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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이봉상 / 이봉상의 구상 회화에 나타난 환원적 자연주의 (하편)

김성호

이봉상의 구상 회화에 나타난 환원적 자연주의 (하편)

김성호(미술평론가)


(상편에 이어서)


VII. 중년 이봉상(1953-1966) - 미술교육자 화가 
1953년 휴전 이후 삶의 터가 부산으로부터 다시 서울로 변환된 상태에서 이봉상은 지금까지 그가 받은 교육과 훈련을 후배 세대들을 위해서 본격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마련하였다. 그가 38세였던 1953년 〈대한미술협회〉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수복된 서울의 〈낙원 다방〉에서 박고석(朴古石), 손응성(孫應星), 이응로(李應魯), 이정규(李楨圭)와 《5인전》을 개최했다. 아울러 후학들을 위한 『서양미술사』(문화교육출판사)를 집필, 발행하기도 했다. 
이 장을 ‘미술교육자/화가’라는 소제목으로 중년(38세-51세)의 이봉상을 연구하려고 한 까닭은 이봉상이 1954년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전임강사로서 교수의 직분을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학교나 보직을 달리하면서도 대학 교육에 줄곧 몸담아 왔기 때문이었다. 1954년 (39세) 홍익대에서 첫 전임강사 이후 1958년(43세) 서라벌예대 미술과장, 1959년(44세) 홍익대 조교수, 1961년(46세) 홍익대 미술학부 회화과장, 1963년(48세) 홍익대 미술학부 대학원 위원, 1964년(49세)년 3월 이후 홍익대 회화과 부교수, 1965(50세)년 9월 이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를 맡으며 지속적인 대학 교육에 힘을 써왔다. 1966년(51세)년 12월로 그는 홍익대 교수를 사직하게 되면서 대학의 미술 교육의 장에서는 몸을 떠나게 된다. 
그는 대학 교육을 성실과 근면으로 임했다. 제자들의 어려운 형편에 있을 경우는 ‘자신의 학교 작업실도 몇몇 학생에게 내어 주면서 창작을 격려’28)하는 등 제자들을 언제나 온화함과 따뜻한 정으로 지도했다. 그는 “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여도 정이 많고 눈물이 많아, 다분히 감상적임을 자인하지만...”29)이라며 스스로도 정이 많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봉상은 대학 교육뿐 아니라 평소에도 중고교의 미술 교육에도 이러한 온화와 근면함으로 지속적으로 헌신해 왔다. 그는 1955년부터 문교부 장학위원으로 전국 중, 고등학교의 미술 교육 현장을 시찰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는 1953년에도 출간했던 『서양미술사』(천우문화사)를 1956년에 그가 다시 출간했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1958년(43세)에는 서울특별시 ‘교육연구소 지도위원’에 임명되었고, 1959년(44세)에는 ‘문교부 영화 검열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1961년(46세)에는 문교부 ‘교육 과정 심의위원’과 ‘학사고시 출제위원’ 그리고 ‘문교부 입학고사 중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학 교육과 고교 교육의 고리를 잇는데 기여하고자 했다. 1962년(47세)에는 ‘문교부 편수관 임용 후보’와 ‘전형시험 위원’으로 활동했고, 문교부 ‘교육시설 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1963년(48세)에는 문교부 ‘시청각교육 교재 인정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렇듯 이상봉은 대학 교육과는 또 다른 중고교 미술 교육을 위해서 교과서 심의 및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가 1966년 홍대 교수를 사임했던 해에도 『중등미술』(삼화출판사)을 펴냈던 사실은 이러한 그의 평소 애착과 관심을 잘 드러낸다. 
한편, 이봉상은 중고교 및 대학에서의 미술 교육 외에도 대학 밖 교육인 아카데미와 같은 성인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가 1962년(47세) 서울 안국동 로터리에 다시 〈미술연구소〉를 개설하고, 1969년에 서울 관훈동에 〈아카데미 미술학원〉을 개설하면서 이러한 교육과 연구의 새로운 체제의 실천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는 개혁을 앞세우는 미술행정가의 면모 역시 갖춘 인재였다. 1954년 환도 직후 동료 작가들의 모임에서 ‘미협의 편파성을 지적하고 국전 운동 개혁과 집단의 개혁을 주장하곤 했던 일화’30)를 동료 작가 박고석은 한 텍스트에서 증언한다. 이봉상은 실제로 1954년 ‘대한미협 상임위원’으로 피선되어 개혁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그 외에 왕성했던 비평 활동이나 화단에서의 활동은 여기서는 생략하고 미술교육자, 화가로서의 연보를 아래에 간단히 정리한다. 
 


VIII. 말년 이봉상(1967-1970) - 비평가 화가 
이 시기는 그가 홍익대학교를 퇴임한 1966년(51세) 다음 해부터의 시간들인데, 그가 1970년 만성 신장염으로 작고하게 되었다. 우리가 탐구할 만년의 시간이 너무 짧다고 할 것이다. 필자가 가진 자료만으로는 그가 왜 51세라는 젊은 나이에 교수직을 퇴임했는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그가 퇴임 후에도 대학 교육과는 다른 형태의 교육을 지속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대학교수 재직 시에도 1962년에도 〈미술연구소〉를 서울 안국동에 개설했었던 바 있지만, 퇴직 후인 1969년에 서울 관훈동에 〈아카데미 미술학원〉을 개설하면서 이러한 교육과 연구의 새로운 체제의 실천을 본격적으로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를 필자는 ‘비평가 화가’의 시절로 소제목을 달았다. 이봉상이 실제 신문이나 잡지에 비평문을 기고하게 된 때는 연혁을 살펴보면 이보다 훨씬 이전인 그의 나이 39세인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 국전에 관한 리뷰를 처음으로 조선일보에 기고하게 되는데, 이듬해인 1955년부터 2년간은 매년 4-5건의 비평문을 기고했다. 이윽고 1957년(42세)부터 양이 갑작스럽게 늘어나기 시작해 1962년(47세)까지는 평균 6-7건을 기고하게 된다. 특히 1959년(44세)에 일간지와 잡지에 기고한 비평문은 13건에 이른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이전의 비평문들의 숫자가 줄고 논문의 형식으로 글이 발표되는 경향을 보인 것도 특이한 사항이다. 
그의 비평적 관심은 국전이나 각종 협회전의 전시 소개 형식의 비평문이거나 미협이나 미술 단체를 포함한 그룹 활동 및 미술 현장에 대한 시평이었다. 그 내용도 다양해서 미술의 전통의식, 건축 문화, 화단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소견, 국전에 대한 대안적 문제 제시, 추상미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등 다양했다.31)
그의 마지막은 매우 불운한 시기였다. 1966년 오랫동안 몸담아 있던 홍익대를 떠난 후에는 일체 학교와 관계를 갖지 않은 채 자신의 개인 화실을 지켰다고 한다.32) 화단 활동도 이전과 비해 뜸해졌으나 행사가 적어진 만큼의 진중한 무게의 활동들이 외려 제법 눈에 띈다. 
예를 들어 홍익대 사직 이듬해인 1967년(52세)에는 새로운 미술 단체인 〈구상전(具象展)〉을 창립하는 것으로부터 추상미술에 대한 비판적 에세이 더 나아가 구상미술에 대한 옹호에 이르는 논문 발표 등으로 그의 진중한 활동들이 이어졌다. 그가 1967년에 잡지  『공간』에 발표했던 한 글에는 구상회화에 대한 자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의 짧은 미술사적인 과정에 있어서 (중략) 이와 같은 미분화의 상태에서 추상회화는 요원의 불길처럼 오늘의 우리나라 화단을 휩쓸었으며 무지하게도 젊은 화가에게까지 침투되었다.(중략) 혁명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이 산물은 혁명의 종식과 더불어 사라져야만 한다. 그 후에 오는 안정은 안정을 위한 산물이 필요한 것이다.”33) 이처럼 그는 이 글에서 구상전 창립의 당위성을 추상미술이 창궐하는 ‘화단에서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세미나34)에서 발제를 하는 등 긴 호흡의 이론적 작업을 하였다. 
아쉽게도 그가 1967년 가졌던 개인전35)은 마지막 개인전이 되었고 1969년(54세)에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조형예술가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를 계기로 3달 간 유럽의 미술계를 돌아보는 등, 다양한 비전을 위해 준비했던 일들은 그가 1970년 55세로 작고하게 됨으로써 끝내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는 여행 후, 평소 “출판사 일을 돕거나, 미술교과서를 출간하거나 원고를 쓰거나 화실을 내고 개인전을 여는 등 창작생활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곤”36) 했던 그의 늘 분주한 삶을 비로소 정리한 듯 초연해 있었는데 주위의 많은 이들에게 그 초연함이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를 끝내 보여 주지 못하고 생을 달리한 것이다.  
이봉상의 ‘비평가, 화가’로서의 마지막 위상을 살펴보는 연보를 아래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IX. 이봉상의 구상주의 회화 - 상상적인 세계관의 구체상?
아래의 글은 그가 말년에 천착했던 구상성에 대한 작가적 자부심과 애착을 토로한 말이다.  

“현대미술사조가 과거의 엄숙하고도 절실한 변천 발전과는 달리 오늘의 사회 풍조에 동화되어 쇼에 가까운 연극으로 화하여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이 달라야만 한다는, 파고들기 이전에 변화에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유행아적인 자세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점과 또 하나는 여하한 의미에서나, 비정형주의가 진지(眞摯)한 모색(摸索)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낡은 것이라는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구상적(具象的) 표현을 거시적인 의미에서 과제로 삼고 싶은 것이다.” 37)  

박래경도 밝히고 있듯이, 이봉상이 14세의 나이에 선전에 입선한 이후부터의 작업들인 풍경들이 대개 “인상파적, 사실주의적 회화 경향”38)이라고 설명한다. 선전 참가작 외에는 그 세밀한 경향들은 알 길이 없다.  
박래경은 이봉상의 회화에서의 변모의 지점을 ‘1950년대 초기부터’39)로 살피고 있는데, 그것은 비단 이봉상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기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의 시절에 다수의 화가들에게 해당되는 일이었다. 정상적인 화단을 구축했다고 할 수 없겠으나 피난지에서의 학교 운동과 미술 전시 등이 활발해지면서 미술 그룹 운동이 활성화되는 노력들에 힘입어 작가 개인들의 예술 활동들도 어려움 가운데서 비교적 활발히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봉상의 50년대 작품을 보면, 학생 시절의 전통적인 사생의 특징과는 많이 다른 검은 색의 윤곽과 더불어 거친 붓질의 인상주의적이면서도 표현주의적인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그의 인물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인의 흉상만을 포착한 작품 〈초상〉(1956)에는 바탕 화면을 잘 다지지 않은 상태에서 몇 번의 붓질로 인물의 특성을 포착하려는 작위적인 태도를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그림1) 초상, 1956, 캔버스에 유화, 40.9 × 31.8cm, 유족 소장 (이하 기법은 동일)


음영법이나 해부학과 같은 회화의 대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세밀한 탐구는 자취를 찾기 쉽지 않다. 그가 여인의 좌상을 탐구한 작품들, 즉 〈여인 좌상〉(1955)과 〈소녀상〉(1955)을 보면 화면 위에 중첩되는 붓질이 이전 붓질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덧입혀지는 효과에 천착하고 있는 작업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짧은 붓 터치가 반복되는 형상은 인상주의적이고 자연색보다는 원색과 보색이 배경과 인물에서 동일하게 구사되고 있는 점은 20세기 야수파나 표현주의적 특성과 매우 닮아 있다. 인물의 이목구비나 손의 모양새를 제대로 마감하지 않고 완성한 것은 그가 결국 형상의 외피보다 형상에 내재한 인물의 감정을 담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림2) 소녀상, 1955, 72.7 × 53cm, 국립현대미술관
(그림3) 여인 좌상, 1955, 90.9 × 65.1cm, 유족 소장
(그림4) 푸른 여인, 1959, 130.3 × 97cm, 국립현대미술관


인물뿐 아니라 자연의 풍경을 담고 있는 그의 회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거친 마티에르를 일부로 남겨두고 있다는 점이다. 유화의 다양한 효과를 어린 시절부터 연마했던 이봉상이 린시드나 테레핀과 같은 용매가 섞여 색이 풀어지고 엷어지는 효과를 모를 리 만무하다. 그는 유화의 물감이 불투명하게 겹쳐 올라가면서 발현시키는 마티에르의 효과가 그의 토속적이고 표현주의적인 화풍을 되살리는데 있어 제격임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인물과 배경 사이에 개입하는 일련의 상징적인 도상, 예를 들면 작품 〈소녀〉(1961)에 나타나는 소녀의 전신상 뒤에서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는 하늘을 나는 새들의 모습이나 얕은 산등성이의 모습 그리고 마을의 집들은 작가의 애정이 듬뿍 담긴 그의 고향을 표현한 것들로 간파된다. 인체가 온통 파란색으로 칠해진 작품 〈푸른 여인〉(1959)이 드러내는 상징성은 또 어떠한가? 지극히 단순하게 표현된 여인 좌상의 포즈도 그러하거니와 나체의 하반신을 덮고 있는 하얀 천도 자연스러운 형체보다는 야수파와 같은 화풍을 드러냄으로써 작가의 주관적 감성에 의해서 대상이 해석되어지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러한 화면을 대면하고 있으면 박래경의 “상상적인 세계관의 구상화라는 특이한 하나의 조형세계에 새롭게 주력하는 도정이었다” 40)라는 평이 제격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봉상은 생전에 자신의 조형 세계에 대해 스스로 ‘상상적 세계관의 구체상’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오늘의 이 시점에서 구상미술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판단하기에 앞서 나는 타블로에 투영되는 구상의 이미지의 보다 강렬하고도 절실한 표현욕을 느꼈으며 따라서 나이 자세를 그런대로 정착시켜 본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희구하는 구상이란 것은 어떤 것일까? (중략) 보다 승화된 가상적인 형태의 초점을 압축시켜 가는 것이며, 상상적인 세계관의 구체상을 포착하는 작업이 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41)  

우리는 이러한 그의 ‘상상적 세계관의 구체상’이란 개념이 미학적으로도 결코 쉽게 풀이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님을 먼저 토로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이 부분을 ‘주관적 감성의 세계관 속에서 모색하는 토속적이고도 자생적인 구상화 작업’으로 풀이한다. 그의 작업이 그가 42세 때이던 1957년 〈창작미협〉의 창립했던 연혁 속에서 근원하고 있음을 안다. 오광수가 잘 설명하고 있듯이, 1957년 같은 해에 창립된 ‘〈모던아트 협회〉의 지성적인 형태의 해석’과 달리 〈창작미협〉은 감성적인 주제의 확대를 통해서 각각 근대적 조형 이념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대별된다.42) 
 즉 〈모던아트 협회〉가 근대적 서양화가 시도했던 색과 면 등 순수 조형요소에 대한 관심과 사물의 단순화 경향에 집착했다고 한다면, 〈창립미협〉은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발흥의 시대에 구상회화를 한국적 자생성과 토속성으로 실현하고자 한 회화 운동을 주도했다고 하겠다. 
마치 그것은 일본이 서양화를 수용할 때 일본적 주제와 감성을 통해 토착화를 시도했던 것처럼, 한국 역시 그러한 시도를 도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구체적으로는 해방 이후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한국적 미술에의 갈망을 〈창작미협〉이 한국적 자생의 향토적 주제와 감성을 통해서 유화라는 서구적 조형 언어를 토착화하려는 시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한국전쟁 중 미군정의 개입으로 인해 서구 미술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었던 분위기에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


X. 이봉상 회화의 토착화된 자연성과 환원적 자연주의
이봉상의 초기의 인상파적 사실주의, 나아가 야수파적이고 표현주의적인 구상, 일련의 상징적인 구상, ‘주관적 감성의 세계관 속에서 모색하는 토속적이고도 자생적인 구상화’는 몇몇의 인물화 외에 대개는 자연주의적 풍경들로부터 잉태한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구상 회화를 두고, “그것은 과거의 환상을 재생하거나 과학적인 형체의 추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단순화의 진행에서 오는 형태 순화도 아니며 어떠한 심볼리칼한 형태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43)라고 이야기하면서 ‘상상적인 세계관의 구체상’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관념적이거나 이지적인 구상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자연의 이미지와 주관적 감성의 세계관의 융합을 지향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작가의 주관적 감성이 맞닥뜨리는 전통의 자연주의적 실제 풍경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서울 근교의 풍경과 향토적인 풍물들이 그것이다. 

5/ 산, 1956, 193.9 × 81cm.
(그림5) 산, 1956, 193.9 × 81cm.
(그림6) 풍경, 1962, 97 × 127.3cm.

그가 서울에서 출생해서 일 년 정도의 일본 외유를 빼고는 작고하기까지 서울에 거주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서울 근교의 풍경들이 언제나 그에게 있어 화제(畫題)였음을 반영한다. 이러한 경향은 1956년 개인전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발현되었다는 평이다. 비평가 김영주는 그의 개인전에 대한 비평문에서 이전까지의 작업을 “리얼리즘에의 방법은 그것대로 의식은 있었으나 그 방법이 뒷받침은 인상적인 조형개념이었다는 것은 부인 못할 것이다”44)라고 비평하면서 다음처럼 이 개인전으로부터 슬럼프를 벗어나는 경지를 개척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씨는 이러한 슬럼프를 뚫고 나아갈 수 있는 전환의 계절을 이제 감각적인 형태 묘사와 구조적인 조형의 방법에 의해서 맞이한 성싶다. 말하자면 이념의 새로운 확립을 피하기 위하여 작업 의식을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의미에서의 비약이며 습성에 대한 승리를 또한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작가가 슬럼프에서 자기의 길을 탐구한 개문(開門)의 계기이기도 하다.”45) 결국 그러한 계기는 ‘형태와 조형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구성한 자욱이 뚜렷이 엿보이는데 불안한 구도이지만 설화성이 깃들어 있는 것’46)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분명 서울 근교의 친근한 자연들에서 느껴지는 설화성과 같은 토착화된 자연 탐구의 결과이다. 달리 말하면, 한 작가의 주관적인 감성이 대면하는 한국의 구체적 자연과의 만남인 것이다. 이 두 번째 개인전에 대한 정규의 단평 역시 이봉상이 주목하고 있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잘 드러낸다. 

“씨의 건조한 화면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산천을 연상한다. 까실까실한 작은 소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인정스럽게 둥그스레한 낮은 산과, 멀리 검푸른 비쭉비쭉한 들과 산, 드높게 푸르른 하늘, 물기 적은 기인 강줄기와 은빛으로 빛나는 백사장 – 어딘가 허탈한 듯한 정서- 그러면서도 거친 농부의 손길 같은 다정함이다.”47)

그렇다. 이봉상이 1964년 어느 날 회상하듯이, 서울은 그의 회화에 있어 언제나 주요한 화제이자 대상이었다: “생활에 젖고 환경에 젖은 지금에 와서는 서울이 내 고향이란 의식도 자랑도 없어졌으나, 역시 내 고향 서울을 들추어 얘기가 꽃을 피게 되면 흐뭇함을 면치 못하는 것은 소년과 같은 심정으로 돌아가는 까닭일거라, 역시 고향은 소년 시절과 더불어 느낄 수 있는 환각 그것이기도 하다. (중략) 그 시절만 하여도 내 고향의 범위는 다동(茶洞)과 안국동(安國洞)과 옥동(玉洞) 사이요, 여기를 왕래하는 것이었다. 자랑이 아니라 철이 나서 내가 화필을 들고 풍경을 더듬어 다니며 살펴보니 서울같이 변화 많고 아름다운 곳도 드물었다.”48)  


(그림7) 산-3, 1960, 105 × 10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림8) 산과 호수와 나무, 1962, 80 × 100cm.
(그림9) 가로수, 1958, 72.7 × 90,9cm, 홍순명 소장.
(그림10) 언덕, 1959, 45.5 × 53cm.


토착화란 “어떤 제도나 풍습, 사상 따위가 그 지방의 성질에 맞게 동화되어 뿌리를 내리게 되는”49) 상황화, 맥락화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봉상의 회화에서 서구의 조형 언어가 한국의 화가 이봉상이란 주체에 의해서 재맥락화는 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한국적 전통의 자연주의가 서구의 조형 언어가 만나 이루는 융합의 과정을 요청한다. 
김원룡(金元龍)이 한국의 전통적 미학에서 읽어내는 ‘자연주의’50)는 고유섭(高裕燮)의 ‘비정형성, 비균제성, 무기교의 기교’51)와 맞닿는다. 즉 ‘완성의 정도가 초월된 상태의 표현’인 비균제성(非均齊性)과 같은 성질이 한국적 자연인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자연주의는 형식적 외형미뿐 아니라 “민족이나 지역의 역사, 전통과 밀접하게 관련하여 나타난 의식, 풍습, 생활양태”52)를 의미하는 ‘토속성’과 같은 내적 의식마저 함유한다. 
한국의 전통적 미학인 자연주의가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 식민으로 인한 모화(慕華)사상 속에서도 무식(無飾), 무화(無華), 무교(無巧) 등의 토착화된 방식으로 우리의 미감을 창출하여 왔던 것처럼 이봉상의 회화에서도 이러한 토착화된 자연주의 미감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것은 서구의 조형 언어로부터 한국적 자연주의 즉 한국성을 찾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한국성이 한국의 지배적인 미의식이라 할 때, 미술에 있어 한국성은 미술 언어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념이다.” 53) 
이봉상은 이러한 한국적 자연주의 혹은 한국성을 그의 회화에서 어떻게 찾고 있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1960년대 초반의 서울 인근의 자연 풍경을 테마로 한 일련의 작품에서 나지막하고 비균제적인 산세와 형태, 나무들의 표현에 있어 다듬어지지 않은 무기교적 형태를 통해 서구의 텁텁한 유화의 조형 언어가 한국의 자연주의로 맥락화되고 토착화되는 미학을 창출한다. 특히 우툴두툴한 질감으로부터 한국의 황토색 가득한 땅들의 자연주의적 미를 주목한다. 
1962년 개인전 이후에는 이전 작품보다 보다 더 추상적 이미지가 확연해진다. 추상적 이미지에 덧붙이는 두툼한 질감 표현과 텁텁한 덧칠은 자연의 환원적 속성을 가시화한다. 따라서 그가 그리는 자연 풍경은 서울 근교의 자연으로부터 비롯되었음에도 한국적 전통의 자연미를 드러내는 보편적 자연으로 환원되기에 이른다. 즉 그가 탐구하는 한국의 구체적 자연이 지향하는 바는 다름 아닌 ‘환원적 자연주의’인 것이다. 그것은 그토록 경원시하던 추상에 대한 새로운 경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인간이 관계를 잇는 ‘환원 지향’의 만남의 미학인 것이다. 
작품 〈새〉(1961)을 보라! 그것은 날개를 힘껏 펼치는 한 마리의 새이기도 하면서 중력에 맞서 하늘로 자라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이기도 하다. 작품 〈나무〉(1959)를 보라! 그것은 나무숲 뒤로 떠오르는 태양을 이고 있는 자연의 풍경이기도 하면서 나뭇잎을 떨군 나무들을 감싸는 커다란 나뭇잎들의 환원적 풍경이기도 하다. 작품 〈가로수〉(1958)은 어떠한가? 마을 가운데 위치한 가로수들은 서로의 몸을 뒤섞고 타자들과 주체의 한 덩어리로서의 ‘환원적 자연주의’를 은유적으로 성취한다. 

(그림11) 망상과 궤변, 1966, 145.5 × 112.1cm, 유족 소장
(그림12) 새, 1961, 53 × 33.4cm, 개인 소장

특히 거의 추상화된 양식으로 전환해 간 그의 1960년대 말 회화는 종국의 그의 구상 회화가 추구하는 토착화된 자연주의가 ‘환원적 자연주의’의 정신에 근원을 두고 있음을 드러낸다. 말년의 작품에서 선보이는 일련의 〈미분화시대의 이야기〉(1966, 1967, 1968)라는 작품의 제목에서처럼 자신만의 독창적인 구상 회화를 통해서 자연의 환원적 속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작품  〈태고 때 이야기 3〉(1969)처럼 태고의 ‘환원적 자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림13) 검은 고양이, 1959, 68 × 79cm, 유족 소장
(그림14) 소녀와 고양이, 1962.
(그림15) 환(歡), 1962.


XI. 나오는 말
이봉상은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 당시 교양 수준으로 배우던 미술 교육으로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경성사범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스승으로부터 미술교육을 받았으나 전문적인 미술 전공 학생으로 받은 수업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했다는 당시의 시각54)이 과장과 오류만이 아닐 것이다.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였음에도 한국의 미술 현장을 독창적인 자신의 조형 언어로 이끌었던 훌륭한 작가로 여전히 평가하고 있다. 특히 당시 앵포르멜과 추상의 조형 언어가 유행이었던 모더니즘적 화풍의 물결 속에서 구상미술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천착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관적 감성을 실은 토속적이고도 자생적인 구상 회화’를 통해 ‘환원주의적 자연주의 미학’을 추구해 나갔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 세계는 여전히 높게 평가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는 이번 세미나가 열리는 2016년 현재, 그에 대한 평가 작업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필자의 검색과 연구에 따르면, 석박사 학위논문은고사하고, 학술지의 논문 한 편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사후 1972년 원색 33점, 흑백 15점의 작품 사진55)을 담아 출간된 『이봉상 화집』이 있어 그나마 연구에 작은 희망을 살리고 있는 상황이다. 아울러 그 화집에 실려 있는 글들-오광수 선생의 이론적 평문과 유경노 선생의 학창시절을 회고한 에세이, 박고석 선생의 화단 생활을 회고한 에세이, 이구열 선생의 상세한 작가 연보- 외에, 1976년 출간된 『이봉상-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에 실린 박래경 선생의 간략한 평문, 그리고 1985년 《이봉상 15주기 기념전》56) 카탈로그에 남은 윤범모 선생의 글들이 남은 글의 거의 전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편 당시 15주기 기념전에는 유족들이 소장하고 있는 70점 가운데 25점이 정선되어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57) 당시 1986년 준공 예정이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70점의 기증을 약속58)하면서, 연구자들에게 그에 대한 연구의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그림16) 미분화시대 이후, 1968, 91 × 91cm.
(그림17) 미분화시대 이후, 1968, 93 × 119.4cm, 유족소장

그러나 관련 텍스트는 여전히 많지 않다. 그 외에는 그의 개인전 당시 신문에 기고되었던 김영주 선생의 짧은 비평문, 잡지에 실린 작고 작가에 대한 단상, 각종 일간지에 짧은 기사들이 남겨져 있을 따름이다. 이봉상 선생의 생전 개인전도 3회로 매우 적고, 그마저 카탈로그에도 평문이 실리지 않고 희미한 도판들만 남아 있어 여러 가지로 연구에 어려움이 있는 형편이다. 다만 이봉상이 37세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던 비평문들이 신문과 잡지에 남겨져 있어 그의 생각을  읽어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일체 이봉상의 작품을 흩어지지 않게 보관해 온’59) 유족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연구는 시작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족에게 감사드린다. 아울러 몇 개 없는 화집조차 도서관에 없기는 매한가지인 상황에서 필자는 김달진미술연구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으로부터 너무나 감사한 도움을 받았다. 화집은 물론이고 스크랩되어 있는 각종 잡지와 신문의 기사들은 1970년 55세의 나이로 작고하고 만 한 작가의 자취를 좇아가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된 오광수 선생의 글을 비롯해서 적으나마 다른 몇몇 글과 정보를 남겨 주신 필자들과 김달진미술연구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작고 작가의 작품들은 꾸준하고도 규모 있게 탐구되어야 한다. 그것은 해당 작가 개인만을 위해서라기보다 오늘과 내일의 미술계를 위한 밑거름으로서도 필요한 것이다”60)라는 한 이론가의 언급처럼, 그에 대한 긴 호흡의 연구가 앞으로도 뚝심 있게 진척되어 나가길 기대한다. 이 글은, 앞으로의 추가적이고 후속적인 작가 연구를 위해서, 기초적인 자료를 수렴하고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함으로써 작가를 이해하기 위한 바이오그래피적 연구의 자료들을 추적하고 소개하는 일에 많은 부분 지면을 할애하였다.  
작품 세계에 대한 연구는 두 개의 장, ‘IX장, 이봉상의 구상주의 회화 – 상상적인 세계관의 구체상?’과 ‘X장, 이봉상 회화의 토착화된 자연성과 환원적 자연주의’에서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그런 면에서 정작 작품 세계와 작품론을 보다 더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일은 향후 과제로 남겨 두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울러 당시의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연구하던 친일 관련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평가는 처음부터 논외로 남겨 두었다. 이 부분들에 대한 연구는 후일에 보다 더 많은 사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과 병행하여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부족한 연구들을 토대로 또 다른 연구자로부터 이봉상 작가와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진중한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


(주석)
28) 전준자, 「작고 작가를 생각한다 –이상봉 선생」, 『미술춘추』, 7호, 1980. 
29) 이봉상, 작가의 말, 『이봉상-15주기 작품전』, 카탈로그, 가나화랑, 1985. 페이지 수 없음.  
30) 박고석, 위의 글, 1972, p. 28.
31) 이구열, 위의 글, 1972, pp. 18-20.
32) 오광수, 위의 글, 1972, p. 9. 
33) 이봉상, 「구상미술과 미술계의 방향- 구상작가의 입장에서」, 『공간』, 11월호, 1967.
34)《신문화 60년 기념 미술세미나 - 신미술 60년과 오늘의 문제점》, 한국미술협회, 1968. 10. 26. 
35) 이봉상 3회 개인전, 신세계화랑, 11, 24-12. 1. 
36) 박고석, 위의 글, 1972, p. 29.
37) 이봉상, 『공간』, 1967. 11월호, 재인용. 『이봉상-15주기 작품전』, 카탈로그, 가나화랑, 1985. 페이지 수 없음
38) 박래경, 「이봉상의 예술-상상(想像)적인 세계관의 구상화(具象化)」, 『이봉상』,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 14, 금성출판사, 1976. 페이지 수 없음 
39) 박래경, 위의 글, 1976. 
40) 박래경, 위의 글, 1976. 
41) 이봉상, 『공간』, 1967. 11월호, 재인용. 『이봉상-15주기 작품전』, 카탈로그, 가나화랑, 1985. 페이지 수 없음.
42) 오광수, 위의 글, 1972, p. 10.
43) 이봉상, 위의 글, 1967.
44) 김영주, 「전환기의 작가의식」, 『신미술』 2호, 1956. 
45) 김영주, 위의 글, 1956.
46) 김영주, 위의 글, 1956.
47) 정규, 「전시평」, 『동아일보』, 1962. 10. 9. 위의 가나화랑 카탈로그, 1985에서 재인용. 
48) 이봉상, 「에세이」, 『여성』, 2월호, 1964. 위의 가나화랑 카탈로그, 1985에서 재인용. 
49)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1999.
50) 김원룡, 『한국미의 탐구』, 열화당, 1978, pp. 139-140.
51) 고유섭, 『한국미술사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及美學論巧)』, 통문관, 1979, pp. 4-11.
52) 최태만, 「한국미술에 있어서 토속성과 원시성의 문제」, 『프리미티비즘 전』, 세미나 자료집, 모란미술관, 1995, p. 5.
53) 김숙경, 「접목과 뿌리-한국미술에 접목된 서양예술의 뿌리는 무엇인가」, 신춘문예 가작당선작, 『동아일보』, 1989.
54) 편집기자, 「못다 사르고 간 의욕-이봉상 하백 유작전」, 『서울신문』, 1970. 11. 11. 
55) 편집기자, 「변화 있는 40년」, 『서울신문』,  1972. 6. 30. 
56)《이봉상 15주기 기념전》(1985. 6. 1-6. 8, 가나화랑)
57) 편집기자, 「이봉상화백 추모전-유족 소장 25점 처음 공개」, 『한국일보』, 1985. 5. 31. 
58) 편집기자, 「이봉상화백 15주기 맞아 유작전 –전시 후 70여 점 국립미술관에 기증」, 미술화제, 『중앙일보』, 1985. 5. 31. 
59) 이호재, 「인사말」, 『이봉상-15주기 작품전』, 카탈로그, 가나화랑, 1985. 페이지 수 없음.  
60) 윤범모, 「서문」, 위의 글, 1985.

출전 / 김성호,「이봉상의 구상 회화에 나타난 환원적 자연주의」 , (이봉상 작가론), 『미술평단』, 121호, 여름호, 2016, pp. 4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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