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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몽 /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종교적 겸손함이 그려내는 삶의 이야기

하계훈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오랜 공백기를 지나 몇 해 전부터 작업을 다시 시작한 이여몽의 경우에는 최근의 우리 미술계를 광풍처럼 휩쓸고 간 상업주의적 미술 경향과 관계없이 자신의 생활 경험에서 터득하고 개인적으로 의미 있게 해석한 종교생활에 배경을 둔 추상 작품을 통해 서정적이면서도 대담한 필치로써 우리 삶의 정신적인 부분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이여몽의 작품은 물감을 화면에 적용하는 방법에 있어서 형식상으로 유럽의 앵포르멜이나 타쉬즘(Tachisme) 또는 미국의 액션페인팅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으며 한지를 찢어 붙이는 방식에서는 화면의 질감과 형상성을 회복하려 하렸던 종합적 입체파 시기의 피카소나 브라크의 작품들과도 부분적으로 접목되는 성격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미술사에서 이러한 사조들의 배경에는 주로 기존의 사회적, 정신적 가치의 상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그에 대한 대안적 수단으로서 인간의 주관적 자아와 실존을 강조하는 성격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여몽이 이러한 사조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여몽의 작품의 경우에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에 비하여 격렬함과 운동성이 억제되는 반면에 내용면에서 보다 자기발전적(self-developing)이면서 우아하고 명상적이며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가 미술대학을 다니던 1960년대 말에 우리 미술계의 관심이 일정부분 이러한 추상적인 표현 양식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작가가 간접적으로 그러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는 있겠지만 이번에 출품되는 그녀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최근에 와서 제작되었으며 학창시절에는 오히려 구상 작업을 위주로 하였다는 점도 작가의 작품을 앵포르멜이나 추상표현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 어렵게 만든다.
이여몽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자유로우면서 직관적이고·임의적인 표현이 특징을 이룬다. 이러한 표현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작가는 물감을 캔버스에 적용하는데 있어서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작업실에서 구할 수 있는 빳빳한 종이와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물감을 화면에 바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물감을 화면에 뚝뚝 떨어트리거나 붓는 형식을 취하기도 하며, 아크릴 물감을 접착제 삼아 한지를 화면에 부착하기도 하면서 작품을 전개시켜 나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는 인간의 인공적인 재현과 모방이 만들어내는 조형성이 갖는 한계를 발견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으로서 화면 속의 조형 요소들이 스스로 어우러지고 드러나도록 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자신이 지어내는 조형과 함께 작업실 탁자나 바닥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물감덩어리나 주변의 사소한 오브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소중하게 적용한다. 작가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인간의 재현 능력을 넘어서는 자연의 자율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조형적 위대함과 우리의 생활 속에서 감지되는 어떠한 초월적 존재의 힘을 느끼는 듯하다.

작가 스스로가 조심스럽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여몽은 창작생활 이외에 착실하게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생활은 양립하는 두 개의 활동이 아니라 서로 서로 영향을 미치는 활동으로서 작품 속에서 초월적 존재를 발견하는 기쁨이 종교생활의 진정성으로 이어지고, 종교적 헌신에서 오는 정신적 정화와 희열이 다시 작품의 조화와 균형을 담아내는 화려하고 선명한 표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 수년간의 이여몽의 작품이 전개되는 과정을 추적해보면 화면이 점점 대담해지고 밝아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에도 작가의 예술적 자신감의 성장과 함께 작가의 종교적, 정신적 안정감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여몽의 최근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화면은 대개 밝은 원색과 함께 부드러운 혼합색을 사용하고 여기에 우리나라 한지의 전형적인 속성을 더함으로써 우아하고 서정적인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그러면서도 어느 화면에서는 물감의 적용 흔적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격렬한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한 화면 안에서 관람자는 한 편의 시각적 오케스트라를 읽어내는 것과 같은 감정의 순환을 경험할 수 있다.
대부분의 추상미술의 경우 메시지 전달의 적접성이 부족하고 주관적 표현이 주를 이루는 작품의 속성 때문에 구상적 작품에 비하여 소통의 가능성이나 소재의 착상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데, 이여몽의 경우에도 이러한 성격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는 화면 속에서 거대한 사회적 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 경험에서 발견하고 느끼는 감흥과 그로부터 촉발되는 표현 충동을 색채 추상 형식으로 표현하여서 한 편의 음악이나 한 편의 소설처럼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추상미술과 달리 이여몽은 한지와 아크릴의 결합을 통해 개성적이고 독특한 표현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한지가 주는 심오한 매력이 아크릴 물감이라는 이질적인 매체와 한 화면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특히 한지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물감과 먹을 흡수하는 것에 비하여 서양화의 재료인 캔버스와 아크릴은 물감 층 위에 물감을 다시 쌓아가면서 작품을 완성하는 표현 기법상의 상이함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여몽의 작품에서는 과장됨 없는 순수함과 솔직함, 다양한 조형적 요소를 소중하게 다루는 진정성, 작품 제작과정의 즉흥성과 지속성의 조화,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신뢰, 삶의 경험으로부터 작품으로 편입되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깨달음과 종교적 겸손함 등이 잘 녹아 있어서 앞으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들이 탄생될 것이라는 예측을 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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