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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 | 이탈 / 신의 사랑과 인간 평화의 시공간

김성호

이탈 작가론
신의 사랑과 인간 평화의 시공간
  
김성호(미술평론가)


I. 역설의 시작-천박한 고깃덩어리

이탈은 퍼포먼스, 설치, 비디오아트, 키네틱아트 등 다매체의 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필자의 눈에는 이 천재 같은 작가가 세상에 묻혀 있는 상황 자체가 신기할 정도이다. 그는 한국미술 현장뿐 아니라 세계미술의 중심에 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는 세계를 대면하면서 지금껏 경험한 자전적 경험들을 직관적 태도로 수렴해서 날것의 육질의 언어로, 때로는 자폐적인 지성의 언어로 자신의 작업을 펼쳐왔다. 그것은 세련된 치장을 도모하고 정연한 조형 개념을 제시하는 오늘날 다수의 현대미술가들의 작위적인 방식과는 분명코 다른 지점이다. 그렇다! 그의 작업에는 천박하리만큼 생짜의 무엇이 꿈틀댄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작업을 “인간의 분류는 신을 처형한 이후에 가능하다”는 말로 정의한다. 그것은 역설이다. 인간의 분류를 위해서 ‘처형할 수 없는 신을 처형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분류가 자행되고 있는 오늘날 현실에서 ‘신의 절대적 존재의 품’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즉 ‘신이 죽었을 때(혹은 없을 때)’에나 가능할 것 같은 상황들이 지천으로 발생하고 있는 오늘날 현실에서 인간을 ‘있는 자/없는 자’, ‘지배자/피지배자’ ‘다수자/소수자’ 등으로 위계화시키지 말자는 작가의 비판적 주장인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 주제의 시작을 위해서 이탈은 인간을 ‘벌거벗은 동물적 몸’으로 표현한다.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날것의 몸뚱이로서의 존재는 평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1994년 그가 겪은 강렬한 시각적 체험에 기인한다. 고속도로 위에 피가 낭자하게 흘러 어지럽게 시체들과 함께 흩어져있는 참사의 현장을 목도한 것. 그것은 사육용 돼지를 싣고 가던 트럭의 전복사고로 인해, 죽거나 다친 돼지들의 몸으로부터 터져 흘러나온 피와 살점들의 흥건한 널브러짐이었다. 그는 이 참혹한 대참사를 어떠한 뉴스에서도 접할 수 없었다. 만약 이것이 인간의 죽음이었다면? 

“인간은 저 동물들과 하등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은 그로 하여금 이전까지 추상회화에 천착하던 붓을 내동댕이치게 만들었다. 이윽고 사회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그의 인간 존재론에 대한 질문은 첫 개인전 《교실 이데아전》(1997)에서 선보인다. 작품 〈도살의 5가지 유형〉(1999)에서 가죽 소파를 난도질해서 뜯어내고 불태워 만들어 전시장에 매달아놓은 거대한 육질의 고깃덩어리는 동물이자, 인간 초상에 다름 아니었다. 크기에 따라 ‘선생’과 ‘학생’으로 구별된 그의 지시 텍스트는,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인간을 위계화된 질서 체계 안에 가두고 있는 폭압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도살된 듯한 고깃덩어리 내부를 각종 오브제와 쓰레기로 가득 채워 천장에 매단 작품〈십계명〉(2003)은 인간의 욕망이 빚은 타락과 범죄가 야기한 파국적 결말을 경고한다. 그 뿐인가? 작품〈질병-몸을 드러내다〉(2000)에서는 벌거벗은 인체상이 서있는 전면 벽에는 의학전문지로부터 뜯어낸 ‘종양이 있는 내부 장기 이미지’를 전기인두로 지지는 장면을 연속적으로 투사한다. 

아서라! 그에게 천박한 고깃덩어리는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가 작금의 ‘지배/피지배’와 같은 위계적 사회 질서의 틀을 탈주하는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보라! 고깃덩어리 위에 검버섯처럼 올라오는 질병의 증상들을 그는 꽃의 형상으로 해석하지 않는가? 이처럼 이탈에게서 ‘천박한 고깃덩어리’는 그 속에 거주하는 현대인을 구원하기 위한 ‘신’이라는 존재를 불러오기 위한 주체가 되는 것이다. 즉 이탈에게서, 상기의 역설적 주제는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으로 감싸는 공의로운 ‘신’을 요청하기 위해 제시된 것으로, 천박한 고깃덩어리에 대한 비판과 애정이 하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들뢰즈(Delunze)의 ‘~되기(devenir)’의 철학을 실천하는 이탈의 이러한 ‘동물 되기’는 타자를 내 안에서 이해할 것을 제안하는 그의 인간성 회복에 대한 거칠고도 도전적인 요청이다.
   


다른 것 같지만 하나로 움직이는 욕망(Desires that seem to be diffdrent but move together), 
crankshaft cctv 7ea beam projector, Sensor, Automatic, Sequence, Controll



II. 역설의 메타포_자폐적 지성 

이탈의 역설적 주제 의식은 육질의 표현 언어로부터 기계적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기계적 인간을 표상하면서부터 보다 더 깊이 문제의 본질로 잠입한다. 흐름과 단절을 지속하는 기계는 인간의 몸과 다를 바 없다. 만들어진 고깃덩어리를 자르는 기계를 시각화한 작품〈도살장의 성 요한나〉(1998)나, 그것을 군집으로 흔들어대며 이동시키는 기계를 표현한 작품〈폭력〉(2003)은 다름 아닌 인간(악인, 지배자)이 인간(선인, 피지배자)에 대해 자행하는 폭압을 상징한다. 작품〈살찐 비둘기〉(2007)를 보라! 껍질로만 존재하던 인간의 몸은 전동 기계에 연결되어 공기를 잔뜩 주입하고 비대해지면서 허상을 과장한다. 작품〈나는 그렇게 보였다〉(2009)에서 머리카락 다발을 흔들면서 귀신처럼 좌우로 움직이게 만드는 슬라이딩 기계는 또 어떠한가? 이처럼 ‘들뢰즈’식으로 ‘욕망하는 기계’는 우리의 주변 도처에 ‘또 다른 우리’로 존재하면서 우리의 몸을 폭력적으로 간섭하면서 작동한다.   

육질의 것이 사라지고 기계만 오롯이 남은 키네틱아트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폭력적 간섭은 지속적으로 고찰된다. 기계 위에 덮어진 천을 유령처럼 꿈틀거리게 만들어 마치 천이 폭압적으로 기계를 억압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작품〈공모〉(2003)나, 벽에 걸린 백여 개의 깨어진 백열전구 뭉치를 불이 들어온 백열전등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작품 〈오래된 구조〉(2003-2009)가 드러내는 역설 혹은 아이러니는 대표적인 예이다. 여러 대의 폐쇄카메라가 번갈아가며 거품 속으로 들어가며 똑 같은 영상을 투사하는 작품〈다른 것 같지만 하나로 움직이는 욕망〉(2009)도 그러하다. 

위계적 사회 질서를 공고히 하는 ‘기계-인간’에 대한 또 다른 ‘기계-인간’의 폭압은 그의 작품에서 자폐적, 더 구체적으로 ‘자폐적 지성’의 태도로 나타난다. 해결책을 타자와의 소통에서 찾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잠입해 들어가 성찰의 사유를 되새김질하듯이 반복해서 지속하기 때문이다. 벌거벗고 줄넘기를 반복하는 자신의 뒷모습을 볼록렌즈로 포착한 희화된 영상작품 〈비디오 점핑〉(2002)이 대표적이다. 그 뿐인가? 그의 문제작〈인간의 분류는 신을 처형한 이후에 가능하다〉(2010-2011)를 보라! 욕망하는 기계는 십자가형의 틀 위에서 끊임없이 좌측의 거품생성기로부터 발생하는 거품에 자신의 몸을 스스로 오염시키고 다시 우측의 맑은 물에 씻는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어떤가? 죄를 짓고 회개를 거듭하는 ‘나약한 인간 존재’(필자의 논의로는 ‘지극히 자폐적인 지성의 주체’)에 대한 완벽한 메타포로 보이지 않는가?  



작가 이탈


III. 신에게 드리는 기도

이탈은 두 개의 미래적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하나는 이전에 생명윤리의 문제로 인해로 미완성 상태로 끝냈던 작품〈전란(轉卵)의 기억〉(2009)을 다시 대규모의 전시로 기획하는 것이다. 암탉이 가득한 거대한 닭장을 좌우로 설치하고, 그 가운데 유정란을 3시간마다 흔들어주는 인공부화기를 설치하는 작업을 통해서 생명의 탄생에까지 간섭하는 인간의 변태적 욕망과 그것과 관련한 생명윤리를 시각예술로 탐구할 예정이다. 또 하나는 이전의 정적인 작업인 ‘백열전등에 대한 백열전등’을 선보였던 작품〈오래된 구조〉(2003-2009)를 동적으로 변환한 설치작품을 계획한다. 가로 7m, 세로 2m, 높이 4m에 육박하는 강화유리 박스에 수천 개의 백열전구를 중첩하여 쌓아놓고 3개월간의 전시가 끝날 때까지 천천히 프레스로 위에서부터 순차적으로 깨트려나가는 작업이다. 

그것은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서 위계적 질서 속 인간 분류가 횡행하는 현시대의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들이다. 이탈에게서 역설의 시작이었던 ‘천박한 고깃덩어리’의 생짜는 결국 역설, 아이러니, ‘인간-기계’의 키워드에 집중하면서 탐구하는 신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다. 세상의 무관심과 냉담함에 저항하면서 부피와 질량이 없는 평화의 시공간이 이 땅에 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서 말이다. 
이탈 홈페이지:    http://www.dogtal.com/



인간의 분류는 신을 처형한 이후에 가능하다, recycle robot, PLC, relay sensor support frame installation, 2010


질병-몸을 드러내다, 2000



도살장의 성(聖) 요한나, 불태운 백과사전, 정육절단기, cctv, 소형 영사기


나는 그렇게 보였다, 700x150x150, 철프레임, 동력전달장치 센서, DC모터, 인모, 가변설치, 2009



다른 것 같지만 하나로 움직이는 욕망(Desires that seem to be diffdrent but move together), 
crankshaft cctv 7ea beam projector, Sensor Timer, Automatic, Sequence Controll


출전/ 김성호, “인간의 분류는 신을 처형한 이후에 가능하다.”, 미발표 이탈 작가론.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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