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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도 불구하고

하계훈

인간이 이루어내는 문화적 업적의 가치는 다양하고 다층적인 소통의 언어가 존재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소통이 때로는 인간 본위며 개인이나 소수집단의 특수성을 일반화시킨다든지 잘못된 선례를 무비판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등의 오류를 발생시켜 오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물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고도의 세련된 소통의 수단을 발전시켜왔다.

이번에 인터알리아에서 열린 <그림에도 불구하고>전은 우리의 삶의 소통 수단 가운데 활자 언어인 문학과 시각 언어인 미술 사이의 접점을 모색하여 소통의 효과와 이해의 심도를 한층 높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이 사용하는 소통 수단 가운데 이 두 가지 언어는 공통적인 접점을 찾을 수 없을 것처럼 서로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즉, 그린다는 것은 작가가 관람자에게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를 조형언어로 쓰는 것이며, 반대로 글을 쓴다는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심상을 이미지가 아닌 언어로 그려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미술 작품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쓰여 있고, 많은 소설과 시에는 저마다의 심상이 그려지게 된다.

이번에 출품한 작가들은 40세 전후의 나이로 우리 미술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표적인 다섯 명의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작업 과정에서 다섯 명의 시인과 소설가들을 만나 각자의 작품과 상대방의 예술세계에 대해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한 쌍을 이룬 문인과 화가들은 기본적으로 각자의 작업 방식을 유지하면서 미술작품을 언어화 하고, 각 문인들의 작품 가운데 한 점을 이미지화 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화가와 문인이 한 공간에서 마련하는 전시회는 이제까지 주로 두 장르가 물리적으로 결합하는 시화전 형식으로 소개되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차원을 넘어 문인들과 작가들이 서로의 예술 영역에 대해서 좀 더 깊숙이 다가설 수 있는 화학적 만남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리하여 황홀한 경험과 장르의 경계를 벗어나는 작업이 진행될 수 있었다고 한다.

참여 작가와 문인들의 시집과 소설, 그리고 화집을 돌려보면서 작가와 문인들은 자신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그래서 서로가 그 사람에 대해서 쓰고 그리고 싶은 대상을 결정하였고 서로의 작품들을 확인하고 만나는 과정을 통해 미술작품을 언어화하고 문학을 이미지화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이번 전시는 두 장르의 깊이 있는 상호교류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 대한 소통 경험의 폭을 넓히고 창의력을 고취하여 문학과 미술의 만남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새롭게 조망하고자 기획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회화 작품에 드러나는 다양한 서사구조에 대한 문인들의 고찰에 중점을 두고, 그림 이미지 속에 담겨있는 문학적 서사, 네러티브적 속성 등을 찾는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림에도 불구하고>전은 하나의 전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시를 기획하고 그와 관련된 출판을 통해 작가와 작품을 심층적으로 드러내는,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적 소통을 중층화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전시였다.

작가와 문인의 만남은 분명히 서로의 작업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서로에게 깊숙이 탐색할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작품에 본격적으로 침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시와 연결되어 출판된 책은 단순한 화집이 아니라 작가와 문인들의 대화를 기록하고 화회 작품에 대한 문학적 해석이 가해지는 서술의 장을 형성한다. 한지에 인두로 구멍을 뚫어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방법으로 작업하는 이길우의 작품은 소설가 김태우가 자신의 언어에 구멍을 뚫는, 다시 말해서 자신의 문장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유혹을 이끌어냈으며, 접어놓은 옷이 어떠한 물체나 동물의 형상을 보여주는, 윤종석이 주사기로 점을 찍듯이 화면을 구성해가는 작품에서 시인 이은은 형상기억합금이라는 물질을 떠올리게 된다.

화가들의 시각적 세계를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의 언어로 해석하는 작업은 자칫 화려한 수사와 형이상학적 서술로 이어질 듯하지만 작가와 문인 사이의 대화는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예술적 깊이를 읽어내는 예민한 부분까지 폭넓게 이어졌다. 변웅필의 자화상에 대한 김민정의 시적인 해석과 정재호의 작품에 대한 소설가 백가흠의 서술, 그리고 이상선의 현대적 인물 풍속화에 대한 시인 신용목의 폭넓은 해석과 서술은 독자 또는 관람자들이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 전시가 상업적 의도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우리 현대미술의 중요한 맥락을 짚어내는데 있어서 문학과 미술을 화학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해석방법의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나름대로 미술가들이 문학적 영감 촉발에 기여하는 효과도 목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미술계에 관행처럼 이어온 전시 팸플릿 만들기의 과소비를 한번쯤 되돌아보게 만든 것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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