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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희 / 화면을 향한 시각적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하계훈

회화의 재료는 작품의 표현력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무채색에 가까운 흑청색과 흰색의 아크릴 물감, 그리고 목탄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러한 재료들은 화면 속에 체계적인 적용과정을 거치면서 작가의 손에 의해 훌륭한 작품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그 의미를 추출할 수 없는 물질의 무질서한 집적에 머무르기도 한다.

우리는 작가가 어떠한 재료를 선택하는가를 보고 그가 창작해내는 작품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서양회화에서는 템페라 안료를 도입함으로써 이전보다 얇고 투명한 세부묘사가 가능해졌고 15세기 경에 유화물감이 발명됨으로써 화가들은 보다 부드럽고 윤택한 화면을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동양에서 한지 위에 먹을 사용한 회화에서는 이러한 서양회화와는 다른 느낌과 성격을 갖는 작품을 제작하여왔다. 서양과 달리 동양의 회화에서는 사실적 표현보다는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표현과 세상의 모든 것이 간략하게 응축된 기운 같은 것을 높이 평가하고 동양회화를 전공하는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그러한 가치를 추구해왔다.

차명희는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하였지만 요즈음 그녀가 사용하는 재료는 한국화적 전통과는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재료라 할 수 있는 아크릴과 목탄이다. 아크릴은 건조가 빠르며 열에 강하고 다른 안료와 비교적 쉽게 섞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채화의 투명성과 유화의 세련미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상업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목탄은 회화의 완성작품에 사용되기 보다는 밑그림을 그리는데 사용되었으며 작가의 아이디어를 선묘 중심으로 빠르게 스케치하는데 주로 사용되어왔다. 재료적인 측면에서 보면 차명희가 선택한 아크릴과 목탄은 그녀의 작품에서 이전의 전통채색화나 수묵화와는 다른 어느 정도 실험적인 표현의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게 해준다.

1983년 첫 개인전을 열고 이어서 5년 뒤에 2회와 3회 개인전을 가졌던 차명희의 초기 작품에서는 주로 한지 위에 먹과 채색이 번짐의 효과를 발휘하며 화면을 구성하는 시도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부분적으로 무의식적이고 우연성에 의존하는 화면 구성의 시도나 네모난 화면의 틀을 벗어나 서양회화에서의 변형된 화면(Shaped canvas)과 같은 시도도 나타나지만 아직까지 작가의 예술성의 뿌리는 획 하나하나에 깃든 기운을 중시하고 화면의 여백과 한지의 흡수성을 이용한 발묵효과에 의존하는 한국화의 전통적인 기법과 채색의 정신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관찰은 비록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작가의 작품화면 안에서 발견되는 한국화와 서예의 진수인 에너지 넘치는 획(劃)의 도입에 의해 서정적 분위기로 흐르는 화면을 바짝 긴장시키는 효과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반추상적이기는 하지만 화면에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동양의 산수화적 서정성 등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최근의 그녀의 작품에서도 비록 아크릴과 목탄을 이용한 추상 작품이지만 여전히 산수화나 풍경화에서 드러나는 원근감이나 선묘의 힘과 절묘함이 남아있는 것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진술을 빌자면 차명희는 대학교육을 통해 습득한 한국화적 전통에 대한 체화(體化)에서 오는 중압감과 전통화화에서 사용하는 붓을 이용하여 필획을 그어가는 작업에서 오는 과도한 긴장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모종의 새로운 선의 표현형식의 도입이 필요했다고 한다. 선뿐만 아니라 대상의 재현적인 묘사과정을 긴장상태를 유지한 채 이끌어가야 하는 부담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도 작가에게는 모종의 변화가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뇌의 탈출구로서 작가는 재현적 묘사보다 추상적으로 압축된 이미지의 표현을 선택하였으며 이러한 추상적 이미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편으로서 작가가 우연히 발견한 재료가 아크릴과 목탄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회화는 장르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으며 작가들도 이러한 구분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을 전보다 덜 느끼는 편이다. 차명희 역시 자신이 선택한 재료 때문에 자신이 한국화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차명희는 한국화의 정신을 구현하는 방법으로서 전통에서 벗어난 성격의 재료선택을 통해 우회적으로 궁극적 목표에 다가서고 있을 뿐이지 한국화단의 이단자로 추방당할 정도로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간 것은 아니다.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초기작에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동안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한국화적 절제와 긴장의 표현, 선 하나하나에서 개성과 힘을 느끼기 위한 작가의 노력, 그리고 현상보다는 근본을 포착하려는 섬세한 사색과 수양의 흔적이나 작품 제작에 앞서 마음을 다스리는 정신적인 진입과정의 진정성 등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장지위에 짙은 흑색 바탕을 입힌 넓은 화면에 평붓을 이용하여 수평으로 칠해진 흰색 아크릴은 이제부터 작가가 힘들여 가꾸어 나아가야 하는 조형적 상상력과 절대적 진리를 담는 무한의 장을 펼쳐내며 관람자들로 하여금 상상력의 힘과 에너지가 충만한 미지의 공간으로 빠져들도록 시선을 유인한다. 이러한 상상력의 바탕을 마련하는 붓놀림을 통해 작가는 이제 자신이 몰입하려는 그 무엇인가에 조금씩 다가서며 정신을 모으기 시작한다.

작가 스스로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대상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구상화 작가로서는 스스로가 적합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기에 그녀의 작업은 굳이 시각적 경험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담담함을 나타내준다. 과연 작가는 이러한 공간에 무엇인가를 표현하려 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작가는 이러한 바탕 채색 작업을 통해 화면의 저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하며 그것이 곧 자신의 내면과 일치하는 공간임을 깨닫고 어떻게 그 속에 존재하는 것을 미지의 공간에서 끄집어내어서 우리에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차명희의 화면에는 청회색의 미묘한 명암의 변화를 머금은 바탕 위에 목탄으로 그어진 분절된 선과 보기에 따라서 흔들리며 하강하는 듯한 짧은 곡선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화면 위에는 수면을 뚫고 솟아오르는 수초의 끝부분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그들의 미동에 의해 수면의 흔들림을 연상하는 이미지가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에 작가가 작품에 부여한 명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소리(sound)가 들리고 바람을 느끼면 화면에 드러나는 이미지는 마치 작가가 자연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작가는 무엇을 표현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기보다는 구체적인 형상과 색채를 지우고 제거하여 점점 단순하고 정제된 실제를 만나고 싶어 한다.

화면을 마주하는 작가는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와 같은 관조와 명상의 시간을 갖고 나서 바탕화면 위의 아크릴 물감이 적당히 마른 순간에 짧고 간결하지만 긴장된 힘과 에너지가 응축된 드로잉의 흔적을 거침없이 뿜어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선들의 움직임을 통한 일종의 드로잉의 형태로 나타나 마치 동양의 선종화의 일필이나 서양 추상표현주의의 액션 페인팅을 연상시켜준다. 다만 그녀의 작품이 서양의 액션 페인팅과 다른 부분은 격정적인 몰입 과정에서도 항상 의식이 절제되어 있고 화면의 상하의 위치를 전도시키지 않으며 나름대로의 화면의 질서를 유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무채색 화면의 단순성에 비해 화면에서 읽혀지는 빠르고 역동적인 작가의 제스처의 흔적은 채색화 못지않게 화면위에 모종의 에너지와 활기를 느끼게 해주며, 작가의 내면에 잉태된 이미지를 표현하는 몸짓을 통해 작가가 지향하고 있는 관념과 사고를 추적하다 보면 어느새 화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의 구체성은 선과 점, 흔적 등이 불러일으키는 추상적 개념의 기호처럼 읽혀질 수도 있다.
화면을 통한 작가의 고민은 자신의 표현 행위가 결과적으로 자연 현상의 묘사로 나타나 화면이 자연의 일부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진청색과 흰색을 장지에 겹겹이 입혀가며 그녀는 상념과 번뇌를 지우고 시공을 넘어선 무한한 공간으로 들어서 무언가를 느끼고 그것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목탄을 가지고 화면 위에 드로잉을 하는 것이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그녀가 느끼고 보았던 통찰의 결과를 지워버리고 덮어버리며 결과적으로 자연의 이미지의 재현으로 나타나는 것이 늘 작가를 안타깝게 만들어 왔다.

최근 작가는 이제까지의 작업에서 다시 한번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작가는 단색의 아크릴 화면에 짧게 수직 또는 곡선으로 기호처럼 적용된 목탄의 획들을 보다 조용하고 침잠된 분위기로 이끌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한 시도로서 작가는 요즈음 이전과 동일한 화면 바탕 위에 동일한 목탄을 사용하여 반복적으로 수평선을 그어감으로써 선의 미묘한 획과 화면의 수평성이 강조되는 작품을 시도하고 있다. 요즈음 우리에게 익숙한 디지털 음향기기에서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음의 파동을 그래프로 보여주는 화면에서처럼 분절된 수직선과 곡선에 의해 나름대로의 음향과 리듬감을 갖던 이전의 작품들을 한 획으로 이어지는 수평의 선으로 대치시키는 작업의 저변에는 보다 침잠되고 보다 조용한 내면의 소리를 추구하는 작가의 구도자적인 수련이 느껴진다.

이러한 작품 앞에서 이전의 작품들의 채색과 형상, 전통적 화법에서의 붓의 긴장감, 단편적 기호와 같은 목탄의 분절된 획들, 그리고 여기서 연상되는 작가의 폭발적인 몸놀림 등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마지막 대단원처럼 긴 수평의 선들이 반복되는 화면 속에서 한 편의 교향곡의 마무리로 향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작가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화면을 향해 지휘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그녀의 작업은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스타카토처럼 분절되었던 화면의 다양한 소리를 모두 소화하여 마침내 침잠과 명상으로 마무리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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