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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장의 발달사

하계훈

미술시장을 포함한 상품시장은 도시의 성장이나 자본시장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어 왔다. 서양에서도 이러한 시장은 고대의 로마제국, 르네상스 시대의 베니스 공화국, 16세기 앤트워프와 17세기 암스테르담과 런던, 그리고 18세기의 파리 등으로 이어지면서 유럽경제를 이끌어 왔고 미술시장도 이와 병행하여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도시들은 당시의 정치와 경제, 외교 활동의 구심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시장에서의 경매라는 방식의 거래는 해당 분야에 긴장감과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박물지(Natural History)를 쓴 로마시대의 작가이자 학자인 플리니(Pliny the Elder)는 기원전 146년 로마에서 그리스로부터 빼앗은 전리품과 미술품에 대한 경매가 열린 적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로마인들에게 그리스 시대의 미술품은 높은 인기를 누렸는데 이에 따라 가격도 상승하고 위조품도 성행하였다. 로마의 미술시장에 관한 사실을 뒷받침해 줄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이미 로마시대부터 미술품을 포함한 물품들이 경매시장을 통해 매매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동서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니스는 사치를 금지하는 법이 제정될 정도로 도시경제가 번성하였으며 미술 분야에서는 유화와 함께 판화가 특히 유행하였다. 베니스의 상류층에서는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특히 1453년 비잔티움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유출된 동로마제국의 미술품들이 베니스에 상당수 유입되어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거래되기도 하였다.

대항해 시대가 전개되면서 지중해 중심의 생활에서 대서양 중심의 생활로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확장된 16세기의 앤트워프는 북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 도시로 성장하였으며 신대륙 개척 이후 세계 각지로부터 이곳으로 모여드는 향신료와 계피를 실은 배들이 앤트워프의 경제를 살찌웠었다. 앤트워프에서 열리는 미술품 경매에는 국제적인 면모를 가진 도시답게 유럽 각국에서 미술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금융자본가와 사업가, 외교관들이 몰려들어 국제적 사교와 비즈니스의 장을 형성함으로써 미술품 경매 시장은 단순한 미술시장의 기능으로 그치는 곳이 아니라 중요한 사업과 외교의 중심 무대로 기능하기도 했다. 앤트워프에서 경매가 열리면 국내뿐 아니라 국외의 많은 수집가와 외교관들에게 미리 초청장이 발송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의 국왕들도 신하를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경매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미술품 경매장에서 바로크시대의 벨기에 미술을 대표하는 피터 폴 루벤스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도 미술품 구입을 위한 조언자로서 심심치 않게 역할을 수행하였다.
베니스나 앤트워프와 마찬가지로 16세기 말 이후의 암스테르담에서도 미술품 경매가 유행하였으며 암스테르담 시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는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술품 구매와 상호 관람을 매개로 상류사회의 인맥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은 한 해에 수 만 척의 배가 드나드는 국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경제의 부흥과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시민들의 자부심은 이러한 내용을 반영하는 그림들과 초상화 등의 수요를 폭증시켰으며 미술품 경매시장도 함께 발달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지금의 경매방식과는 반대로 작품이나 물건을 파는 측이 최고가격을 제시한 다음 낙찰자가 나타날 때까지 가격을 낮추는 방식으로 경매가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경매방식을 역경매 또는 네덜란드식 경매(Dutch auction)라고 한다. 이러한 네덜란드식 경매 방식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와토(Antoine Watteau)의 작품을 거래하던 화상 제르생(Edme Gersaint)이 자기의 소장 작품을 판매할 때 채택하기도 하였다.

17세기 후반 무렵부터 영국에서도 경매가 성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초기 경매품 중에는 동전과 가구, 의류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미술품의 비중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유럽 대륙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바다 건너 영국에서 일시적으로 도피처를 찾은 재산과 미술품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계속 남아있게 됨으로써 이러한 작품들과 귀중품들은 나중에 영국의 경매시장의 중요한 매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자 많은 미술품들이 안전한 곳을 찾아 영국으로 보내졌으며 크리스티와 같은 경매장은 이러한 미술품을 경매에 올리는 일이 빈번했었다.

로코코 시대 이후로 미술사에서 중심을 차지해 온 프랑스는 18세기 후반부터 유럽 미술계를 주도하였지만 그때까지 프랑스 정부는 귀족들에게 변화된 경제 환경 속에서도 상업적인 활동을 금지시킴으로써 자본시장과 미술품 경매 시장이 네덜란드나 영국에 비하여 본격적으로 성장하지 못하였고 미술 시장도 활성화되지 못한 편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1754년 국영 미술품 경매장인 드루오(Drouot) 경매장을 설립하였으나 오히려 나중에 영국에서 출발한 크리스티니 소더비와 같은 경매회사가 프랑스에 진출하여서 활발하게 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그 후 18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미술품 경매를 위한 특별한 장소가 마련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요한 경매를 위하여 왕이 자신의 궁전 일부를 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767년에 열린 장 드 줄리엔느(Jean de Jullienne)의 소장 작품 경매는 루브르궁의 살롱 까레(Salon Care)에서 열렸었다.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품 경매의 기원은 18세기 런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744년 소더비사가 런던에서 서적 경매를 시작으로 먼저 문을 열고 나중에 미술품 경매를 실시하였고, 크리스티사는 그보다 20년 뒤인 1764년에 회사를 설립하여 두 회사가 한때는 세계 미술품 경매 시장의 90% 가까이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소더비사가 경매회사로서는 먼저 출발하였지만 미술품 경매를 먼저 시작한 회사는 크리스티사였다.

19세기 전반에 산업혁명의 수혜자로서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들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경매시장의 주역들은 주로 세습 귀족들이었으며 그들의 몰락과 사망을 기점으로 종종 재산 처분을 위한 경매가 진행되었는데 경매는 적게는 십여 일에서 길게는 한 달을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소더비와 크리스티사가 등장하는 무렵부터의 미술품 애호가 뿐 아니라 투자가들도 미술 경매시장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낙찰가가 상승하게 되고, 경매의 활성화는 콜렉터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높은 가격에 낙찰된 작품들은 신문의 뉴스거리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유럽을 뒤쫓던 미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사회의 전반적인 안정을 찾았고 문화적 활동이 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20세기에 들어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세계 경제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하자 자연스럽게 자본시장과 미술시장이 미국의 뉴욕으로 이동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미국의 미술품 경매 시장은 세계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하며 선두를 유지하고 있고 그 뒤를 영국, 중국, 프랑스가 따르고 있다.

미시간 출신의 부동산 재벌 타우만(Alfred Taubman)은 1983년 소더비사를 인수하여 침체일로를 걷던 소더비사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으나 작품 가격 조작 혐의로 2002년 벌금 750만 달러와 함께 1년간의 실형을 살기도 하였다. 타우만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오늘날의 미술품 경매시장은 미술계에서 점차 그 규모와 비중이 확대되고 있는데 그에 따른 운영의 투명성과 작품의 진위문제 등에 보다 전문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미술시장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막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고 있는 우리 미술 경매 시장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서양의 미술 경매 시장이 겪어온 실수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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