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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석

하계훈

드로잉은 원래 본격적인 페인팅의 전단계에서 예비적으로 실시하는 작업으로 인식되어 왔다. 특히 연필을 이용한 드로잉의 경우 그 재료 자체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을 마무리하기보다는 작업의 초기 단계에서 좀 더 세밀한 표현이나 채색 표현으로의 전개를 위한 기초적인 밑그림 작업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6세기에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연필은 원래 필기구로 사용되거나 건축 설계 등의 분야에서 곧은 선을 일정하게 긋는 등의 작업에 주로 사용되어왔다. 차영석의 경우 작품 전체를 연필 드로잉으로 진행하는 특이한 작업을 해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시각적 표현 도구로서의 연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술 분야의 작가가 아니더라도 연필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인 인물들은 발명가 에디슨이나 <에덴의 동쪽>을 쓴 소설가 존 스타인벡 등을 들 수 있다. 에디슨의 경우에는 특정한 상표를 특수 주문하여 그 제품만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항상 일정한 길이의 연필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즉석에서 메모를 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존 스타인벡의 경우에는 소설 한 작품을 탈고하기 위하여 300 자루 이상의 연필을 소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영석이 연필 작업에 집중하게 된 것은 작가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기본에 충실하여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여 작업한다는 각오와 태도를 반영한다. 이미 미술대학의 훈련을 거친 상태에서 학교를 옮겨 조형 훈련을 다시 시작하면서 조형의 근본을 다지는 방법으로서 시작된 연필 드로잉이 이제는 작가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업이 된 것이다.
원래 드로잉이라는 작업은 서양화에서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보다 완성도 높게 진행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아카데미에서 집중적으로 훈련되었던 과정이었으며 동양에서는 사실적 재현성과 정밀한 표현이 요구되는 초상화나 불화의 밑그림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차영석의 경우는 연필을 이용한 드로잉에 집중하면서도 이와 같이 사실적 재현을 목적으로 작업하지 않는다.

차영석은 자신의 연필 드로잉에 「건강한 정물」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는데 그의 작품들은 제목이 말해주는대로 일반 가정에서 흔히 발견되는 기물 가운데 건강을 연상시키는 숯이라든지 건강을 위해 수집한 물건들과 여행지에서 사온 듯한 기념품들이 화면 안에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다. 말하자면 건강한 정물이란 건강을 상징하는 정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러한 작가의 정물을 ‘미술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고 오래된 재료인 종이와 흑연이 주는 무공해의 단아한 느낌과 더불어 화면을 구성하고 있는 일상적인 정물들’이라고 보고 있으며 (무공해이기 때문에(?)) ‘그들(정물)은 지극히 건강하다’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건강론을 펼치기도 한다.

차영석의 작품은 종이 위에 다양한 경도의 연필로 그려지는데 연필의 경도에 따른 미묘한 톤의 차이와 필선의 집적이 참을성 있게 가해짐으로써 완성되며 그렇게 구성된 화면은 전체적인 구성에 있어서 전통적인 화면구성의 법칙을 따르지 않은 구도로 형성된다. 그렇게 제작된 작품 안에서는 상호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정물들이 등가의 요소로서 화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고전적인 회화에서처럼 원근의 법칙을 준수하거나 화면의 중심부에 주제가 자리 잡는 방식의 표현을 벗어나고 있다. 또한 내용면에서도 여러 가지 기물들이 화면에 나열되면서도 그 안에서 조직적인 내러티브가 구성되지 않는데 이런 의미에서 차영석의 작품은 추상은 아니지만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갖고 있는 현대적인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차영석은 연필의 미묘하고 섬세한 표현의 가능성을 천착하면서도 그것을 사진적 사실주의 방식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전통적인 표현방식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연필이 가지고 있는 재현적 표현성을 억제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작품 화면에는 일루전이 배제된 평면적이고 삽화적인 정물이 자리 잡게 되고 적당한 형태의 왜곡과 변형을 통해 이 물건들이 하나의 기호처럼 작용하게 된다. 연필 작업만을 고집하다가 작고한 어느 작가의 작품을 놓고 누군가가 ‘연필 하나만으로 일곱 가지 색을 표현하였다’고 말하였다든가 이와 비슷하게 중국의 화론 가운데 하나에서 먹 하나로 다섯 가지 색을 표현한다고 했지만 차영석이 연필을 다루는 태도는 이와는 다른 방향인 것 같다.

일반 관람객들에게 연필이라는 비교적 친숙한 매체는 작품과 교감하는데 있어서 불필요한 긴장감을 제거해주고 보다 친숙하게 작품에 다가서게 해주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차영석의 연필 드로잉은 마치 그림일기처럼 개인의 사적인 경험과 정보를 드러낸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람자는 연필이 주는 새로운 시각적 체험의 가능성을 경험하게 되며 좀 더 가까이 화면에 다가서다 세밀하게 관찰해보면서 작가의 손놀림과 작품 제작의 프로세스를 따라잡는 과정에서 작가의 개인적 창작과 경험이 일반화되는, 일종의 감각적 전치(轉置)의 묘미를 느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연필 드로잉이 갖고 있는 문제점도 한 번쯤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연필 드로잉의 묘미를 탐색해오는 차영석의 작품이 가지는 한계는 제작 속도의 제약, 그리고 이와 연동되는 작품의 규모의 문제, 모노톤 형식의 제한적인 표현과 표현 소재나 장르의 제약 등을 들 수 있다. 주로 정물을 통해 작품을 제작해 오고 있는 작가가 앞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와와 같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이 하나하나 풀려갈 때 관람자들은 차영석이 추구하는 조형세계에 좀 더 공감하며 보다 친숙하게 다가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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