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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을 알려주는데 왜 굳이 틀린 답을 하려하는가?

하계훈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에서 지금의 위치인 경기도 과천으로 이전하였을 때 우리 미술계에는 이 일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제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유럽이나 미국처럼 제대로 된 미술관이 생기는 것이라는 희망적인 시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왜 하나밖에 없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경기도의 산기슭으로 이전해야 하는가라는 부정적인 시선이었다.

그리고 10 여년이 지났을 때 이 두 가지 시선의 희망과 걱정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현실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덕수궁 미술관 시절의 옹색한 공간이 넓고 현대적인 공간으로 변화하면서 그동안 현대미술관에서는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전시들이 많이 열렸으며 새로운 미술관 관람객을 창출해내는 데에도 일정 정도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효과와 함께 새로 이전한 미술관의 위치 때문에 발생하는 관람객의 접근성 논란은 지속적으로 거론된 문제 가운데 하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함량이 미달하는 전시기획이나 부실한 운영의 문제를 위치 탓으로 핑계삼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결국 정부에서는 1998년부터 지금의 덕수궁 분관 위치로 미술관의 일부를 회귀시키는 결정을 내렸으며 그 다음 조치로 이제 소격동의 옛 기무사터에 또 하나의 현대미술관 분관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얼마 전 필자는 국립현대미술관 소격동 분관 설립에 관한 관련자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모임에 다녀왔다. 이미 신문과 방송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소격동에 있는 옛 기무사 터와 그곳에 붙어있는 국군병원 자리에 미술관 분관을 세우기로 결정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설계공모와 운영방안을 마련하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난 십여 년간 미술관 경영 관련 분야를 연구해 온 필자가 우리 정부의 일처리 과정을 지켜봐 오면서 항상 걱정스러웠던 것은 사업의 본질적인 성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려버린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러한 염려는 비켜가지 않았다. 미술관 측으로부터 들은 미술관 건립 준비과정을 요약해보면, 올해 말까지 기존의 시설을 비우고 현장 공사에 들어가 2012년까지 미술관 분관을 개관한다는 것이다. 약 2년 여 기간 동안에 모든 것을 해치우겠다는 것인데 필자에게는 소격동 분관 건립사업이 마치 무슨 주택단지 조성사업처럼 들렸다.

현대미술관측은 2년 만에 미술관 건립을 마무리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미술관측이 그때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목표와 전략을 가지고 어떻게 미술관을 운영하겠다는 연구도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그저 2012년에 건물을 완공하겠다는 우직스런 목표만 달성하려한다는 인상을 받고 돌아왔다. 설명 자료가 회수되어서 정확하게 옮길 수는 없지만 현대미술관 측에서 제시한 기본 목표와 방향에는 ‘전통과 현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공간’,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 등의 틀에 박히고 추상적이며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표현이 동원되어 국립현대미술관 소격동 분관 건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돌아오는 길에 필자는 일본의 이시카와 현에 있는 가나자와21세기 미술관과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등 외국의 중요한 미술관들이 설립되는 과정을 떠올려 보았다. 가나자와21세기 미술관의경우에는 시 인구의 2배 가까운 관람객이 외지에서 유입될 정도로 성공적인 운영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되는 미술관이다. 그런데 이들 미술관의 설립과정을 살펴보면 준비기간만도 8년에서 10년이 넘게 걸렸음을 알 수 있다. 가나자와 시에서는 2004년에 개관된 미술관을 위하여 1996년부터 미술관 건립을 준비하는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시민포럼을 수시로 개최하여 폭넓은 의견을 청취하면서 건립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건물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술관이 완성되면 그곳에서 매일매일 관람객을 접하면서 일을 하게 되는 큐레이터와 교육담당자 등의 직원들이 초기 단계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공간배치 뿐 아니라 소장품의 구입과 설치 위치나 활용방법에 대한 세세한 일까지 그 긴 기간 동안 꼼꼼하게 준비해 왔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런던 시내 중심의 테임즈 강가에 위치한 테이트 모던의 경우에는 치솟는 유가를 감당하지 못하는 부담감과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화력발전소가 기름을 연소시키면서 일으키는 매연문제 때문에 1981년에 문을 닫게 되었던 공간을 리노베이션한 경우다. 화력발전소의 터빈 가동이 멈춘 후 이곳을 여러 가지 목적으로 개발하겠다는 아이디어가 꾸준히 제시되었지만 영국 정부는 결국 1992년에 이곳을 미술관으로 바꾸는 결정을 내렸고 8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0년에 지금의 테이트 모던을 개관하게 되었다. 테이트 모던의 경우에는 이미 100여 년 전에 개관한 테이트 갤러리(지금의 Tate Britain)의 소장품이 점차 확대되면서 작품의 전시와 보관을 위한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요구를 바탕으로 분관 건립 준비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테이트 측에서는 이러한 사정 때문에 1980년대 말부터 새로운 공간을 물색하고 있었으며 결국 이 화력발전소를 낙점하여 1992년 공식 발표에 이어 1994년 설계자를 공모하고 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현대미술의 새로운 명소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개관한 미술관들은 관람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으며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가능하였다. 가나자와21세기 미술관은 개관한 지 1년도 안 되서 관람객 100만 명을 돌파하였고 테이트 모던도 연간 400만 명이 넘는 관람객들을 유치하면서 성공적인 운영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12년 런던 올림픽을 계기로 또다시 미술관의 확장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미술관을 준비하던 사람들도 건립 준비 기간이 짧을 수 있다면 짧게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적어도 7-8년 넘게 준비기간을 가진 것은 제대로 된 미술관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시 국립현대미술관 소격동분관 건립 사업에 관계하는 측에서는 우리도 벌써 몇 해 전부터 준비를 해왔다거나 우리 한국인들은 그들과 달리 짧은 기간에도 해낼 수 있다는 설득력 없는 항변을 할 지 모르지만,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소격동분관 설립 준비는 기본 운영철학에서부터 이제까지 실효성 있는 준비가 별로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미술관의 설립과 운영에 있어서 다른 나라에 비하여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경험이나 성과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좋은 소장품도 쉽게 확보하기 어려운 여건에 처해있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미술계의 오랜 기다림 뒤에 소격동에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짓는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국제적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미술관을 지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충실히 답을 구하여야 한다. 결국 우리는 선경험자들의 사례에서 배워야 한다. 앞에서 예를 든 미술관을 포함하여 외국의 몇몇 미술관들은 성공적인 미술관의 설립 경험이 있는 선배로서 국립현대미술관 소격동 분관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미술관을 하나 짓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간은 얼마인가?“라는 문제의 정답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런데 먼저 문제를 풀어본 사람들이 분명하게 정답을 알려주는데도 정부와 국립현대미술관은 왜 굳이 틀린 답을 선택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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