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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박형렬 / 포획, 재전유, 포월로서의 사진 행위

김성호

포획, 재전유, 포월로서의 사진 행위 


김성호(미술평론가) 


박형렬의 작업은 대략 두 가지 제목 혹은 범주로 전개되어 왔다. 하나는 ‘THE CAPTURED NATURE(2010-2012)’이고, 또 하나는 ‘FIGURE PROJECT(2013- )’이다. 그의 작업에서 이러한 두 범주는 개념적 행위와 사진이라는 장르가 서로 맞물려 있다. 대개 그것은 행위 미술이라는 ‘과정 자체’이지만 언제나 사진이라는 ‘결과’로 남겨진다. 전자의 작업이 자연을 포획하고 구속하여 추출되는 파편적 이미지와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라면, 후자의 것은 인공적 개입을 통해 자연을 재구성하는 다양한 창작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두 시리즈의 사진 작업에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포월(匍越)의 미학이 읽힌다. 때로는 ‘드러냄’으로 때로는 ‘감춤’으로 가시화되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찬찬히 살펴본다.  


The captured nature_Tree#4, Pigment print, 144x180cm, 2011



I. 포획
자연은 인간에 의해 포획된다. 지금까지 채취와 사냥이란 이름으로 실제적인 포획이 이루어져 왔고, 풍경(風景)이란 이름으로 관조적인 포획이 펼쳐져 오고 있다. 주지하듯이 어떠한 형식이든지 ‘포획’은 ‘물리적 업악’과 ‘폭력적 지배’를 잉태한다. 그것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自然)의 존재적 위상을 해체하고 훼손한다. 
생각해 보자! 예술은 인간이 미적 개념을 창출하는 인공적 행위이다. 그것은 자연의 본성을 해체하는 인간의 개입이다. 사진 또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포획에 다름 아니다. 사각의 프레임으로 자연을 임의로 절단하고 추출하며, 피사체로 그것을 대상화시키고 한정한 채 묶어두는 것이다. 납작한 2차원 평면 안에 담겨진 사진 이미지는 3차원 시공간의 리얼리티를 결박하여 포로로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작가 박형렬이 지극히 반자연적인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분히 친자연적 태도로 작업하는 역설적인 방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최소한의 인간적 개입을 통해 자연의 숨겨진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며, 예술이 할 수 있는 효율적인 자연에 대한 개입을 통해서 드러내는 자연에 대한 성찰이 된다. 이러한 지점은 그의 행위적 사진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보라! 박형렬은 사진 안에 들어오는 피사체인 자연을 먼저 물리적으로 포획하는 작업에 나선다. 즉 사진을 찍기 전, 피사체인 자연을 요철(凹凸)의 형식으로 분해하고 분리하여 보편적 자연으로부터 ‘극(劇)화된 자연(dramatized nature)’ 혹은 ‘만들어진 자연(man-made nature)’을 포획해내는 것이다. 이 포획의 과정에는 자연을 파괴, 해체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적 개입을 시도하는 하이저(Michael Heizer)와 같은 작가들의 〈이중 부정(Double Negative)〉과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반환경적인 대지미술의 조형 언어와는 다른 지점이 노정된다. 예를 들어 박형렬의 그것은 마이클 하이저처럼 계곡을 파헤치거나 크리스토(Christo)처럼 장막으로 대지의 숨구멍을 뒤덮거나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처럼 피뢰침을 땅속 깊이 박아 정복을 꾀하는 과도한 점유가 아니며 대지의 피부를 덜어내고 그 속에 숨은 속살의 지층들을 드러내 함께 보여 주는 최소의 개입이다. 
그의 포획된 자연이란 그저 그가 선택한 자연의 작은 테두리 안에서 말라비틀어진 대지의 땅껍질을 벗겨내 대지에게 숨구멍을 돌려주는 일이며, 갯벌을 뒤덮은 간척지의 모래들을 덜어내 원래의 땅이 호흡을 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때로 그것은 실들을 얼키설키 직조해서 작은 풀들 위에 얹어 주는 ‘작은 집’이자, 그들에게 입혀 주는 ‘어여쁜 옷들’일 따름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 행위에서 ‘극화된 자연’이란 그저 작은 연극을 만들어 자연과 벌이는 놀이이며, 그의 ‘만들어진 자연’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자연과 교감하는 자상한 돌봄과 자애(慈愛)로운 보살핌이 귀결시킨 그저 소소한 결과일 따름이다.  

Figure Project_Earth#21, Pigment print, 144x180cm, 2013



The captured nature_Earth#6_2, Pigment print, 120x150cm, 2012




II. 재전유
‘스스로 있는 자연’에게 인간이 제안하는 놀이와 더불어 자상한 돌봄과 소통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의 작품 〈The captured nature_Stone#3〉(2011)에서처럼, 자연석 위에 딱지를 더덕더덕 붙이면서 자연을 포획하고 더럽힌 채 그 위에 정복자처럼 고고하게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놀이와 돌봄이 아니라 서구의 대지미술가들이 행했던 자연 정복을 음험하게 시도하는 예술의 자만적인 폭압이 아닌가? 
아서라! 그렇지 않다. 그의 작품의 ‘극화된 자연’, 그리고 ‘만들어진 자연’은 오히려 야만적 인간의 행태에 대한 비평을 지향한다. 위의 작품은 예술계 안에서 레드 닷(red dot)으로 사유화를 정당화한 미술시장의 제도처럼 공공의 자연 역시 사유화되는 오늘날 풍토를 비평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그의 ‘만들어진 자연’ 혹은 ‘극화된 자연’을 야기한 ‘자연 포획’은 자연의 해체와 정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비평적 성찰을 권유하기 위한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이자 재구성 나아가 재전유’를 지향하는 것이다.  
‘재전유’(re-appropriation)는 ‘전유’를 재고(再考)한다. 달리 말해, 모든 모더니즘적 실천을 해체하고 그것을 다시(re)라는 접두어로 접속시켜 재전유를 실천하는 것이다. 전유의 어원적 의미는 ‘무언가를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련의 행위’이다. 이것은 오늘날 문화 연구에서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을 인수하여 그 문화자본의 원(元) 소유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드는 행동”을 가리킨다. 박형렬의 사진 행위에서 그것은 자연을 가져와 자연의 원 소유자인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행동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비틀어내는 재전유란 그의 작업에서 ‘창조주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도전’으로 자리 이동시킨다. 의미에 대한 재의미 작용(re-signification)을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브리콜라주(bricolage)처럼 그의 사진 행위가 놓인 맥락을 혼성 차용하여 변경한다. 즉 자연의 개입을 자연의 해체와 정복이라는 본래적 귀결점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놀이와 비평적 소통이라는 아슬아슬한 지점으로 자리 이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재전유에서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하듯이, 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야만적 정복을 비판하기 위해서 가장 원론적 단계에서 인간의 자연 해체를 그의 사진 행위에 소환한다. ‘자연과의 놀이’, ‘자연과의 소통’의 언저리를 아슬아슬하게 배회하면서 말이다. 보라! 그가 〈The captured nature〉 시리즈나 〈Figure Project〉 시리즈에서 대지 위 ‘눈밭’이나 ‘땅’ 혹은 ‘물’의 피부를 기하학 도상의 음각(陰刻)의 방식으로 오려내는 일은 분명코 자연을 뻔뻔하게 포획하고 편취하는 방식임에도 지층의 얇은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는 방식의 재전유를 통해서 자연에 호흡 길을 열어주는 친(親)자연적 행위로 전환된다. 작품 〈The captured nature_Sea#1, 2〉(2011, 2012)에서 해변 위에 여러 액자나 색유리판을 올려 ‘자연에 대한 관조적 풍경’을 이중의 얇고 투명한 프레임들로 포착하는 그의 사진 행위는 인간의 자연 정복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진 행위를 ‘자연과의 소통’으로 치환시키는 개념적인 재전유를 실천한다. ‘그만의 친자연적 옷’을 해변 위에 입혀 내면서 말이다. 
나아가 작품 <The captured nature_Earth#9>(2012)에서 그는 0부터 9까지의 아라비아 숫자를 3.3M²에 해당하는 ‘한 평’(坪)이라는 한국적 숫자 개념으로 재구성하여 가시화함으로써 땅에 가해지는 인간의 정복 행위를 비판하고 땅의 본래적 의미를 재전유하기도 한다.  
그렇다. 그에게 있어 자연을 해체하고 포획하는 일련의 사진 행위란 자연에 대해 끊임없이 다시(re)를 제안하고 실천하는 재구성 행위이자 자연의 해체와 정복에 대한 ‘개념적이지만 통렬한 비판’을 위한 재전유인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영상 작품인 〈종이 찢기(Paper - tearing)>(2016)의 결과처럼 유형화시킬 수 없는 재전유의 실천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시리즈 작품 〈Figure Project_Earth#58_>에서 그에게 포획된 지층의 껍질들이, 마치 종이 ‘찢기의 결과처럼 예측 불가능한 유형으로 그 속살들을 연이어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비판적 사진 행위란 결국 재전유의 조형 전략 위에서 자연과 벌이는 놀이이자 소통 행위라 할 만하다.  

The captured nature_Sea#2, Pigment print, 120x150cm, 2012

The captured nature_earth#9_ 2012, work process


III. 포월
자연의 포획을 재전유하는 그의 사진 행위로부터 우리는 최종적으로 어떠한 미학과 대면하는가? 그것을 필자는 포월(匍越)의 미학이라 부른다. 한국의 철학자 김진석이 제시한 이 개념은 한자의 의미 풀이대로 ‘기어서 넘는’ 일련의 모든 사유와 행위를 지칭한다. 그것은 현실 극복과 이탈을 주도하는 초월(超越)과 대립한다. 그것은 탈주의 결과에 박수를 보내는 초월과 달리 현실을 안고 엉금엉금 느리게 기어 넘는 지난한 넘어섬의 과정 자체에 방점을 찍는 행위이다.
이 개념은 그의 최근 개인전 《SLOW-DRAWING》(2015, BMW Photo Space)에서처럼 박형렬 특유의 ‘굼뜨고 느려 빠진 미술 행위’와 만나게 한다. 그의 사진 행위는 낙서나 표현주의적 추상처럼 일필휘지로 기를 쏟아내는 ‘Fast-Drawing’을 실험하기보다 유적 발굴을 실행하는 고고학자처럼 캔버스로 삼은 대지의 지층을 조심스럽고도 세심한 태도로 분석하듯이 ‘Slow-Drawing’을 전개시켜 나간다. 그의 느릿느릿한 드로잉은 때로는 대지 위에 메스를 대고 그 피부를 벗겨 내는 조심스러운 치유의 과정으로, 때로는 실들을 성기게 교차시켜 만들어 낸 커다란 자연의 붕대로 대지의 피부를 천천히 감싸는 치유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볼록의 결과이든 오목의 결과이든 땅과 대면하는 그의 느릿한 드로잉은 ‘기어 넘는’ 느릿한 ‘포월’의 고고학과 의술(醫術)을 실천하는 지난한 노동이 배태되어 있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천천히 붓으로 흙을 쓸어내듯이, 또는 배가 아픈 환자에게 메스를 들어 당장의 국소해부학적 치료를 감행하는 것과 달리, 한의사가 경락(經絡)의 주름을 따라 손등과 발등에 천천히 침술을 행하고 묵묵히 낫기를 기다리듯이 말이다. 
퍼포먼스를 기록한 그의 사진 행위 시리즈인 〈Figure Project_Earth〉를 보자. 크레인을 동원해서 부감법으로 촬영된 이 사진 시리즈 작업에서, 흰 옷 또는 검은 옷을 입은 퍼포머는 대지 위에 펼쳐진 커다란 흰 천과 검은 천이 만드는 자연과의 경계면을 천천히 포월한다. 퍼포머가 꼬물꼬물 기어가면서 만드는 느릿한 운동의 궤적은 영상으로 기록되어 선보이기도 하지만 병렬의 다면 사진을 통해서 그 포월의 흔적을 중첩시켜 드러낸다. 
비교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탈인공의 자연 공간은 지극히 평범한 공간이지만, 작가가 설정하는 ‘극(劇)적 장치’를 통해서 이내 예술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기에는 자연과 인공 사이의 대립면 혹은 경계면들이 형성된다. 그것은 일견 대지 위에 그리는 단순한 기하학적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특수한 복장의 인간들이 점, 선, 면의 조형 요소처럼 등장하면서 단순한 추상적 화면으로부터 자연/인공의 경계면을 확장하면서 활성화시킨다. 넓거나 좁은 폭의 인공의 천이 자연의 대지 위를 점유하면서 만드는 추상의 화면 위에 그가 등장시킨 퍼포머(들)이 ‘자연/인공, 자연/예술, 검은색/흰색, 대상성/비대상성, 구상/추상, 정지/움직임’이라는 다차원의 경계면을 복잡하게 형성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경계면을 꾸물꾸물 천천히 포월하면서 ‘하나의 경계로부터 또 하나의 경계로’ 자신의 몸을 확장한다. 이쪽의 경계로부터 저쪽의 경계로 포월하면서도 양쪽의 몸을 다 갖고 있는 재전유 혹은 브리콜라주의 몸으로써 말이다. 그래서 날카로운 하드에지(Hard Edge) 추상의 경계면처럼 보이는 그것은 이내 수많은 경계면을 갖는 들뢰즈(G. Deleuze) 식의 ‘주름(pli)’이라는 메타포의 공간으로 확장하게 된다. 

Figure Project_Earth#42(1,2), Pigment print, Each 150x120cm(2pcs), 2015



Figure project_Earth59(1,2,3)_Pigment print, each 180x144cm(3pcs), 2016



그런 면에서 퍼포머들은 자연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진혼제를 벌이고 있는 작가의 샤먼(shaman)적 주술을 대리 실천하고 있는 조력자들(Asst-shaman)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따라서 박형렬이 재구성과 재전유를 실천하는 사진 행위는 ‘관조적인 타자의 풍경’이 더 이상 아니다. 이제 그것은 주체가 풍경을 피아적으로 체험하는 ‘체험적인 피아의 풍경’으로 자리 이동한다. ‘피아(彼我)’란 사전적 의미로 “그와 나 또는 저편과 이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지 않던가? 그런 면에서 그의 작업에서 ‘피아’란 풍경을 끝없이 대상화하는 모더니즘의 관조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또 다른 주체이다. 달리 말하면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견해 식으로 그것은 더 이상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함께 대화하는 주체로서의 풍경이 된다. 즉 ‘인간/예술/자연’ 사이에서 자신의 몸을 서로 나눠받는 ‘탈대상화된 주체로서의 풍경’이다. 
그렇다! 작가 박형렬의 작업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의 자연으로 나가 ‘체화된 몸, 즉 피아적 주체’의 자격으로 벌이는 사진 행위이다. 물론 그의 작업이 때로는 사회적 메시지 생산을 염두에 둔 작위적인 지점과 겹쳐지고 때로는 메타포의 현현을 재구성하는 일에 집착하고 있는 듯이 비추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납작한 평면의 사진이 가질 수 있는 막강한 힘들 중 하나인 재전유와 포월의 미학을 비교적 단순한 ‘메이킹 포토’(making photo)의 전략을 통해서 이처럼 효율적으로 가시화시키고 있다는 지점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출전/

김성호, 포획, 재전유, 포월로서의 사진 행위, (박형렬 화집, 201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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