '불이 만드는 청명한 풍경', 카탈로그, 《GLAS : SCAPE in Contemporary Art – 동시대 유리 풍경》(유리섬미술관,  2016. 9. 6~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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