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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일반│부산비엔날레의 글로벌 신진작가 발굴에 관한 과제

김성호

부산비엔날레의 글로벌 신진 작가 발굴에 관한 과제

김성호(미술평론가)



I. 들어가는 말
II. '다중심 패권주의' 시대의 부산비엔날레 
III. 제도 안에서 탈제도를 추구하는 비엔날레의 위상과 부산비엔날레의 위치
IV. 부산비엔날레의 신진 작가 발굴에 대한 기대
V. 소수성을 견지하는 글로벌 신진 작가 
VI. 무명작가와 글로벌 신진 작가를 위하여_내적 발굴과 외적 지원  & 외적 발굴과 내적 지원
VII. 나오는 말, 


I.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짝수년도는 가히 '비엔날레의 해'라 할만하다. 인구 5100만의 작은 나라에서 국제아트이벤트를 지향하는 비엔날레는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등의 덩치 큰 비엔날레와 더불어 특정미술 장르를 특화시킨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 《창원조각비엔날레》에 이르는 군소비엔날레에 이르기까지 글로벌을 지향하는 아트이벤트들이 넘쳐난다. 게다가 2013년에 열렸던 《광주디자인비엔날레》,《청주공예비엔날레》,《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등을 포함하면 한국의 국제미술행사는 가히 선도적이라 할만하다. 이들 비엔날레는 해를 번갈아가며 저마다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새로이 단장한 자신의 모습들을 야심차게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왜 이렇게 많은가? 한국의 선배 세대들이 벌여놓은 비엔날레들을 후배 세대들이 다듬어가야 할 무수한 과제들 앞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이 무엇인가? 오늘날은 '서구 중심의 패권주의'를 벗어나는 '탈중심의 패권주의'이기보다는 그것을 나눠 갖는 '다중심 패권주의' 시대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올해의 《부산비엔날레》는 주류와 제도권으로부터 언제나 탈주하려고 시도하는 오늘날의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는 과제에 있어 문제가 없는가? 이 글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글로벌 신진 작가'라는 조금은 거창하지만 오늘날 당면한 개념 속에서 하나둘 찾아 나가볼 것이다. 






II. 다중심 패권주의 시대의 부산비엔날레 
오늘날은 바야흐로, 비서구 국가들이, 오랫동안 문화권력의 중심이기를 자처해온 서구를 밀어내고, '우리도 중심이다'를 외치는 '다중심 패권주의'의 시대에 들어선 듯하다. 생각해보라, 서구에서 비엔날레 역사는 스스로가 언제나 중심임을 외치는 패권주의의 연속이었다. 최초의 국제아트이벤트인 《베니스비엔날레》가 그러하지 않은가? 이탈리아 국왕의 결혼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웃나라들의 네트워크를 감행하는 《베니스비엔날레》를 출발시켰다고 하니, 서구 비엔날레의 첫출발은 패권주의에 대한 선언이나 다를 바 없었다고 할 것이다. 아울러 《베니스비엔날레》가 이탈리아의 관광수입의 물꼬를 트기 위해 기업인들을 대거 예술가 후원의 취지로 끌어들였다든가, 그 운영방식조차 당시의 ‘만국박람회’를 흉내 내었다는 것은, 당시 글로벌 문화권력을 통해 세계의 문화시장을 선점하려는 서구식 패권주의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반증이다. 1)  이러한 초기의 《베니스비엔날레》나 《카셀도큐멘타》역시 유럽의 세력 규합에 집중하면서 자신들이 지켜온 문화중심의 위치를 끝까지 고수하려는 패권주의를 드러낸다. 1970년대 연이은 호주의 《시드니비엔날레》, 미국의 《휘트니비엔날레》, 독일의 《뮌스터조각프로젝트》는 당시의 유럽과 미국의 위상을 강화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 지금은 사라진 파리비엔날레 역시 미국으로 빼앗긴 문화예술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서구의 문화권력 중심의 지위를 차지하고자 '1951년 이른 시기에 출발 시동을 걸었던 브라질의 《상파울루비엔날레》나 이를 이어 1968년에 출발선에 자리를 잡았던 《인도트리엔날레》는 내내 우리들에게 회자되는 제3국의 모델이다. 그러나 전자는 다분히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을 남아메리카 지역에 소개하는 창구 역할에 매몰되었거나 후자는 별다른 이슈를 생산하지 못한 채 지나치게 인도의 지역적 정신성에 탐닉하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는 비판을 벗을 길이 없어 보인다.' 2)
 물론 오랜 역사만큼이나 시행착오를 거친 《상파울루비엔날레》는 1990년대 이후로 브라질의 역사적 문맥 위에서 비엔날레를 운영하면서, 서구 중심의 문화구조를 일정부분 극복하고 있다고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이르러, 제3국인 아시아 태평양지대와 아프리카 지역의 ‘중심에 잠입하고픈 욕망’은 신생 국제아트이벤트의 확산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한다. 제3국의 경제적 부상과 서구 지배이데올로기의 퇴조 현상이 맞물려 이들의 문화적 탈중심화 노력들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다분히 정치 전략적 취지로 잉태한 《방글라데시비엔날레》(1981~ )나 쿠바의 《아바나비엔날레》(1984~ )의 생성은 서구가 주도하는 문화권력을 탈중심화하기 시작하는 일련의 시도로서 간주되었다. 또한 자신의 색을 찾아가는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최근 변모와 더불어 1990년대 이래 등장한 아시아 지역의 《광주비엔날레》,《상하이비엔날레》,《타이뻬이비엔날레》나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 기치를 비엔날레에 녹인 《요하네스버그비엔날레》의 약진은 괄목한 것이었다. 《요코하마트리엔날레》, 《후쿠오카트리엔날레》는 역시 차별성을 강조하는 국제아트이벤트로 거듭나기를 시도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아시아 지역의 탈중심주의는 자국 내의 수도권 중심주의마저 이탈하면서 변방에서 글로벌을 도모하는 용기마저 가능하게 만들었다. 1981년《부산청년비엔날레》로 출발한 이래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2002년 비로소 탄생했던《부산비엔날레》3)는  다른 아시아의 비엔날레처럼 이러한 '로컬'에의 관심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국가 안에서 다중심으로 분권화되는 일련의 문화적 결과물들, 즉 지방 도시 중심의 《광주비엔날레》, 《상하이 비엔날레》나 《후쿠오카 트리엔날레》,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등의 국제미술행사처럼, 《부산비엔날레》도 자국 내의 수도권 중심의 문화 위상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로컬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등장한 것이다. 물론 서구에 대한 비서구 혹은 제3국이라는 로컬의 위상으로 확장하면서 말이다. 
이제 1980년대 이후 비서구의 문화 탈중심주의는 1990년대에 이르러 문화 권력의 ‘서구 중심 패권주의’로부터 탈주하여 모두가 중심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문화 권력의 ‘다중심 패권주의’를 정초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서구, 비서구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전지구적 다중심 패권주의’의 궤도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아직은 작지만《부산비엔날레》역시 이러한 '다중심 패권주의'의 주역이라 할 것이다. 

III. 제도 안에서 탈제도를 추구하는 비엔날레의 위상과 부산비엔날레의 위치
주지하듯, 미술인들이 기대하는 비엔날레란 미술관, 갤러리 등 제도적 기관에서의 형식적이고 관행화된 전시시스템을 탈피하는 탈제도의 이상을 추구한다. 즉 제도 안에서 탈제도의 위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2014광주비엔날레》의 총감독 제시카 모건(Jessica Morgen)이 비엔날레의 역할을 '지배적인 문화정책과 전통과 유산을 중시하는 일반전시와 다르게 비엔날레는 유동적이고 유연하며 즉각적이고 동시대적이고 주제에 초점을 맞춰 창조적 표현의 스펙트럼 제공이 가능하다'4) 라고 했던 발언은 이러한 비엔날레의 위상을 반증한다.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의 '비엔날레 미술관 전시의 차이점은 뭔가. (중략).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되는 것이 비엔날레 정신이다.'5)라는 언급 역시 비엔날레 본유의 정신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이것은 '전시의 커뮤니케이션과 미술관의 커뮤니케이션, 즉 문화적 커뮤니케이션과 제도적 커뮤니케이션(entre communication culturelle et communication institutionnelle) 논의의 구분'6)과 차별점이 분명히 존재함을 선언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2014년 로컬을 중심으로 글로벌을 도모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2개의 비엔날레의 주제는 대비적이다. 제시커 모건(Jessica Morgen)이 감독한 《광주비엔날레》는 창설 20주년을 맞는 해인만큼, '창조적 파괴와 새로운 출발'7)이라는 의미의 '터전을 불태우라(Burning Down the House)'라는 주제를 제시했고, 올리비에 케플렝(Olivier Kaeppelin)이 감독을 맡은《부산비엔날레》는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예술가의 의지가 표현되는 전시' 8)를 꾸리기 위해서 '세상 속으로(Inhabiting the World)'라는 주제를 제시했다. 양자 모두 '세계를 대면하고 인식하는 미술가들의 시선'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는 하지만 전자는 다분히 파격적이고 혁명적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온건적이고 보수적이다. 비엔날레의 위상이 제도권을 탈주하는 전시의 패러다임 속에서 실현된다고 할 때, 전자는 비교적 이러한 본연의 위상을 잘 수렴했다고 한다면, 후자는 이미 제도화되어 버린 비엔날레의 전형을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러 재난과 사회·생태학·재정학적 위기 등에 봉착했을 때 예술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9)는 2014《부산비엔날레》의 기획 의도는 가장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예술에 대한 윤리적 미학을 제시하고 있지만, 늘 새로운 실험과 태도를 보려고 하는 미술인들의 눈에는 함량미달일 수 있다. 전시감독 선임의 문제로 불거진 일련의 소란스러운 비엔날레 보이콧 운동10)들을 거치면서 뒤늦게 감독이 선정되었던 사실11)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준비기간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 글에서 유념할 것은, 논의의 핵심이 '제도 안에서 탈제도를 추구하는 비엔날레 본연의 위상'을 제도 속에서 하나의 장치로 고착화되어가는 '최근 《부산비엔날레》 현장'에 대입시켜 '위상은 이러한데, 실제는 왜 그런가?'라며 따져 묻는데 있다. 물론 위촉된 감독에 의해서 비엔날레의 주제와 지향할 바는 언제나 새롭게 제시될 수 있다. 게다가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혁신적이기조차 한 주제는 행사 20주년을 기념하는 당위적 의미 아래에서 광주에서의 비엔날레 본유의 정신을 되살린다는 취지하에 기획된 것이고, 《부산비엔날레》의 해당 주제는 그러한 기념할만한 특별한 사건이나 당위적 의미론으로 구속할만한 것이 없었기에 일정부분 감독의 자유로운 전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겠다. 다음 《광주비엔날레》가 이처럼 '창조적 해체'와 관련한 주제를 또 제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감독에게 강제할 사항이 아니다. 또한 다음의 《부산비엔날레》가 그러한 주제를 제시할 수도, 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건은 한해의 비엔날레 주제가 위촉받은 외부의 감독의 전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차별화된 비엔날레의 장기적 방향성을 마련하는 일은 비엔날레 내부 즉 비엔날레재단, 조직위 혹은 운영위에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올해 감독 선정 파행을 야기한 《부산비엔날레》에서는 최근 (사)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가 '오는 12월까지 조직개편, 운영위원장·전시감독 선임 방법, 운영위원회 구성 방법, 임원회의·운영위원회의 권한과 의무 등을 확정하기로 했다.'12)고 밝히고 있지만, 구습과 관성을 탈피하기 위해 비엔날레의 뼈를 깎는 혁신, 그것을 통해 '《부산비엔날레》의 탈제도의 위상'을 바라는 미술인들의 기대에 부응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IV. 부산비엔날레의 신진 작가 발굴에 대한 기대
2014 《부산비엔날레》에 대한 미술인들의 불만을 산 것은, 감독 선정에 따른 파행 뿐 아니라 선정된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케플렝의 자국 출신 작가들의 대규모 선정에 이르는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77명 중 3분의 1이 넘는 26명이 전시감독과 국적이 같은 프랑스(프랑스령 포함) 출신 작가'13)이거나 '본전시에 참가하는 10명의 한국 작가들조차 대다수가 프랑스에 거주하는 재불 작가이거나 프랑스 유학 및 연수 출신'14)이라는 점은 아무리 작가 선정에 관한 전권이 전시감독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참여 작가의 분포면에 있어서 비판의 여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항간에서는 '《부산비엔날레》가 《프랑스비엔날레》가 되었다'는 비판마저 들린다. 
우리는 여기서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Harald Szzeman)이 5회 《카셀도큐멘터》(1972), 4회 《리옹비엔날레》(1997) 등을 기획하고 2회 《광주비엔날레》(1997) 커미셔너를 역임하는 등 '국제미술행사에 독재적 위치를 점유하면서부터 세계의 미술현장을 획일화시켜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15)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997년 4회 리용비엔날레 총감독과 같은 해 2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일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다른 주제임에도 5명의 동일 작가를 중복 출연'16)시켰는데 이렇듯 국외의 유명 큐레이터가 친분이 있는 한정적인 작가풀을 지속시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유명 큐레이터가 제한된 정보를 통해서 자신이 선호하는 작가들을 중복 출연시키면서 만들어지는 스타시스템을 후배 큐레이터들도 답습하게 되면서, 특정 작가 몇몇이 비엔날레에 단골로 등장하는 스타작가가 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신진 작가들의 등장은 어떠한가? 올해의 《광주비엔날레》는 주제가 주제인 만큼, '작가의 90%가 비엔날레에 처음 참여하는 작가'17) 
 또는 90% 이상의 신진 작가들18)로 구성되었다. 반면에 《부산비엔날레》에서는 신진 작가가 포함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전시감독 올리비에 케플렝은 '(주제와 관련된) 관심사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와 작품들, 이미 잘 알려진 중요한 작품들과 작업 과정들에 관해 클로즈업 할 것' 19)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그의 기획에 있어서 신진작가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예술의 문제는 단순히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력의 적합성에 관한 문제'20)라는 견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진 작가 발굴의 차원을 별반 고려하지 않는 발언이라고 할 것이다. 《부산비엔날레》가 광주비엔날레와의 차별화의 과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21)  상황은 2012년에도 지적된 일이고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게다가 신진 작가 발굴에 대한 필요성과 그것의 개선에 대한 과제는 이전 비엔날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신진 작가란 과연 어떤 이들인가? '나이가 젊은 작가, 또는 전시 경력이 일천한 작가, 비엔날레에 소개된 적이 없는 작가, 무명의 작가'와 같은 답변이 모두 해당될 수도 또는 어떤 답변만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신진 작가가 단순히 '나이가 젊은 작가'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신진 작가는 사전적 의미대로 '화단에 등단한지 얼마 되지 아니한 작가'이다. 신진작가는 나이가 많든, 적든, 제도권 안에서의 작품 발표가 많든, 적든 간에 대중과 미술현장에 있어 '거의 새로운 얼굴'이다. 
그렇다면 '신진 작가 발굴'이라는 논의를 펼치기 위해 신진 작가의 개념을 어떻게 고찰해야 될 지를 고민해보기로 한다. 신진 작가에 대한 정의는 여럿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대개의 비엔날레에서 그들은 감독 혹은 큐레이터로부터 초대를 받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대개 큐레이터가 비엔날레에서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내기 보다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작가를 찾아나서는 이유는 신진 참여로 인한 모험을 줄이고자 함이다. 달리 말해 이른바 '검증받은 작가'로 분류되는, 비엔날레 참여 경험이 많은 작가들과 함께 일함으로써, 자신의 전시기획을 안전지대 위에 올려놓고 싶은 까닭이다.22) 
그러나, 기획자가 신진 작가 발굴에 눈을 감아버릴 경우, 매번 비슷비슷한 작품들만이 다수의 비엔날레의 전시장을 점유하면서 획일화된 전시 유형을 반복시키는 위험을 자초하게 된다. 즉, '아서 단토(A. Danto)의 지적처럼 오늘의 비엔날레가 점차 관광상품처럼 도식화되고 메뉴의 차별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23)는 비판 앞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될 것이다. 

V. 소수성을 견지하는 글로벌 신진 작가 
그런데 왜 '글로벌 신진 작가'인가? 그것은 '세계 도처에 숨어있는 신진 작가로 독자적인 미술언어를 지니고 있는 마땅히 발굴되어야만 할 작가'를 지칭한다. 그들은 트렌드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익숙한 미술 경향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독창적인 작가들로 세계 도처에 묻혀있는 《부산비엔날레》가 유념해야 할 신진 작가들이다.   
그들은, 아서 단토(Arthur C. Danto)가 이제는 예술을 어떠한 거시적 내러티브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 선언했던 '역사종말 이후의 시기' 혹은 '역사후기(post-historical)의 시기'24)이자,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창적인 작업들을 진행하는 존재들이다. 또한 그들은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미술 무가치를 노래하는'25) 이 시대에도 여전히 가치를 생산하는 작가들로 존재한다. 달리 말해 예술의 '미적 포화상태가 오히려 미술의 종말의식을 일깨우는 것'26)으로 역설하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증명되곤 하는 이 시대에도 예술의 가치를 신봉하며 자신만의 작업세계에 천착하는 '신진 작가'는 세계 도처에 숨어있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너무나 많은 예술이 있기 때문에 예술이 죽는다고 했지만27)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예술이 도처에 살아 숨어있을 가능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중에는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작가들도 있을 것이며, 작고 후에 새로이 조명된 작가들도 있다. 물론 이러한 신진의 시대를 거쳐 현재는 유명해진 작가들도 없지 않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작가들 중에서 다수의 작가들이 한때는 '신진 작가'였음을 기억할 일이다. 그들이 신진일 때, 그는 주류로부터 탈주하면서 아방가르드를 실천하는 존재들이었다. 그 비주류의 아방가르드가 오늘날 이미 주류의 세계로 편입했지만 말이다. 
필자는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et Felix Guattari)의 소수문학(litterature mineure) 논의로부터 소수자 개념을 빌어, 여태껏 발굴되지 않고 있는 '글로벌 신진 작가'를 '소수성의 작가' 혹은 '소수 작가'(artist mineure)로 정의하려고 한다. 이러한 개념을 역으로 말하면, 《부산비엔날레》가 발굴해야할 '글로벌 신진 작가'는 '소수 작가' 지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 작가'가 무엇인가? 그것은, 들뢰즈가 카프카의 문학에서 발견했듯이, 이른바 대가(大家)들의 다수 문학(litterature majeure)의 정형화된 글쓰기로부터 탈주하는 소수 문학(litterature mineure)의 비정형화된 글쓰기를 실행하는 주체를 지칭한다. 즉 언어를 동질화시키고 통일시켜내는 권력과 지배의 다수 언어(langue majeure)를 피지배 언어인 소수 언어(langue mineure)로 대치시키는 작업28)을 실행하는 주체이다. 표준이라는 척도로 형성된 권력과 지배적 담론의 다수 언어를 변형시켜 이질적 변수들을 가지는 자신들의 언어로 만들어낸 작업을 하는 이들이다. 들뢰즈가 파악하는 소수문학은 이러한 빈곤한 소수언어의 강도 높은 사용을 통해 다수의 언어를 갉아먹고 결국 그것을 변형, 해체함으로써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탈영토화'29) 하게 되는 '소수적 글쓰기'에 이르게 된다. 들뢰즈는 그 예로 조이스와 베케트가 아일랜드 영어를 탈영토화하거나 카프카가 프라하의 독일어를 탈영토화하는 과정30)을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조이스가 패러디, 속어, 모국어 의성어까지 혼합하며 풍부하게 하려는 풍요화의 태도로 언어를 탈영토화시켰다면 베케트나 카프카는 자발적인 언어적 금욕주의를 통해 빈곤화의 태도로 그것을 탈영토화시킨다. 즉 그들이 '언어의 탈영토화의 과정을 강도들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밀고 나간다' 31)고 해석이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생각해보라. 들뢰즈의 '소수 문학' 혹은 '소수 언어'로부터 확장하는 우리의 '소수 작가' 개념은 은어, 속어, 방언, 비표준, 비문법성 등의 비주류 언어들로 주류를 탈영토화하는 존재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시각예술의 영역에서, '글로벌 신진 작가'란 미술사의 선형적 흐름으로부터 탈주하는 탈영토화와 더불어 주류 미술에 대한 방언과 비문법을 실천하는 '소수 작가 지향성'을 견지한 존재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나이가 젊은 작가'를 지칭하기보다는 '작업 정신이 젊은 작가' 혹은 '주류의 체계에 물들지 않은 작가'라 할 것이다. 이들은 트렌드와 형식화된 유형들을 벗어난 채로 나이가 들어갈 수 있는 잠재적 미래를 보장하는 이들이라 할 것이다.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업 정신이 오염되고, 주류에 편입된다고 할지라도, 현재까지는 그렇지 않은 작가들을 우리는 '신진 작가'라 부를 수 있다. 더불어 세계 도처에서 각기 다른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지금까지 익히 알려진 것과는 다른 태도와 방식으로 실천하는 이들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면서, 우리는 '글로벌 신진 작가'라 이름을 붙이기로 한다. 

VI. 무명작가와 글로벌 신진 작가를 위하여_내적 발굴과 외적 지원 & 
    외적 발굴과 내적 지원 
여기 무명작가와 글로벌 신진 작가가 있다. 이들은 다른 이름의 다른 사람들이다. 전자가 앞서 언급한 다수의 조형 문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답보 상태의 존재라면, 후자는 다수성으로부터 탈주하는 소수성을 발휘하는 존재이다. 둘 다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무명의 상태'는 같지만 질적 면모에서는 확연하게 다른 존재인 것이다. 
후자의 글로벌 신진 작가를 어떻게 《부산비엔날레》가 발굴해나가야 할까? 
한국의 여타 비엔날레가 추구하는 신진 작가 발굴 프로그램이 《부산비엔날레》는 《아시안 큐레토리얼》전을 기획할 신진 큐레이터 발굴 프로그램32)으로 대체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 프로그램은 다분히 신진 큐레이터를 통한 신진 작가 발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읽힌다. 그렇지만, 네트워크 구축에 있어 경험이 부족한 신진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멋진 주제는 실천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초대 작가 선정에 있어서 '글로벌 신진 작가'의 초대 가능성 자체는 의문이다. 특히 이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 일본 요코하마,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의 항구도시에서 활동하는 젊은 큐레이터들이 함께 전시를 기획'33)한다는 점에서 각국에 거주하는 신진 작가들을 섭외할 수는 있을 터이지만, 그것이 그저 자국 내 기획전을 한데 연합시켜놓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경계할 지점이다. 특히 '포럼에 참여한 ‘상하이비엔날레’, ‘요코하마트리엔날레’, ‘싱가폴비엔날레’에서 추천된 신진큐레이터와 ‘《부산비엔날레》’에서 공개모집을 통해 2명의 신진큐레이터를 공동기획자로 선정'34)하려는 불균등한 큐레이팅 선정방식도 문제이지만, 한국의 2인 공동기획자 선정의 공지는 결국 1명 선정으로 결정됨으로써, 이번 비엔날레에서 보여준 공동감독제와 관련한 잡음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게다가 9월 전시를 위해 4월에 신진 큐레이터 공모 마감을 한다는 일정은 위험하기조차 하다. 문제는 비엔날레의 다양성을 위해 그저 생색내기용으로 끼워 넣은 특별전 프로그램 이상의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는 점이다.  
2014 《광주비엔날레》의 경우는 지역 내 작가를 대상으로 하여 ‘2014광주비엔날레 포트폴리오 공모’제를 진행했고, 2명의 작가 박세희(29) 최운형(38)35)를 최종 선정해서 본전시에 참여시킨다. 39개국 106작가(115명)의 참여 작가들36) 중 한국작가가 22명인 것을 감안하면, 이 프로그램 자체가 주요한 영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본전시에 지역 출신 작가를 일정부분 참가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무척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2년에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최미연, 조현택, 로이스 응 총 3인의 작가가 본전시에 참여하고,37)  ‘비엔나쏘세지클럽’ 8인 작가의 작품을 광주 '예술의 거리'에 있는 빈 집에서 게릴라성 전시를 지원38)하는 등 광주 및 전남 지역 출신 신진작가에 대한 다양한 행사를 구성한 바 있다.  
또한 작년에 열렸던 ‘2013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는 본전시를 공개경쟁에서 ‘국제지명공모전’으로 전환하여 참여 작가를 선발한 바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핫루키즈(Hot Rookies)라는 이름의 신진 작가 등용을 위해 마련한 특별전에서는 포트폴리와 이력을 종합적으로 심사하는 공개경쟁을 통해 작가를 선발했다.39) 
한편, 2014《대구사진비엔날레》의 경우 1993년부터 시작된 '2014국제젊은사진가전'을 전시의 한 섹션으로 참가시켜 신진 작가에 대한 지원을 잊지 않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젊은 작가를 발굴하고 해외 사진계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는 ‘2014 포트폴리오 리뷰'40)는 2008년부터 시작하여 국제 사진계에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작가 발굴 프로그램이다. 국내외 유명 사진 전문가 30여 명으로 구성된 리뷰어와 70여 명의 사진작가들이 참여하여 진행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포트폴리오 리뷰를 통해 선정된 우수작가는 ‘2015휴스턴 포토페스트 발견'전에 초대 전시되고 또 다른 우수작가는 이곳의 포트폴리오 리뷰에 초대된다는 것이다.41) 바로 이 글에서의 우리의 논의인 '내적 발굴과 외적 지원'이 함께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렇다. '비엔날레는 특정 주제를 가지고 작가들이 일회성으로 동원되는 행사'42)일 뿐 작가 지원 프로그램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역적 맥락과 연계되어 문화지형도를 그려나가야 할 막강한 책무가 있는 비엔날레는 차별화된 자신만의 비엔날레 전략을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데, 이 가운데에서도 방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신진 작가 발굴에 관한 책무이다. 특히 수도권 중심의 미술현장의 재편으로부터 지역의 목소리를 담은 미술현장을 가꿔나가기 위해서는 지역으로부터 발굴되어 세계의 미술현장에 소개되는 이른바 '내적 발굴과 외적 지원'이 지속적으로 펼쳐져 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관건은 여기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진 작가 발굴을 전체 행사의 구색 맞추기 식으로 풀어나가는 것은 건강한 비엔날레 발전을 위해서는 곤란한 일이다. 앞서 우리가 '글로벌 신진 작가'의 소수적 정체성을 언급한 바 있듯이, 글로벌 신진 작가는 무명이지만 세계미술현장에서의 또 다른 주역이 될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이들이 새로운 현대미술사를 써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책무가 여기 《부산비엔날레》에도 남겨져 있다. 특히 신진 작가에 대한 '내적 발굴과 외적 지원'은 고사하고 '내적 발굴'조차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운 올해의 《부산비엔날레》는 이것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것에 대한 고민이 가시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전제될 때, 더 나아가 역량 있는 '국외 신진 작가들'을 《부산비엔날레》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활동하도록 영향을 미치는 '외적 발굴과 내적 지원'이라는 장기적 비전에 따른 전략 부재에 대해서도 필히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한국에 위치한 아직은 작은 《부산비엔날레》가 '외적 발굴과 내적 지원'에 대한 현재는 부재한 책무를 느린 걸음이지만 내실 있게 하나 둘, 실천해나갈 때 《부산비엔날레》의 미래는 밝다고 할 것이다. 

VII. 나오는 말
비엔날레가 아무리 '설정된 주제에 따라 작가들이 동원되는 임시적 행사'라고 할지라도 여기에는 지역사회와 세계의 미술현장이라는 맥락에 위치한 일련의 공적 책무를 방기할 수는 없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국가 내부에 존재하면서도 국가적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만큼의, '제도 안에서 탈제도'를 추구하는 비엔날레 본연의 위상을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비엔날레 정신이 언제나 중심과 주류로부터의 탈주를 자유롭게 감행하는 것을 독려하듯이, 《부산비엔날레》의 조직위는 이러한 탈주의 주체적 세력이 될 신진 작가 발굴에 대한 정책적 고려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부산비엔날레》는 신진 큐레이터 등용 프로그램을 통해 신진 작가 발굴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것의 초점은 신진 작가에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광주비엔날레》,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의 신진 작가 발굴 프로그램들을 고찰하면서 《부산비엔날레》의 역할을 고찰했는데, 비교대상이 된 다른 비엔날레의 예들은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게다가 이러한 프로그램들 역시 지속적인 자기 성찰과 비판을 통해 시행착오를 극복하면서 다듬어나가야 할 부분이다.  
관건은 《부산비엔날레》의 신진 작가 발굴에 대한 책무라는 것이 '내적 발굴과 외적 지원'의 차원 뿐 아니라 '외적 발굴과 내적 지원'의 방향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음을 검토하는 일이다. 특히 이 글에서 세계 도처에 있는 '글로벌 신진 작가'의 개념을 주요하게 고찰하고 있는데, 이러한 차원에서 국외의 신진 작가를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부산비엔날레》의 위상을 높이는 '외적 발굴과 내적 지원'의 방향성은 매우 주요한 사항이다. 그것이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필히 그것의 실천이 검토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 글은 《부산비엔날레》의 신진 작가 발굴에 대한 책무와 과제들만 언급할 뿐이다.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은 《부산비엔날레》의 몫이다. 그것이 국제경쟁의 공모 방식이든, 각국 기관의 협업 방식이든, 또는 부가적인 특별 프로그램의 형식이든, 《부산비엔날레》만의 독특한 현실적 맥락에 대한 연구 속에서 그 구체적인 전략들이 연구되어야만 할 것이다. 
오늘날의 '다중심 패권주의'의 시대에 주역이 될 《부산비엔날레》가 현재의 어려움을 딛고 미래적 비엔날레의 상을 만들어나가는데 있어서, 우리의 논의의 중심인 신진 작가 발굴에 대한 정책적 쇄신을 장기적 비전 아래 한 단계씩 발전적으로 성취해나가길 기대한다.  ●

(주석 생략)

출전 /
김성호,「부산비엔날레의 글로벌 신진작가 발굴에 관한 과제」, 『패널 디스커션- 세상 속에 거하는 미술과 비엔날레』, 자료집,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2014. 9. 21. 쪽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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